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대우고전총서 21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 아카넷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다
 그리스 비극의 몰락 후 아티카 비극을 선구자로서,

그리고 스승으로서 존경하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예술이 꽃피우게 되었다.

그 신종 예술은 아티카의 새 희극으로 비극의 타락 형태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새 희극 작가의 대표로는 유리피데스를 꼽을 수 있다.

 

 ~희극 작가 유리피데스
그동안의 관객과 달리 유리피데스의 관객들은 스스로가 말하는 법을 배웠다.

모든 극의 준비는 줄거리를 위함이 아니라 관객들의 정열을 위한 준비였다.

다시 말해 새로운 희극의 길을 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관객이란 말뿐이고 질도 여러 가지이며 수에 있어서도 영속적인 양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는 주위를 둘러 보면서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는가를 살폈다.

그러던 중 그는 대중과 인류의 인사들이 그에게 불신의 미소를 던지는 가운데

또 한 사람의 관객을 발견하였다.

이 사나이와 손잡음으로써 비로소 그는 지금까지 고군분투하고 있던 상황에서 벗어나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예술 작품에 대항해서 무모한 싸움을 시작하는 용기를 갖게 되고

새로운 예술 창조의 선구자를 꿈꾸었다.


~새로운 마신 소크라테스와의 결탁
  비극 <바커스의 시녀들>은 유리피데스가 말한 비극의 해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새로운 마신에 의해서 실행되었다.

이제 그리스 비극은 멸망하고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소크라테스 적인 것의

새로운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옛 비극을 이해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존중하지도 않았던 제 2의 관객이었고

전연 다른 새로운 오르페우스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그이지만 아리스토 파네스의 희극 속에서

유리피데스와 그는 분개와 경멸로 말해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작품 속에서

소피스트의 제 1인자로서,모든 소피스트적 노력의 귀감이자 정수로서 취급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아연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비극 예술의 증오자였던 소크라테스, 그는 보통 때는 비극 관람을 삼가지만

유독 유리피데스의 신작이 상영될 때는 관객 속에 얼굴을 보였다고 한다.
소크라테스 주의는 (다만 본능에서)란 말로 기성 도덕과 예술을 단죄한다.

그는 오직 혼자서 이 세계와는 전연 질이 다른 문화,예술,도덕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본질을 여는 하나의 열쇠는 <소크라테스의 데모니온>이라고 불리는

이상한 현상이다.

일반적 인간들의 경우 본능은 바로 창조적, 긍적적 힘이며,

의식은 비판적이고 경고적 역할을 갖는데 반해 그의 경우는 그 반대라는 것이다.

소민족 그리스가 추악한 악덕을 특색으로 여러 민족 사이에 천재가 대중적 존엄과 특별대우를

요구했던 것처럼 소크라테스 역시 전례가 없던 존재 형식, 즉 <이론적 인간>의 전형을 그 속에

인정하는 것이 필요했다. 예술은 본능으로써 과학에 부속되어 있으며 과학을 점점 더 그 한계로

이끄는 것이지만, 이 한계에서 과학은 예술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예술은 이러한 메커니즘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과학의 본능에 이끌려 살 뿐만 아니라 그 본능에 의해 죽을 수도 있었던 최초의

인물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죽음으로 가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지식과 논거에 의해서

죽음의 공포를 면한 인간의 모습으로서,

과학의 입구에 걸려있어 누구에게나 과학의 사명을 상기 시킨다.
 

○ 과학과 예술
과학의 비교 사제인 소크라테스 이후, 철학의 유파는 밀려오는 파도처럼 차례차례로 교대해 왔다.

교양 세계의 넓은 범위에 지금까지 예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지식욕이 보급된 결과,

과학은 높이 치켜 올려져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과학이 본래의 임무가 되었으며,

그리고 과학은 그 무대로부터 다시는 추방되는 일이 없었다.
또한 이 보편화된 지식욕 덕분에 사상의 공통된 그물이 전 지구상에 퍼졌을 뿐만 아니라

전 태양계에 걸친 법칙 까지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실제 이 모든 것을 현대의 놀랄 만한 높은 지식의 피라밋과 함께 생각하여 볼 때,

소크라테스 속에 이른바 세계사의 한 전환점인 소용돌이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적 인식의 기쁨을 체험한 사람, 그리고 이 인식이 차츰 윤곽을 넓히면서 모든 현상계를 

포괄하려고 하는 것을 감지하는 사람은 단순히

그 인식의 욕망 이외의 것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이와 같은 자극을 가진 사람에게는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야 말로 전연 새로운

형식의 그리스적 경쾌함과 생존의 기쁨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강력한 망상의 자극을 받아서 제지하기 어려운 과학의 한계에까지 급히 가면,

거기에서 논리의 본질 속에 숨어 있는 과학의 낙천주의는 좌절된다.
논리가 그 한계점에서 공전을 되풀이 하고,

마침내 자기의 꼬리를 무는 것을 여기서 보고 몸서리칠 때 새로운 형식의 인식,

비극적 인식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 무서움을 참아내기 위해서도 보호와 치료제로서 예술이 필요한 것이다.


○ 낙천의식 vs 비극의식, 그리고 음악
현대 세계 최고 영역에서의 낙천주의적 인식에

선자와 비극적 예술을 추구하는 진영의 싸움에 대해 말해보자.

여기서 비극적 진영이란

그 조상 소크라테스를 선두로 하는 가장 깊은 본질에서의 낙천주의적 과학을 의미한다.

또한 앞으로의 내 모든 원리는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를 기점으로 말해짐을 미리 밝혀둔다.

 

~음악과 현상, 개념과의 관계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분리되어 있는 그 자체,

두 개의 예술의 힘이 병행해서 작용하는 경우에 음악이 발생시키는 미적 효과에 대해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우리는 현상(또는 자연)과 음악 세계를 동일한 사물의 다른 두 가지

표현이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 사물은 다른 두 세계의 유사성을 매개하는 유일한 것이며,

두 세계의 유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 자체의 실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곧 음악은 세계의 표현으로 보여질 때 최고도로 보편적인 하나의 언어이며,

이것은 개념의 보편성에 대해서마저 거의 개념이 개개의 사물에 대해서와 같은 관계와 있다. 

그것은 어떤 장면, 행동, 사건, 환경에 대해서 적합한 음악이 연주된다면 이 음악에 의해서

이것들의 신비스러운 의미를 해명하여 주는 것처럼 생각되어,

음악은 이것들의 가장 옳고 명확한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곧 음악은 모든 형식에 선행하는 가장 내면적인 핵심, 즉 사물의 심장을 제공한다.

이것을 통해 비극적 신화,

즉 가장 의미가 깊은 실례를 낳는 힘이 음악에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음악이 낳는 신화는 다름 아닌 비극적 신화인 것이고

음악의 능력은 디오니소스적 인식에 관해 비유형식으로 이야기하는 신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론적 음악
아티카의 새로운 음악은 내적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개념에 의해 매개된 모방 형식으로

현상을 불충분하게 재현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음악은 현상의 초라한 모사로 바뀌어

그 신화 창조의 힘을 완전히 빼앗기게 되고 이 새로운 디튀람부스로 말미암아 전투라든지

해상의 폭풍 같은 모조품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음악의 정령이 비극으로부터 도망친 지금에 있어서 비극은 죽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비극적 세계관이 밀어닥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정신에 의해서 도처에서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이 정신은 노쇠한 비생산적인 생존욕으로서

<그리스적 명랑성> 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낙천주의의 승리

의지는 사물 위에 환영을 펴고, 이 환영의 힘을 빌어 그 피조물을 삶에 꼭 얽어 매어 피조물을

좋든 싫든 살게끔 계속 강요하며, 이론적인 태내에 잠자고 있던 재난이 점차로 근대인을

불안 속으로 몰아 넣기 시작했고, 그는 마음의 안정을 잃고 여태껏 쌓아 두었던 경험 속에서

위험을 피하기 위한 수단을 찾고 있다.
사물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참된 본질 대신에 단순한 현상을 대치시키고,

이것에 의하여 사물의 본질인 실제상의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런 인식과 더불어

비극적 문화라고 부르는 하나의 문화가 유도되는 것이다.
비극적 문화의 비극적인 인간은 진지함과 공포를 견뎌 나가기 위한 자기 훈련을 함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예술을, 즉 비극을 자신에게 맞는 헬레네 적인 것으로서 열망하고

그것을 자신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론적 인간은 자기 말로에 대한 공포와 욕구 불만으로 이미 생존의 형태에 몸을 맡길

용기마저 잃고 불안하게 우왕좌왕 하며, 이미 완전한 모습으로 사물 속에 잠긴 모든 자연의

잔학상을 외면하지 않고 사물의 전모를 포착하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낙관주의적 고찰은 이론적인 인간을 그처럼 허약하게 만들었다.


여느 문화이던지 극과 극은 존재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영원히 망할 것 같지 않던 그리스의 비극 예술이 몰락하면서

그 자리를 메울 무언가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유리피데스의 희극이었다.
이전 시대에 전부였던 무언가가 몰락하면 새로운 시대에는 전연 다른 모습으로

완전한 새로운 것이 등장 한다고 들 생각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과거가 있었기에 현재는 존재하는 것이고 그 현재의 다음이 미래이기 때문이다.
모습은 다르지만 유리피데스의 희극에도 그리스의 비극의 다른 모습이

분명 존재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무대에 선 배우의 그 형태가 조금 바뀌기는 했겠지만..

백이면 백 다 만족하는 극을 만들기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가능 하려면 아마도 백 개의 극이 필요하지 않을까?

다만 비슷한 성향들이 모이고 모여서 각자의 대립 양상을 보일 것인데,

유리피데스의 극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하지만 창조자는 관객에게 이끌려 다녀서는 안된다.
다행히도 유리피데스는 그러한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누군가를 찾기를 바랐고, 결국 찾아내고 말았다.

당시엔 예술가의 허영과 자만, 독단의 모습으로 보였을 지 모르나, 

난 그의 독단적인 모습에 마음이 끌렸다.

적어도 남들이 생각 하지 못하는 많은 것을 보여줘야 하는 예술가라면

그의 생 내내 지독하게 따라 붙을 고독 쯤은 무시할 수 있고

그것을 초월해 즐길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소크라테스, 그는 유리피데스와는 조금 다르다.

쉽게 말하면 베일에 싸여 사는 인물 같다고나 할까?

자신의 죽음 앞에서 그렇게나 편안하고 담담할 수 있는 사람.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선 그를 신과 같이 표현 했다.
하늘의 계시 같은 것을 오로지 혼자만 듣는 대단하고 신비한 사람..
문화는 반복된다.

결국 유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의 이론적인 예술은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다. 

그들의 이론과 생각, 그리고 극들이 나쁘거나 부족해서라고 여기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길 바란다.

그것은 의지가 아닌 본연에서 빚어지는 모습이 아닐까~

새로운 음악, 새로운 공연, 새로운 사람..언제나 새로운 것에만 매달려 정작 중요한

자신의 의견은 부재 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과거는 참으로 극단스레 흘러 다녔다.

비극이 성행할 때는 비극만, 희극이 유행할 때에는 희극만.

그러니 늘 싸움이 벌어지고 희극이 비극을 이겨서 비극을 저 아래로 몰아 내면

다시 비극은 힘을 비축해 희극을 밀어내고..
역사도 문화도 비슷한 모습으로 흘러오다가 결국엔 합일점을 찾고 만다.
비극 반, 희극 반.
어차피 인간에게 있는 양면성이 반쪽으로는 만족을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양면성이라는 얄미운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엇에건 참견을 한다.
어째서 과거의 사람들은 양면성을 모른 체 하고 한 면만을 중시하며 살 수 있었을까?
우리는 역사책만 봐도 순순히 알 수가 있다.
근대, 현대로 넘어올수록 각각 존재하던 것이 조금씩 공존하기 시작하고

이제는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비극이 좋으면 비극을 보고, 희극이 좋으면 희극만 선택해 보면 되는

공평한 세상에 우린 산다.
무엇이 어찌 되었건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건 해결에 대한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의식을 하는 방식, 해결을 해 나가는 모양,

해결 과정에서 얻은 상처를 다독이는 방법이 모두들 다르다.


낙관주의가 승리 했다’ 라는 말은 사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차피 과학이던 예술이던 개개의 심적 만족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겼을 때,

그것은 낙관주의의 승리 라기 보다는 빚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한 해결에 있어서

진정한 자아의 고찰 후에 만들어지는 나름의 해결책이 개인의 진정한 미래라고 말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 아야미
전직 여배우, 오디오 극장의 사무원이자 사서이자 매표원,
얼굴에 얽은 자국이 있는 여자,
어쩌면 시인 여자를 죽이고 오디오 극장의 직원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여자.

 

★ 늙은 부부 중 아내
얼굴에 얽은 자국이 있는 여자,
치마 아래서 살짝 무른 과일과 담배와 젖은 빨래와 생선 포장지 냄새가 나는 여자,

시인 여자의 엄마일 수도 있는 여자.

 

★ 극장장
아야미가 일하는 극장의 극장장,
아야미와 때때로 진정 무거운 어둠이 있는 보이지 않는 식당에 간다.

 

★ 프리랜서 여니
'그럼요, 당신 말을 듣겠어요. 그리고 내 말도 들어주세요.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전화를 했잖아요, 아닌가요?
그럼요,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장소를 발견할 거예요, 항상 그렇듯이.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에요. 지금은 여니가 부재중이랍니다.
나중에, 여니가 돌아오면 여니는 당신의 동굴이 될 거예요.
동시에 존재하는 세 개의 동굴......'


이라는 자동응답을 등록해 놓고 때때로 부하와 통화를 해 주는 여자.

 

★ 시인 여자
부하의 설명에 의하면~
독일어 교습을 받는 여자,
부하가 동경하고 늘 살피는 여자,
오디오 극장에서 일하는 여자.

 

★ 부하
시를 좋아하지 않고 읽지도 쓰지도 않지만
시인 여자 때문에 시인을 동경하고 시인이 되고 싶어하는 남자.

 

★ 마리아
부하가 여행간 칠레에서 단 한번 만났는데 돈을 부쳐 달라고 편지로 연락을 해온 여자.

 

★ 김철썩
알려지지 않은 늙은 시인,
학교를 다니던 중에도 여러 직업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집의 아들, 
야간 버스를 운전하는 일을 했던 사람이자 극장장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남자.

 

★ 작가 w
아야미의 집에 묵게 되는 작가,
그녀에게 지금까지의 저자의 작품을 조금 설명해 주고 있지만
아주 친절하게까지는 아니다.
이것이 배수아의 매력이 아닐까~

작품 속 내용이 모두 동그랗게 연결돼 있다.
시인 여자와 아야미, 부하, 극장장, 늙은 부부, 김철썩.

작가 w는 시인 여자와 아야미를 도플갱어라고 표현하지만,
자신의 집 지붕에서 시체로 발견된 시인 여자를 죽인 사람은 아야미,
독일어 수업을 받았던 아야미는 그녀를 죽이고 그녀 행세를 하면서 살지만
시인 여자를 관찰하는 게 생의 낙이었던 부하는 그녀가 그녀가 아님을 알고
극장에 찾아가 죽여버리겠다고 난동을 부린 것이 아니었을까?
아내인 시인 여자를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는 극장장을 죽인 것도 아야미.

물론 내 생각이긴 하지만.
ㅎㅎ

다시 읽어봐야겠다.

 

★ 여니가 말하는 동굴

 

1. 첫번째 동굴은 우리를 끌어당기는 은밀한 공간인데, 그것은 우리가 그곳에서
나왔기 때문이에요. 동굴 속 비밀의 샘 밑에서는 따뜻한 양귀비 꿀이 솟아난답니다.
향기롭고 달콤해요. 샘은 우리의 시작이며 종착지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개미가 개미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요.

 

2. 두번째 동굴은 환영의 동굴이어서, 우리를 아주 먼 땅으로 데리고 가지요.
우리는 술 항아리를 손에 들고 메마른 스텝 황야를 걷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항아리 입구에서 출렁거리는 우윳빛 액체가
우리의 발등으로 떨어지지요. 하얀 액체에서는 꽃 이파리를 발효한 술 냄새가 나요.
우리의 혀는 불타요. 그래서 항아리를 들어 그 속의 흰 술을 마셔보지만,
그래도 갈증은 영영 사라지지 않아요. 멀리서 단 한 번의 처절한 신음 소리와 함께
화산이 폭발해요. 분출된 흰 재와 마그마가 허공으로 터져 나옵니다.
그건 자연과 사물들이 동시에 죽는 순간이에요. 의식의 정지, 그리고 암전.
동공과 혈류가 멈추어버리는 순간. 모든 색채와 소리가 사라지고 모든 정체성과
밀도가 소멸하는 순간.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항아리 속의 흰 술 한 방울을 마시기를 소망해요.
화산재가 하늘을 온통 가려버리는 그때, 신과 인간과 공룡이 동시에 죽음을 맞는 그 순간에
말이에요.

 

3. 세 번째 동굴을 컬트의 장소랍니다. 어둡고도 엄격한 비밀의 장소지요.
비밀 가운데서도 가장 은밀하고도 두려우며, 금지된 곳이에요.
황소에게 욕정을 품은 여자들이나 딸과 동침한 남자들이 간다고 알려진 곳이죠.
하지만 또 다른 소문에 의하면, 금지의 봉인이란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환각에
불과하다고 해요. 종교보다 더욱 원초적인 판타지가 바로 터부라는 거예요.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운 경외심은 더 이상 본질로서의 두려움이 아닌 쾌락을
배가시키기 위한 역설의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라는 말도 있지요.
우리의 잠은 이제 세번째 동굴로 흘러들어가요.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우리의 몸을 동굴의 기운에게 맡긴 채 나아가요.
우리는 넋을 잃은 상태예요. 사로잡혔으니까요.
무엇인가가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강하에 빨아들여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비밀과 한 몸이 되고 있어요.
그건 숨 막히는 불안이고 가슴이 조여드는 공포이기도 해요.
하지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매혹이고 열락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홀린 듯이 금기를 향해 다가가는 것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요.

"당신도 이제 알고 있겠죠, 세 개의 동굴은 나에게 속한 육신의 세 개의 구멍에
해당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곧 당신에게 속한 장소이기도 하답니다.
왜냐하면 그 장소는 당신에 의해서 비로소 성격을 부여받았기 때문이에요.
육체가 교통하는 요소들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떤 다른 통로를 통해서도 지금 내가
당신을 아는 것처럼, 그리고 당신이 나를 아는 것처럼 존재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열락의 거울상이 없다면, 우리의 원형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세 개의 동굴은 세 개의 거울이에요.
사랑은 알려짖 않은 동굴을 찾아 헤매는 행위지요. 지상 어딘가에 있는, 깊고, 어둡고,
울림이 있으며, 증폭하고, 두렵고, 홀리게 만드는, 그리고 온전하게 사적인,
나를 위한 비밀, 단 하나의 배(ship), 단 하나의 숨겨진 장소......"

 

★ 유일한 하나의 오탈자가 발견되다

82쪽 8줄 : 건너는 -> 건네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옮김 / 시공사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고전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그때에 이 작품이 나왔더라' 에 초점을 맞추는 게

대작을 맞이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또한,

올해로 돈키호테가 태어난지 404년이 됐으니

당시와 현재를 함께 비교해 봐야 하는 것이 바로 고전을 대하는 이치.

 

원작을 읽어보지 않고 돈키호테를 말한다는 것은

감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임을 뼈저리게 느꼈고,

과연 우리의 눈과 귀로 전해 보고 들은 그 모든 돈키호테의 저자나 연출가들이

과연 그것을 제대로 알고 각색하고 표현해 냈을지 의심이 갈 만큼

이것은 아무나 감히 아무렇게나 건드려서는 안 될 엄청난 작품이었다.

 

너무 두터워서 편하지 않은 장소에서 보고 난 후엔 꼭 팔목을 주물러 드려야 했지만,

아주 오랜만에 사람들 시선 의식 안 하고 지하철에서 무식하게 두꺼운 책을 보다 낄낄대는

여자아이로 돌아가게 해주었으니 이 책은 또 다른 면으로도 고맙구나.

 

도대체가 책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죄다 어디서 그런 화술들을 또는 글쓰기를 배웠는지

편력기사의 여행에서 우연만으로 만난 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엄청난 이야깃거리를

(그것도 전혀 예상할 수 없기에 다음 방향 또한 점지해 주지 않는 그런 이야기)

줄줄이 쏟아낸다.

 

그 내용 중 마음에 조금 들었던 부분은

452쪽부터 시작하는 안셀모에게 친구 아내의 정조를 시험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과

531쪽부터 문과 무에 대해 연설하는 돈키호테의 그 부분과

666쪽 기사도 소설과 연극에 관한 교회법 연구원의 말은

작가 세르반테스가 주둥이만 살아 떠들어대는 그런 치는 아니란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 줘서

어쩐지 언어로써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이상한 안심이 되기도 했다.

 

맞춤법이 열 군데 이상 틀린 책이었지만,

이 정도의 작품이라면 교정을 제대로 안 본 것쯤이야 거뜬히

용서할 수 있겠다, 흠^^

 

참, 보면서 자꾸만 예전에 봤던 무서운 영화의 전야제가 떠올랐다.

패러디 영화는 그 작품에 쓰인 모든 영화를 본 후에야 진정한 재미 또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무식한 생각에 무서운 영화에 나오는 스물한 편의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본 영화를 대했던 기억.

 

왜 이런 생각이 들었냐,

세르반테스는 작품 속에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작가와 그들의 배설물을 열거했고

그걸 보기 전엔 돈키호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읽고도 읽지 않은 멍청이 독자가 될까봐

걱정이 됐던 내 알 수 없는 병 때문이었을 것으로 모든 생각은 거기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사랑일까 - 알랭 드 보통 / 은행나무 / 12500원

 

정서적으로 그녀가 더 우월하고 성숙하다 여기는 남자와

그의 행동에 대한 원인을 '상처'나 '바쁨'에게 돌리는 여자의 사랑,

아니 연애 이야기.

이론과 현실을 적절히 조화시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데 이론,

예를 들면 데카르트, 파블로프, 헤겔, 하이데거, 후설 등의 이론을

커플의 행동과 심리에 들이대서 관계를 풀어나가는 형식이라 할 수 있겠다.

다음과 같은 대목은

국적을 불문하고 불알을 단 것 들에겐 모두 들어맞는 얘기가 될 수 있겠다.

 

남자에게는 애인 이전에 어머니가 있다.

그런 면에서 모든 남자는 동등한<사실은 학대하는> 관계 이전에

전능한 어머니에 맞서 무력한 아이 노릇을 경험한다.

에릭의 어머니는 힘이 넘치는 여자로, 어릴 때는 좀 무서웠다.

그녀는 엄청난 기운으로 아들 넷을 키웠다.

몹시 현실적이었고, 손수 바짓단을 늘리고 가벼운 치료도 했으며, 잼을 만들고 케이크를 구웠다.

또 숨 막히게 하는 구석이 있었고 걱정이 많아서, 아들들의 목도리나 스웨터가 넉넉한지,

약은 먹었는지, 숙제는 했는지 늘 노심초사했다.

어머니 때문에 에릭은 간절히 독립을 원했다.

소매에 단추를 단 셔츠에 정장을 입고, 택시 기사에게 팁을 주고,

사업상 명함을 갖고 다니는 지금도, 여자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는

학교 앞에서 뽀뽀를 하고 외투를 여며주려는 어머니를 밀어내는 남자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전 작품에서보다 그림과 표를 통한 반복설명이 많아졌고,

그 덕에 내용이 훨씬 흥미있게 전달됐다.

 

324쪽에 보면 언뜻 보면 그저 성의 없게 어떤 말에 대한 대답을

화살표로 대충 그려놓은 듯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같은 사람이 다른 상대와 대화하는 상태를

나무에서 뻗어나간 가지에 비유해 설명한 것이다.

호응도와 대답에 따라 대화의 가지가 매우 풍요로워지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하는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더라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묘한 힘과 설득력이 있는 글이다.

 

336쪽에서는 '창작'과 '고통'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고통에서 창작이 나오는 것인지, 창작을 하려는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논쟁거리로도 충분한 소재가 되는 부분이다.

언제 심심한 자리가 생기면 한 번 해봐도 좋을 듯.ㅋㅋ

 

혼자서 열심히 오해하고 노력하다가 나가 떨어지는 앨리스.

그걸 몰랐던 에릭의 자만이 죽어 없어져도 앨리스는 그의 옆에 있을 수 없는 그것,

바로 사랑의 유효기간이라는 잔인성이 아닐까 싶다.

 

헤어지자고 말한 앨리스,

냉소적인 사람은 너무 많이 바라고 너무 오래 기다린 사람을 뜻했다.

그의 사랑고백은 앞으로 혼자 밤을 보내야 하고 또 신경질을 부릴 대상이 없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의 반사적인 반응이 아닐까?

라고 남자의 연애를 작가는 이렇게 결론짓고 있었다.

어쩐지 남자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분위기.

마음에 안 든다. 

둘이 한 사랑에 어째서 한쪽만 죄인이 돼야 하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카노네 고만물상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오유리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나카노네 고만물상 - 가와카미 히로미 / 은행나무 / 9800원

 

읽을거리가 자신의 순서도 모른채 대기하고 있음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여분의 책을 준비하지 못해 어찌어찌 타인의 책장에서 빌려 꺼내 들고오게 되는

<나카노네 고만물상>같은 작품은 적잖은 즐거움 중 하나다.

 

또한, 책 주인이 이 책을 보던 당시가 나를 실컷 미워하던 그때임을

나와 이름이 같은 번역가의 이름에 그어진 하얀 화이트를 통해

알게 되는 번외의 즐거움 또한 그것보다 작지는 않다.

 

표지 사진이 필요해서 아이를 돌보러 간 그녀의 집 책장에서 꺼낸 작품,

다행히도 이 리뷰를 쓸 때의 표지 그대로였고,

책주인은 자신이 했던 위와 같은 행동을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일은 어쩌면 의미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위 사진을 자세히 보면 옮긴이의 이름이 하얀색 화이트로 지워져 있다.ㅋㅋ

 

오랜만에 따뜻한 책을 읽었다.

사람 냄새, 사랑 냄새, 거기다 가볍지 않은 고뇌들의 냄새까지.

특히나 부모가 자식에게나 갖는 맹목 사랑을 지니게 해준

배수아의 신작을 무겁지만 가벼이 읽고나서 잡은,

빨리 읽히지만 좋은 이 작품,

잡은 지 하루가 채 가기 전에 마지막 장을 넘겼고,

지독한 오자로 순간순간 한숨을 자아내야 했지만,

참말 재밌고 마음에 와닿게 잘 읽었다.

 

내 주변에도 반드시 있을 나카노, 마사요, 다케오, 히토미 등의 인물들 삶을 훔쳐 보며

밀려드는 생각과 추억에 난 지금 언제 맛봤던지 기억도 안 나는 가슴벅참을 느끼고 있다.

물론 천장을 천정이라 쓰고,

언제 예요를 쓰고 에요를 써야 하는지 결코 알지 못할 듯한 편집에

조금은 열이 받았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