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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지음 / 석필 / 1998년 1월
평점 :
품절

책,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 이덕일 저
정몽주~
고려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알려진 인물~
최후까지 고려를 지킬려고 한 인물~
과연 그 신화가 사실일까요 ? ㅋㅋ
결론은, 정몽주는 최후의 순간에만 역성쿠테타를 이끈 이성계 집단에게 반대를 했을 뿐, 그 이전까지는 이성계와 동지였다는 사실이다~ ㅋㅋ 그럼 그 증거를 한번 볼까요 ? / 참고로, 저는 초중고교 시절에 정몽주의 이런 과거가 있다는 것을 역사 시간에 들은 적이 없습니다. ㅋㅋ 저 대입고사에서 국사 1개 틀렸습니다~ 오로지, '정몽주 = 고려의 마지막 충신' 으로만 배웠던 것입니다~ ㅋㅋ
정몽주
1. 정도전과 동창. / 이색의 제자들
2. 정도전과 달리, 집안은 귀족 출신
3. 만20세에 시험 합격.(공민왕 6년) / 23세에 문과에 장원급제 / 25세에 예문관 검열 수찬으로 화려하게 관문 입성
4. 대표적인 친명파이자, 명나라와 정통한 외교관
5.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오다가 난파를 당해서 12명이 익사하고 여러명이 실종된 사고에서, 정몽주는 13일간 바다에 표류하면서 구조되었는데, 이때 가슴속에 국서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이 명나라 태조 주원장에 알려지면서, 명나라에 신임을 얻게됨
6. 왜구문제로, 일본의 쿠슈에 파견되어서, 인질로 잡혀있던 700여명이 고려인과 함께 귀국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둠
7. 정몽주는 이성계-이방원일파에게 살해되기 직전까지 아주 우호적인 사이였다.
8. 정몽주는 위화도 회군을 찬성했다.
9. 외화도 회군후,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을 폐하는데도 동조했다.(이 두왕은 결국 사약먹고 죽음)
10. 공양왕 옹립할 때도 정몽주는 적극 찬성했다.(공양왕은, 공손하게 임금자리를 양도했다고 해서 붙여진 고려의 마지막 임금이다. 그도 역시 몇년후 이성계에의해 아들/손자와 함께 목졸려 죽는다)
11. 정몽주는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 영서운관사' 라는 긴 이름의 관직을 제수받는다.
12. 또한 임금을 폐하고 다른 임금을 옹립한 공으로 공신이 된다.
13. 정몽주가 이성계와 정적으로 돌아선 것은, 이성계 일파가 공양왕마저 폐하고 새 왕조 개창을 노골화하려 할 때였다. 즉, 정몽주는 이성계를 임금으로 만드는 것만은 반대했던 것이다.
14. 그러나, 위화도 회군을 할 때부터, 조선왕조의 개창은 이미 결정난 사항이었다. 이를 지지한 정몽주가 할 말이 있을까 ?
15. 정몽주는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는데, 이방원(후의 조선 태종)은 정몽주가 죽은 지 13년 후인 1405년에 권근의 주청을 받아 들려 정몽주에게 시호를 추증한다. ==> 이방원 자신이 죽인 정몽주를 13년 후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충신으로 만든 것이다. 이는 새로운 왕조인 조선이 성립이 되고서는, 이제는 정몽주같이 끝까지 왕조에 충성하는 신하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를 일종의 영웅/우상화 작업을 한 것이다 ㅋㅋ
p.s.
조선초기 국호를 정하기 위해, 이성계는 '조선'와 '화녕' 2가지를 명나라에 보내 선택하게 했다. 조선은 고조선을 잇는 의미였고 화녕(和寧)은 이성계의 고향 이름이었다.
이때, 명나라는 '조선'을 선택하는데, 그 이유는, 신생국 조선은, '기자조선'의 후예라는 의미로 선택하게 된다. 즉, 이성계의 조선 신생국은, 기자조선의 후예이니, 대대로 명나라에 충성하라는 의미로 '조선'을 선택하게 된다. ㅋㅋ
참고로, 현재는 '기자조선' 설은 거의 부정이 된다. 그러나 500여년전에는 널리 알려진 것이었고, 특히가 유교/성리학적인 관점에서 사대주의가 힘을 얻던 시기여서, 우리민족 스스로가 기자조선의 후예임을 인정하기도 한 시기였다. ==> 지금 미국의 51번째 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랑 뭐가 다르겠는가 ?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