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대우고전총서 21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 아카넷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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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다
 그리스 비극의 몰락 후 아티카 비극을 선구자로서,

그리고 스승으로서 존경하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예술이 꽃피우게 되었다.

그 신종 예술은 아티카의 새 희극으로 비극의 타락 형태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새 희극 작가의 대표로는 유리피데스를 꼽을 수 있다.

 

 ~희극 작가 유리피데스
그동안의 관객과 달리 유리피데스의 관객들은 스스로가 말하는 법을 배웠다.

모든 극의 준비는 줄거리를 위함이 아니라 관객들의 정열을 위한 준비였다.

다시 말해 새로운 희극의 길을 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관객이란 말뿐이고 질도 여러 가지이며 수에 있어서도 영속적인 양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는 주위를 둘러 보면서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는가를 살폈다.

그러던 중 그는 대중과 인류의 인사들이 그에게 불신의 미소를 던지는 가운데

또 한 사람의 관객을 발견하였다.

이 사나이와 손잡음으로써 비로소 그는 지금까지 고군분투하고 있던 상황에서 벗어나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예술 작품에 대항해서 무모한 싸움을 시작하는 용기를 갖게 되고

새로운 예술 창조의 선구자를 꿈꾸었다.


~새로운 마신 소크라테스와의 결탁
  비극 <바커스의 시녀들>은 유리피데스가 말한 비극의 해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새로운 마신에 의해서 실행되었다.

이제 그리스 비극은 멸망하고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소크라테스 적인 것의

새로운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옛 비극을 이해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존중하지도 않았던 제 2의 관객이었고

전연 다른 새로운 오르페우스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그이지만 아리스토 파네스의 희극 속에서

유리피데스와 그는 분개와 경멸로 말해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작품 속에서

소피스트의 제 1인자로서,모든 소피스트적 노력의 귀감이자 정수로서 취급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아연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비극 예술의 증오자였던 소크라테스, 그는 보통 때는 비극 관람을 삼가지만

유독 유리피데스의 신작이 상영될 때는 관객 속에 얼굴을 보였다고 한다.
소크라테스 주의는 (다만 본능에서)란 말로 기성 도덕과 예술을 단죄한다.

그는 오직 혼자서 이 세계와는 전연 질이 다른 문화,예술,도덕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본질을 여는 하나의 열쇠는 <소크라테스의 데모니온>이라고 불리는

이상한 현상이다.

일반적 인간들의 경우 본능은 바로 창조적, 긍적적 힘이며,

의식은 비판적이고 경고적 역할을 갖는데 반해 그의 경우는 그 반대라는 것이다.

소민족 그리스가 추악한 악덕을 특색으로 여러 민족 사이에 천재가 대중적 존엄과 특별대우를

요구했던 것처럼 소크라테스 역시 전례가 없던 존재 형식, 즉 <이론적 인간>의 전형을 그 속에

인정하는 것이 필요했다. 예술은 본능으로써 과학에 부속되어 있으며 과학을 점점 더 그 한계로

이끄는 것이지만, 이 한계에서 과학은 예술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예술은 이러한 메커니즘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과학의 본능에 이끌려 살 뿐만 아니라 그 본능에 의해 죽을 수도 있었던 최초의

인물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죽음으로 가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지식과 논거에 의해서

죽음의 공포를 면한 인간의 모습으로서,

과학의 입구에 걸려있어 누구에게나 과학의 사명을 상기 시킨다.
 

○ 과학과 예술
과학의 비교 사제인 소크라테스 이후, 철학의 유파는 밀려오는 파도처럼 차례차례로 교대해 왔다.

교양 세계의 넓은 범위에 지금까지 예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지식욕이 보급된 결과,

과학은 높이 치켜 올려져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과학이 본래의 임무가 되었으며,

그리고 과학은 그 무대로부터 다시는 추방되는 일이 없었다.
또한 이 보편화된 지식욕 덕분에 사상의 공통된 그물이 전 지구상에 퍼졌을 뿐만 아니라

전 태양계에 걸친 법칙 까지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실제 이 모든 것을 현대의 놀랄 만한 높은 지식의 피라밋과 함께 생각하여 볼 때,

소크라테스 속에 이른바 세계사의 한 전환점인 소용돌이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적 인식의 기쁨을 체험한 사람, 그리고 이 인식이 차츰 윤곽을 넓히면서 모든 현상계를 

포괄하려고 하는 것을 감지하는 사람은 단순히

그 인식의 욕망 이외의 것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이와 같은 자극을 가진 사람에게는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야 말로 전연 새로운

형식의 그리스적 경쾌함과 생존의 기쁨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강력한 망상의 자극을 받아서 제지하기 어려운 과학의 한계에까지 급히 가면,

거기에서 논리의 본질 속에 숨어 있는 과학의 낙천주의는 좌절된다.
논리가 그 한계점에서 공전을 되풀이 하고,

마침내 자기의 꼬리를 무는 것을 여기서 보고 몸서리칠 때 새로운 형식의 인식,

비극적 인식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 무서움을 참아내기 위해서도 보호와 치료제로서 예술이 필요한 것이다.


○ 낙천의식 vs 비극의식, 그리고 음악
현대 세계 최고 영역에서의 낙천주의적 인식에

선자와 비극적 예술을 추구하는 진영의 싸움에 대해 말해보자.

여기서 비극적 진영이란

그 조상 소크라테스를 선두로 하는 가장 깊은 본질에서의 낙천주의적 과학을 의미한다.

또한 앞으로의 내 모든 원리는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를 기점으로 말해짐을 미리 밝혀둔다.

 

~음악과 현상, 개념과의 관계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분리되어 있는 그 자체,

두 개의 예술의 힘이 병행해서 작용하는 경우에 음악이 발생시키는 미적 효과에 대해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우리는 현상(또는 자연)과 음악 세계를 동일한 사물의 다른 두 가지

표현이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 사물은 다른 두 세계의 유사성을 매개하는 유일한 것이며,

두 세계의 유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 자체의 실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곧 음악은 세계의 표현으로 보여질 때 최고도로 보편적인 하나의 언어이며,

이것은 개념의 보편성에 대해서마저 거의 개념이 개개의 사물에 대해서와 같은 관계와 있다. 

그것은 어떤 장면, 행동, 사건, 환경에 대해서 적합한 음악이 연주된다면 이 음악에 의해서

이것들의 신비스러운 의미를 해명하여 주는 것처럼 생각되어,

음악은 이것들의 가장 옳고 명확한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곧 음악은 모든 형식에 선행하는 가장 내면적인 핵심, 즉 사물의 심장을 제공한다.

이것을 통해 비극적 신화,

즉 가장 의미가 깊은 실례를 낳는 힘이 음악에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음악이 낳는 신화는 다름 아닌 비극적 신화인 것이고

음악의 능력은 디오니소스적 인식에 관해 비유형식으로 이야기하는 신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론적 음악
아티카의 새로운 음악은 내적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개념에 의해 매개된 모방 형식으로

현상을 불충분하게 재현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음악은 현상의 초라한 모사로 바뀌어

그 신화 창조의 힘을 완전히 빼앗기게 되고 이 새로운 디튀람부스로 말미암아 전투라든지

해상의 폭풍 같은 모조품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음악의 정령이 비극으로부터 도망친 지금에 있어서 비극은 죽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비극적 세계관이 밀어닥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정신에 의해서 도처에서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이 정신은 노쇠한 비생산적인 생존욕으로서

<그리스적 명랑성> 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낙천주의의 승리

의지는 사물 위에 환영을 펴고, 이 환영의 힘을 빌어 그 피조물을 삶에 꼭 얽어 매어 피조물을

좋든 싫든 살게끔 계속 강요하며, 이론적인 태내에 잠자고 있던 재난이 점차로 근대인을

불안 속으로 몰아 넣기 시작했고, 그는 마음의 안정을 잃고 여태껏 쌓아 두었던 경험 속에서

위험을 피하기 위한 수단을 찾고 있다.
사물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참된 본질 대신에 단순한 현상을 대치시키고,

이것에 의하여 사물의 본질인 실제상의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런 인식과 더불어

비극적 문화라고 부르는 하나의 문화가 유도되는 것이다.
비극적 문화의 비극적인 인간은 진지함과 공포를 견뎌 나가기 위한 자기 훈련을 함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예술을, 즉 비극을 자신에게 맞는 헬레네 적인 것으로서 열망하고

그것을 자신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론적 인간은 자기 말로에 대한 공포와 욕구 불만으로 이미 생존의 형태에 몸을 맡길

용기마저 잃고 불안하게 우왕좌왕 하며, 이미 완전한 모습으로 사물 속에 잠긴 모든 자연의

잔학상을 외면하지 않고 사물의 전모를 포착하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낙관주의적 고찰은 이론적인 인간을 그처럼 허약하게 만들었다.


여느 문화이던지 극과 극은 존재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영원히 망할 것 같지 않던 그리스의 비극 예술이 몰락하면서

그 자리를 메울 무언가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유리피데스의 희극이었다.
이전 시대에 전부였던 무언가가 몰락하면 새로운 시대에는 전연 다른 모습으로

완전한 새로운 것이 등장 한다고 들 생각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과거가 있었기에 현재는 존재하는 것이고 그 현재의 다음이 미래이기 때문이다.
모습은 다르지만 유리피데스의 희극에도 그리스의 비극의 다른 모습이

분명 존재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무대에 선 배우의 그 형태가 조금 바뀌기는 했겠지만..

백이면 백 다 만족하는 극을 만들기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가능 하려면 아마도 백 개의 극이 필요하지 않을까?

다만 비슷한 성향들이 모이고 모여서 각자의 대립 양상을 보일 것인데,

유리피데스의 극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하지만 창조자는 관객에게 이끌려 다녀서는 안된다.
다행히도 유리피데스는 그러한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누군가를 찾기를 바랐고, 결국 찾아내고 말았다.

당시엔 예술가의 허영과 자만, 독단의 모습으로 보였을 지 모르나, 

난 그의 독단적인 모습에 마음이 끌렸다.

적어도 남들이 생각 하지 못하는 많은 것을 보여줘야 하는 예술가라면

그의 생 내내 지독하게 따라 붙을 고독 쯤은 무시할 수 있고

그것을 초월해 즐길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소크라테스, 그는 유리피데스와는 조금 다르다.

쉽게 말하면 베일에 싸여 사는 인물 같다고나 할까?

자신의 죽음 앞에서 그렇게나 편안하고 담담할 수 있는 사람.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선 그를 신과 같이 표현 했다.
하늘의 계시 같은 것을 오로지 혼자만 듣는 대단하고 신비한 사람..
문화는 반복된다.

결국 유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의 이론적인 예술은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다. 

그들의 이론과 생각, 그리고 극들이 나쁘거나 부족해서라고 여기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길 바란다.

그것은 의지가 아닌 본연에서 빚어지는 모습이 아닐까~

새로운 음악, 새로운 공연, 새로운 사람..언제나 새로운 것에만 매달려 정작 중요한

자신의 의견은 부재 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과거는 참으로 극단스레 흘러 다녔다.

비극이 성행할 때는 비극만, 희극이 유행할 때에는 희극만.

그러니 늘 싸움이 벌어지고 희극이 비극을 이겨서 비극을 저 아래로 몰아 내면

다시 비극은 힘을 비축해 희극을 밀어내고..
역사도 문화도 비슷한 모습으로 흘러오다가 결국엔 합일점을 찾고 만다.
비극 반, 희극 반.
어차피 인간에게 있는 양면성이 반쪽으로는 만족을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양면성이라는 얄미운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엇에건 참견을 한다.
어째서 과거의 사람들은 양면성을 모른 체 하고 한 면만을 중시하며 살 수 있었을까?
우리는 역사책만 봐도 순순히 알 수가 있다.
근대, 현대로 넘어올수록 각각 존재하던 것이 조금씩 공존하기 시작하고

이제는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비극이 좋으면 비극을 보고, 희극이 좋으면 희극만 선택해 보면 되는

공평한 세상에 우린 산다.
무엇이 어찌 되었건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건 해결에 대한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의식을 하는 방식, 해결을 해 나가는 모양,

해결 과정에서 얻은 상처를 다독이는 방법이 모두들 다르다.


낙관주의가 승리 했다’ 라는 말은 사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차피 과학이던 예술이던 개개의 심적 만족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겼을 때,

그것은 낙관주의의 승리 라기 보다는 빚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한 해결에 있어서

진정한 자아의 고찰 후에 만들어지는 나름의 해결책이 개인의 진정한 미래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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