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와 공포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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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를 파헤쳐 보고 싶어도 알기 힘들고 표현하고 표현해도 알 수 없는 그 섹스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많이들 쓰고 말하고 화면으로 만들어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뭔가를 만들어낸다.
나 역시 관심도 많고 언제나 신비하기만 한 섹스라는 소재로 지금까지는 없던 새로운 무엇을 한 편 창조해내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언제나 '내가 어떻게 감히'라는 생각과 함께 펜을 내려놓고 만다. 이 책을 쓴 그 역시 나와 비슷한 마음을 지니고 살았던 듯 싶은 냄새가 펄펄 나고 있다.
 

로마의 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새끼 물고기들이라 부르는 가장 나이 어린 애들에게 자신이 수영하는 동안 줄곧 허벅지 사이로 노닐면서 자신을 혀로 핥거나 입으로 물어서 흥분시키도록 훈련했고, 아직 젖을 안 뗀 젖먹이들에게는 젖 대신 자기 성기를 빨도록 해서 정액을 사정하기도 했단다.

그리스에서는 질과 괄약근이 서로 차이가 없는 '구멍'으로 보았고, 남색은 사회적 통과의례적인 비역을 통해 성인의 정액은 어린애에게 남성성을 전달해 준다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 로마는 규정에 따른 공포가 성관계를 지배했다.
가령 귀족 남성의 수동적 사랑(괄약근을 대주는 행위)은 기혼 여성의 감상적 사랑이나 간통만큼 중대한 범죄행위라거나, 남성의 능동적 동성애(남성의 괄약근에 성기를 넣는 행위)나 기혼여성이 애인에게 손으로 해주는 마스터베이션은 무죄라는 식의.

작가는 이렇게 로마와 그리스의 경우를 말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와 로마의 성문화는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열변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책에서 너무 재밌는 묘비명을 소개해서 여기 옮겨두려 한다.
<마르티알리스의 묘비명>
내가 원하는 여자는 헤픈 여자, 내게 몸을 허락하기에 앞서 내 젊은 노예에게 먼저 몸을 맡기고, 혼자서 동시에 세 명을 상대할 수 있는 그런 여성이다. 큰 소리로 시끄럽게 말하는 여자라면 부르디갈라의 바보의 좆이나 먹으러 가라.
이와 같은 묘비명을 남긴 그는 사는 동안 내내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하하, 그 묘비명 한 번 멋지다.

로마 시대의 노예는 매우 비참했다. 주인이 그에게 비간을 하거나
오럴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던 만큼.
당시 기혼자나 과부는 강간을 당하면 사형에 처해졌고, 강간한 자는 그 자리에서 잡히면 형벌 정도에 그쳤다. 미혼자의 강간은 상관 없는 것이 강간을 불륜에 의해 피가 더렵혀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1장이 역사적 사실과 함께 전개되고 2장에서는 로마의 회화를 말하며 파라시오스 얘기를 하고 있다. 그는 당시 엄청나게 유명했던 화가로 포르노그라피의 창시자다. 작가는 조각술에서 미의 이상은 윤리에 있었다고 말하면서 아타락시아(정신의 평정)와 무감각을 구분하는 게 어렵다고 하는데 그것은 마치 너무 큰 이해심과 무관심을 구분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2장에서 로마 회화의 역사와 화가를 소개하고 그의 생각이나 표현방법을 들어가며 교묘하게 풍경화로 마무리를 지으려다 Suavitas(달콤함), 그것은 죽음의 순간이다 라는 말과 함께 성적 은둔을 꺼내 테두리(파라시오스가 창안했다는), 곧 아우라까지 가고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옷' 아담의 '의복' 리비도로 짠 마술옷감,후광이라는 주제이다 라면서...

3장의 제목은 대놓고 파스키누스, 즉 음경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데 외설(음담패설)은 로마 사회의 특성이고, 그것은 보편적 질투에 맞서 거대한 파스키누스를 흔들어대는 의식을 지닌 축제였다고 한다. 저자는 프랑스 역사는 조롱으로 시작되었고, 조롱은 그리스도교 역사의 근본을 이룬다고 말하고, 드디어 책의 제목을 등장시킨다. 섹스는 공포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남성에 한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육체가 죽음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남성성은 동물적 쾌락 속에서 침몰한다. 그 이유는 남성의 가장 내밀한 자아가 결코 머릿속이나 얼굴 모습에 있지 않고, 육체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 남자의 손이 가는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와 같은 내용을 보면 그것은 더욱 명확해진다.

섹스 자체를 있는 그대로 조금도 야하지 않게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게걸스럽게 자신들의 육체를 박아 넣고, 자신들의 침을 뒤섞는다. 그들의 입은 이빨로 짓누른 상대방의 입술 위에서 공기를 들이마실 뿐이다. 부질없는 짓이다. 상대방의 육체는 조금도 얻어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육체 속에 자신의 육체를 송두리째 끼워넣지도 못한다. 타인의 육체 안으로 완전히 옮겨가지도 못한다.
그들은 바로 그 점을 자신들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것으로 이따금 믿을 듯하며, 그래서 그들을 이어주는 주변의 끈을 욕심껏 다시 조인다. 마침내 신경이 욕망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만큼 긴장이 고조에 달할 때, 즉 욕망이 분출할 때 짧은 휴지(休止)가 생긴다.
짧은 순간 열정이 잠시 진정된다. 그러고 나면 똑같은 광기, 똑같은 광란이 다시 찾아온다. 또다시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추구한다. 길을 잃고 눈이 먼 그들은 보이지 않는 상처에 시달리며 서로를 탕진한다. 

'음경'이란 제목으로 시작한 3장은 결국 '의지와 무관하게 우뚝 서는 것, 언제나 장속 밖으로, 보이는 것 밖으로, 솟아나오는 것, 그것은 신이다.' 로 마무리 되고, 남성 이야기를 신나게 마친 작가는 괴물 자매 셋 (스테노, 에우리알레, 메두사)의 이야기로 4장을 시작한다.
예상했던 대로 이번에는 여자 측에서 썼고 욕망이 깃든 그녀들의 시선에는 힙노스와 타나토스보다 더욱 녹아내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한다. 직접 볼 수 없는 시선을 공포와 연관시킨다. 

5장 로마의 에로티시즘 역시 대부분 시선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6장 페트로니우스와 아우소니우스가 쓴 문학작품이 실제의 글로써 소개된다. 페트로니우스의 단편에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데 글쎄 나는 모르겠다.

7장 도무스와 빌라. 집,벽화,성교,여자의 욕망, 아내와의 사랑에 대해 얘기한다. 빌라 얘기를 시작으로 침실로 넘어가더니 기독교가 나타나서는 7장을 마무리지었다.

8장 메데이아는 웬일로 계속 그녀의 이야기만 있다. 아버지와 동생을 죽이고 온갖 희생을 치러 얻은 남편 이아손의 아들 둘을 죽이기 직전의 모습이 그림으로 전해져 오는 그 메데이아. 그녀를 소재로 한 여러가지 경우를 들고 있는데, 그녀의 심리를 여러 측면에서 다루려는 흔적이 크다. 성교에 대한 여러가지 얘기가 있는데 히포크라테스는 최초의 성교에서 암컷을 품는 수컷에게 나타나는 어린애의 모습을 본다. 소(小)세네카는 '인간은 태어났다. 인간은 죽음을 위해 태어났다. 출생은 성교의 결말이다. 태어나는 것은 소멸해 가는 쾌락이다'라 말한다.

9장 파시파에와 아폴레이우스. 어째 사냥과 동물 얘기가 신나게 나온다 싶더니 로마에서 즐겼다는 수간(동물과의 성교) 얘기가 나온다. 로마 하면 네로가 먼저 떠오르는 나, 여기서도 티베리우스, 수에토니우스, 카시우스, 아울렐리우스 빅토르 등이 글로써 전하는 네로의 음란함과 밝힘증을 나열하고 있다. 

10장 황소와 다이버. 성과 관련된 존재의 기원을 아주 모호하게 표현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과거의 그 누군가가 성교를 했기 때문이고, 그것들은 눈으로 볼 수도 확인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런 순간은 조작되기 마련이다.
또한 다이빙하는 모습을 통해 죽음으로 향하는 의미의 생을 얘기한다. 로하임의 말에 따르면, '모든 꿈은 자기 내면으로 빠져들어가 어머니의 질 속으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출생 직후에 거의 지속되는 잠은 자궁 내의 삶을 '연장하는'것이다. 현실은 '잠에서 깨어남'과 마찬가지로 배고픔과 추위, 고통스러운 욕망의 순간일 뿐이다.
노화로 인해 육체는 점차 잠에서 멀어지고, 죽음(꿈이 없는 잠) 속에서 음문과도 분리된다' 고 했다.

11장 로마의 우수에서는, 쾌락과 죽음을 동일시하고, 우수와 우울을 같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정리하자면, 로마인이 느끼던 삶의 권태(1세기)-> 그리스도교인들의 나태(3세기)->우수(5세기)-> 우울(19세기)-> 우울증(20세기) 로, 성의 역사가 공포와 저주로 변질된 데는 로마의 역할이 컸다고! 이와 함께 자신이 이런 글을 몇 년씩이나 바쳐서 쓰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욕망은 공포이다. 무슨 이유로 나는 몇 년을 바쳐가며 이 책을 썼던 것일까? 청교도적인 것은 바로 쾌락이라는 미스터리를 파헤쳐보고 싶어서였다. 쾌락은 쾌락이 보려고 하는 무엇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오르가슴은 욕망이 이제 막 드러내기 시작했을 뿐인 무엇에서 시선을 거두게 한다.' 고.

12장 첫 장면부터 글을 쓰기 전에 몰두해 있는 소녀를 묘사한다.
'글을 쓰는 자는 비역질을 하고 글을 읽는 자는 비역질을 당한다.' 고 말한 로마 황제 셍티미우스의 얘기와 함께 독서와 쾌락에 대해 말하고 있다.

13장 나르키소스 전설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며 시작한다.
나르키소스가 자신을 사랑했고, 그로 인해 벌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리스 신화에도 로마 신화에도 없으며 로마 벽화에 그려진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반영 위로 몸을 굽히고 있지 않다고 한다. 나르키소스를 죽인 것은 분신에 대한 사랑이 아닌 시선이라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문학적 시선이다.
이런 역사 관련 책들을 보면 언제나 느끼는 건데, 대부분의 제목들은 별로 제목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특히 이 책에서의 제목은 내용을 제대로 포함하지 못하는 경우가 반 이상이다. 

14장 술피키우스와 폼페이의 유적에서는 수많은 몰락 과정을 편지나 작품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것을 지켜보며 살아남은 자들의 안도가 나온다.
바쿠스 축제 직전의 순간을 재현한 신비의 빌라를 묘사하고 그 의미 등을 짚어보는 14장, 그와 함께 거대한 음경을 끌고 다니며 누구나 가장 음란한 언어를 사용하는 리베르 축제, 디오니소스 축제에 상연되던 이야기 '비극' 에서 고르기아스는 대담한 시도를 했다는데 언어를 현실 세계 가운데서 자율적 실재를 구축하는 능력으로 고찰했던 최초의 인물이자, 최초의 작가인데, 세상에는 아무런 실재가 없고, 존재하더라도 우리는 인식하지 못할 것이며, 설사 인식하더라도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라고 결론지었단다. 다음은 바쿠스 축제의 내용 중에 하나인데 조금 충격적이다.

'남녀 간에는 분열이 있을 뿐이다. 시민 사회는 잔혹성과 식육제 위에 덮인 얇은 베일에 불과하다. 문명화된 관습과 예술은 잘라낸 발톱일 뿐이어서 그것은 끊임없이 자란다. '날고기를 먹기' 즉 어미가 제 아들을 날로 먹고 아들은 피를 통해 자신을 몰아냈던 여자의 몸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 사회의 토대가 되는 유혈이 낭자한 황홀경은 바로 그런 것이다. 모든 어미는 자식이 음문을 빠져 나오면 그를 죽음에 맡긴다. 바쿠스의 무녀들을 가리키는 mainades라는 그리스 단어는 '미친 여자들'을 의미한다. 그녀들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머리를 휘저으며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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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약속
로맹 가리 지음, 심민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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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에 있는 저 사진은 로맹의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창 밖을 바라보며 고개를 조금 자연스럽게 쳐든 그의 모습. 사진처럼 생에 있어 유머를 잃지 않는 게 신조인 듯했던 작가는 어째서 권총자살을 했을까?

거짓말을 싫어하는 작가의, 어머니를 위한 예쁘고 귀여운 거짓말들이 가득한 책이다. 이렇게 재밌는 거짓말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가 말하는 어머니의 존재에 대한 표현이 끝내준다.

그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사십 줄에 들어서야 나는 겨우 그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토록 어려서, 그토록 일찍, 그토록 사랑받는다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나쁜 버릇을 들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어디에나 다 있는 것인줄 알고,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요구하게 된다, 바라보고 갈망하고 기다린다,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인생은 그 여명기에 결코 지키지 않을 약속을 당신에게 주는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죽는 날까지 찬밥을 먹어야 한다.
그다음부터는 어떤 여자가 당신을 안아서 가슴에 품어준다 해도 조사에 불과할뿐, 우리는 버림 받은 개처럼 언제까지나 어머니의 무덤으로 돌아와 짖어대는 것이다.  이제 다시는, 이제 다시는,
이제 다시는. 사랑스런 팔들이 당신의 목을 누르고, 아무리 달콤한 입술이 사랑의 말을 속삭여도, 당신은 계속 달려야만 한다. 당신은 너무 빨리 샘을 지나쳤고, 그리고 바닥나도록 다 마셔버렸다. 다시 갈증에 사로잡힐 때, 사방으로 몸을 던져보아야 샘물은 없고, 신기루뿐이다. 여명의 첫 빛 속에서 당신은 사랑에 대해 매우 압축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세세한 자료들을 잔뜩 머릿속에 넣고 있다. 그리하여 어디를 가도 비교라는 독을 품고 다니면서, 전에 한 번 받았던 것을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한다.

78쪽부터 81쪽까지.
모든 행동의 원인을 어린시절과 성적인 것에서 찾겠다고 나선 정신분석 학자들에 대한 일침이 매우 따끔하다. 재미있고 지적이고 훌륭한데 어딘가 장정일의 냄새가 난다. 로맹이 먼저니까 그가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되겠지.

그 기발 미묘한 사람들은 전에 내게 이런 설명을 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여자를 밝힌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사실상 속으로는 동성연애를 가졌기 때문이란 것이다. 만일 남성과의 은밀한 육체적 접촉이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면-
이것이 내 경우라고 고백할 것인가?-그것은 그 사람이 아주 조금이나마 그 방면을 애호하기 때문이며, 이런 강철의 논리를 끝까지 따라가자면, 시체를 만지는 것이 몹시 불쾌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잠재의식 속에 시간(시체와 성교하는 일) 욕구증을 갖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그렇게 근사한 뻣뻣함만 지니고 있으면 남자에게건 여자에게건 누구에게나 저항치 못할 만큼 매혹된다는 뜻이라고 말이다.
정신분석은 오늘날, 우리의 사상이 모두 그렇듯이 변태적 전체주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지닌 도착증의 굴레 속에 우리를 가두려 애쓴다. 그것은 자유롭게 놓아두었던 분야까지도 미신적 신앙으로 점령하였고, 저만의 분석 원리를 날조해내는 수수께끼 같은 의미의 은어로 교묘하게 자기를 감추고서, 강제적으로 보호를 해주겠다고 나서는 미국의 공갈협박꾼들과 비슷하게, 정신적 위협과 협박의 방법으로 손님을 모은다. 그러므로 그토록 많은 부분에서 우리를 지배하려 드는 그 돌팔이들과 미치광이들이 어머니에 대한 나의 감정을 몇몇 과장된 병리학적 용어로 설명하는 수고를 나는 진지하게 허락하고자 한다. 자유, 우애 그리고 인간의 가장 숭고한 열망들이 그들 손안에 들어간 바에야, 단순한 아들의 사랑이 그들의 병적인 뇌 안에서 다른 것들처럼 변형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으랴.

나아가, 한층 더 나는 그들의 진단과 잘 타협할 수도 있으니, 나는 한 번도 근친상간을 무덤과 영벌의 무서운 빛 아래서 바라본 일이 없는 것이다. 그 끔찍한 빛이라는 것은, 그릇된 도덕이 성적 왕성함의 한 형태-나로서는 인간 타락의 거대한 사다리에서 극히 보잘것없는 자리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에 고의적으로 퍼부으려 열을 내는 그런 빛인 것이다. 근친상간의 온갖 광란을 다 합쳐도, 히로시마의 광란, 총살 집행대의 광란, 경찰의 고문과 테러의 광란보다는 무한 배나 수긍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 학자님들의 노력이 낳은 백혈병이나 다른 가능한 유전병보다는 천 배나 더 귀여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구도 나로 하여금 성적 행위 속에서 선과 악의 기준을 보도록 만들지는 못하리라. 내게는 핵 실험을 계속 하자고 문명 세계에 권하는 어떤 저명한 물리학자의 음울한 표정이 어머니와 자고 있는 아들의 모습과 비교도 못할 만큼 훨씬 추악해 보인다. 20세기의 지적 과학적 이념적 탈선과 비할 때, 모든 성적인 탈선은 내 마음속에 가장 부드러운 용서를 불러일으킨다.
대중에게 넓적다리를 벌리기 위해 돈을 받는 소녀는 자비로운 누이 또는 선한 빵의 정직한 분배자처럼 여겨진다. 그녀의 겸손한 매매를, 유전자를 해치거나 핵공포를 유포하려는 구상에 자기의 두뇌를 파는 학자들의 매춘에 비교하여 보면 말이다. 종족에 대한 이 배반자들이 몸을 내맡기고 있는 영혼과 정신과 이념의 부패에 비하면,
성에 관한 우리의 노심초사란, 그것이 매춘이건 아니건, 근친상간이건 아니건, 우리 해부 조직이 배치되어 있는 세 개의 비천한 괄약근들 위에서 어린아이의 웃음이 지닌 천사 같은 순진성을 띤다. 


다음은 그가 말하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인생 이야기.

인생은 젊다. 늙어가면서 그것은 삶과 시간을 만들고, 작별도 만든다. 그것은 내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고 더 이상 내게 줄 것이 없다. 나는 가끔 내가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하여 젊은이들이 자주 드나드는 장소를 찾는다. 가끔 나는 스무 살에 죽은 친구의 얼굴을 다시 발견한다. 흔히 그것은 똑같은 몸짓, 똑같은 웃음, 똑같은 눈들이다.
무엇인가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면 거의-거의!-이렇게 믿게 되곤 한다. 이십 년 전의 나의 무엇인가가 내게 그대로 남아 있다고, 나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고. 그러면 나는 약간 원기를 회복하고, 내 검을 쥐고서 힘 있는 걸음으로 정원으로 나아가 하늘을 바라보고 칼을 쳐드는 것이다. 그리고 또 가끔, 나는 내 언덕에 올라 세 개, 네 개의 공으로 곡예를 한다. 내가 아직도 손을 잃지 않았음을, 그들이 아직도 나와 시합할 수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그들? 아무도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도 내가 순진할 수 있음을 나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패배했다는 것, 그것이 진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졌을 뿐,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현명함도 체념도 없다. 나는 빅서의 모래 위에 해를 받으며 엎드려 있고, 내 온몸에서 내 뒤에 올 모든 이들의 젊음과 용기를 느낀다. 나는 신뢰를 느끼며 그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물개들과 또 이 계절이면 물을 뿜으며 백 마리씩 떼를 지어 지나가는 고래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대양의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 나는 눈을 감고 미소를 지으며, 우리가 모두 함께 이곳에  있음을 알고 있다.다시 시작할 준비를 갖추고서.

이렇게 말하는 작가는 엄청난 죽음들을 목격하고 자신은 기적처럼
그 모든 죽음에서 벗어나곤 했다. 과연 나란 인간은 어느 만큼의 죽음을 모면해 왔을까?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

11쪽, 8줄 : 되라-> 돼라
28쪽, 끝 : 시작할라치면 -> 일부러 사투리를 사용한 것이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하려고 하면으로 바꿔야 한다.
63쪽, 8줄 : 가르키며 -> 가리키며
93쪽, 13줄 : 깨우쳤고 -> 뉘우친 게 아니고 뭔가를 배웠다는 것이니까 깨쳤고.
108쪽, 13줄 : 번 밖에 -> 번밖에
144쪽, 7줄 : 고질적이 -> 고질적인
149쪽, 밑에서 7줄 : 들여마시다 -> 일부러 북한어를 쓴 게 아니라면 들이마시다.
247쪽, 밑에서 7줄 : 거리에서하품하며 -> 거리에서 하품하며
255쪽, 8줄 : 설레임 -> 설렘
260쪽, 밑에서 9줄 : 원시저인 -> 원시적인
294쪽, 밑에서 5줄 : 바램 -> 바람
316쪽, 1줄 : 있더라고 -> 있더라도
338쪽, 10줄 : 놓친 -> 놓칠
349쪽, 밑에서 12줄 : 그를 -> 그에게
350쪽, 7줄 : 위에 -> 위의 또는 위에 있는
388쪽, 끝 : 문장이 끝났는데 온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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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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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든 인물이든 번갈아가며 써내려가는 것을 좋아하는 하루키,
이번 작품 역시 아오마메와 덴고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목 뒤 어느 한 점을 바늘로 툭 가볍게 찔러서 사람을 죽인다는 설정을 작품에 넣는다든가, 후카에리와 같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한 매력을 가진 인물을 창조해낸다든가 하는 점은 그동안의 하루키와 조금도 다를 것 없이 충분히 멋졋다.

그의 새로나온 장편소설을 소개하며 특유의 멋진 표현이 여전하다는 문구가 빠지지 않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 그의 표현처럼 우리는 모두 자신을 그르칠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는 조용히 뒤에 남는 생을 살고는 있지만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어린 나처럼 그의 이 강렬한 꾸밈의 말에만 현혹되어 매달리는 독서를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우리는 조금씩 자신도 모르게 변해가는 것이다. 

어쩌면 하루키는 아오마메가 설명하는 아유미의 상처 받으려 애쓰는 모습이 어린 시절 겪은 친족의 성추행 때문일 것이라고 은근히 몰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22쪽 끝부분 아오마메의 대사를 보면 뭐 거의 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사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을 너무 뻔하게 해석하곤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그냥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상처 받은 것들의 형태'에 가두려는 편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행동에는 조금 더 그럴싸한 원인이 있거나 아니면 아예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아주 시시하게도.
이런 분위기의 글은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의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표현했던 인물인 그 여배우...이름이..아...
아! 사쿠라. 담담해 보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상처가 표현되는데,
아오마메가 하듯 주변에서 그녀의 상처를 대놓고 설명해주고 속상해 하는 이런 뻔한 방법을 쓰지 않는 사쿠라의 경우가 훨씬 고급스럽고 멋지다, 하루키 아저씨 실망이에요.

덴고의 생물적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주목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꼭 수수께끼를 푸는 기분이었는데 과연 그의 과거 작품도 그랬었나 기억을 굴려 보지만 뭐 소용은 별로 없었다.
결과적으로 덴고가 '선구'교주의 아들이기 때문에 2세를 가지려 했던 여자들의 자궁은 반드시 비어 있어야만 했던 것이란 얘기.

어떻게 하면 후카에리와 같은 매력적인 인물을 창조해 낼 수 있을까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들을 이것저것 찢어다 붙여놨다 해도 예상되지 않을 만큼 매력이 크다. 그리고 그녀를 악착같이 마크해 주는 아자미라는 인물, 끝까지 나오지 않을지 의문이 들게 했다.

책을 읽다 보면 아오마메와 덴고의 상황은 묘하게 마주보고 있음이 느껴지는데 그것은 묘한 공통점 -오로지 자기들끼리만 알아야 하는 비밀 속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뒤로 갈수록 점점 더 그들이 만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도 하고.

탄탄한 스토리는 자랑할 만하지만, 어쩐지 그의 과거 장편보다 마음이 덜 간다. 뭐랄까, 그냥 출판하기 위해 썼을 뿐인 작품이지 정말 좋아서 이런 것을 꼭 한 번쯤은 써보고 싶어서 썼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점까지 생각한다는 건 독자로서 읽고 편하게 앉아서 입만 나불대는 스스로의 큰 오만이겠지만 말이다. 거기다가 두 개의 달이 등장하자마자부터 끝까지 '시대유감'이란 곡에서 두 개의 달이 떠오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고 노래하던 서태지 생각이 끊이지 않을 만큼 별로 깊이 있지 않은 작품이란 생각도 컸고. 아, 그렇다고 서태지가 깊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대중가요에 쓸 만큼 흔한 두 개의 달이란 설정을 쓰신 것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한 것.

하루키 선생님 전 태엽 감는 새, 댄스 댄스 댄스,해변의 카프카 등 당신의 장편들을 아주 감명깊게 읽은 사람이에요, 긴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을 게 뻔한 작품인데도 박수를 쳐주지 못할 작품이란 생각이 드는 건 그저 저만의 생각일까요? 아쉽고 또 아쉽고 아쉽네요.

 

아래는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
<1권>
21쪽, 10줄과 206쪽, 4줄 : 검정색 -> 검정 또는 검은색
194쪽, 4줄 : 찌뿌둥 -> 찌뿌듯
334쪽, 11 : 두번째 때 -> 두 번째 때
590쪽,  : 진즉에 -> 진작에(다른 곳에도 있지만 그건 대사니까 써도 좋은 경우)

'로서'와  '로써'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았다.
딱 한 곳(245쪽 밑에서 9줄)을 빼고는 전부 '로서'를 썼는데 '로써'로 써야 할 부분도 꽤 될 듯하다. 잘 파악해서 '로서'와 '로써'를 구분해야 한다.

207쪽,  현재로서 , 248쪽, 끝 덴고로서는, 334쪽 밑에서 7줄 현재로서는, 600쪽, 현재로서

<2권>
10쪽, 밑에서 3줄 사실로서, 25쪽, 5줄과 30쪽, 밑에서 6줄 현재로서, 38쪽, 5줄 여자로서는,
47쪽, 밑에서 7줄 출판사 측으로서는, 56쪽, 밑에서 7줄과 76쪽 밑에서 5줄 현재로서는, 65쪽 5줄 고마스로서는, 129쪽 밑에서 8줄 138쪽, 2줄과 밑에서 6줄, 142쪽 편지 1줄, 139쪽, 4줄 현재로서는, 148쪽, 4줄 이야기로서, 164쪽, 12줄 일반론으로서, 221쪽, 3줄, 231쪽, 6줄 현재로서, 235쪽, 밑에서 5줄 역할로서, 238쪽, 9줄 대가로서, 300쪽, 밑에서 7줄 정보로서, 계시로서 336쪽, 밑에서 5줄 항체로서, 341쪽, 8줄 가설로서는, 387쪽,, 4줄 다마루로서는, 403쪽, 2줄 일로서, 427쪽, 7줄 징표로서, 432쪽, 밑에서 9줄과 442쪽, 밑에서 10줄 현재로서는, 467쪽, 10줄 등불로서,
535쪽, 밑에서 8줄과 577쪽, 밑에서 3줄  지금으로서는, 573쪽, 3줄 학문으로서의, 580쪽, 6줄 나로서는, 582쪽, 12줄 아버지로서는

39쪽 1줄 : 그외에도 -> 그 외에도
      밑에서 5줄 : 여섯번째 -> 여섯 번째
112쪽 밑에서 3줄 : 두번째 -> 두 번째
393쪽, 7줄 : 택시를 -> 택시에서
508쪽, 8줄 : 아마도에 대한 호응단어가 없다.

같은 페이지의 두 개의 '아마도'에는 ~이리라, ~것이다 의 호응 단어가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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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에 너무 많은 돈이 든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부터는 반가격 한다는 책이 있으면 웬만하단 생각이 드는 경우 사버린다. 그것 참, 슬픈 현실이다.

불안을 읽으니 내가 왜 불안이란 단어를 옆에 끼고 살지 않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나는 불안에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인간들이 지껄여대는 뒷얘기는 무시하고, 나를 믿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생각하고, 삶에 '기대'라는 무의미한 짓은 되도록 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까보다는 당장 내가 없더라도 힘든 일을 당한 주변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물론 주고 아쉬워 하고, 나도 모르는 기대를 했다가 실망하기도 하고 가끔씩 들려오는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인간들의 막말에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말이다.

85쪽부터는 당시에 발생한 온갖 이론들을 죄다 갖다 대며 계급세상에서 능력세상으로 바뀌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 엥겔스의 영국 노동계급의 조건 등의 이론을 사용했다.

불안의 원인을 사회, 역사적으로 살펴보다가 150쪽부터는 불안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데 그 첫 번째는 지적인 염세주의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하찮다는 것, 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 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 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러졌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라고 말하는 쇼펜하우어는 철학적 염세주의의 모범을 보여준 예라고 한다. 지적 염세주의자가 되려면 자기 가치판단을 정확히 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 작가가 추구하는 표가 때로는 친절하지 않음이 이번 작품을 통해 드러났다. 184쪽에서의 표는 해당 작품을 읽지 않은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그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예'라는 것은 다수가 알 만한 것이어야 하는데, 보통은 가끔 그것을 잊은 채 매진하는 듯해 씁쓸하기만 하다. 

작가는 철학,예술,정치,기독교에 이르는 원인과 함께 그에 대한 해법을 이끌어내고 있다. 예술은 불안을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고, 저이는 불안의 원인이 계속 바뀌어 왔고 바뀔 수밖에 없다며 역사를 사용해 예를 들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 부분에서의 해법은 너무 허무하다. '니들은 어차피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불안해 하지 말고 죽음을 생각하며 편안함을 느껴라' 식의 글을 열어가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소설이 훨씬 편하고 좋다.  

아래는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
183쪽, 4줄 : 이빨 ->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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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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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살 때 초록색으로 쳐진 줄은 나의 독서적 집중을 막을 수 없지,
암 그렇고 말고~라는 자신감으로 샀는데 아, 오만이었다.
두 권의 두터운 책이 끝날 때까지 죽죽 쳐진 밑줄은 독서에 크나큰 방해가 될뿐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다. 다시는 줄그어진 헌책을 사지 말아야겠다.

이 작품을 두고 교양서적이니, 시대서적이니 등등 하는 말이 많은데
난 그냥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로만 읽었다.

인형극을 시작으로 연극에까지 관심이 뻗친 빌헬름이 연극을 위해 여러 사람과 지역, 상황들을 만나며 벌어지는 일들을 엮었다. 그저 심어둔 인물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사람들이 뒤로 갈수록
의미를 갖고 존재가 되어가기 시작하거나 존재가 되었을 즈음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우리 삶의 참모습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1권 463쪽의 다음과 같은 글을 보면 수백 년이 지나도 남자들은 바뀌지 않을 종자임에 분명하다는 억측이 문득문득 다가오곤 한다.

'사람들이 아무리 꾀꼬리의 노래 소리,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
솰솰 거리는 바람 소리, 또는 건반을 치고 나팔을 불어대는 온갖 악기들의 소리가 좋다 해도, 나는 그 또옥 또옥 하는 소리의 편입니다. 또옥 또옥 ! 이 소리야말로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해서
듣고 싶은 후렴시의 가장 아름다운 주제이지요.'

작품이 연극에 관한 것이다보니 화자의 얘기나 작중 인물의 이야기가 대부분 연기와 배우에 관한 것이 많다.

466쪽에 보면 '낭독과 감정이 실린 낭송 사이의 미묘한 경계선을 그 사람처럼 그렇게 잘 지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란 말이 나오는데 이런 것들은 글로 보기보다 실제로 들어봐야 그 차이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법인데 이 정도의 표현가지고는 참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다.

471쪽.
역할을 맡는 부분에 관한 것으로, 호리호리하고 미남형인 빌헬름이 책에서 이미 뚱뚱하다고 표현된 햄릿을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 오는데 그 사이에서 오는 인물에 대한 괴리감에 불만이 터지고 마는 아우렐리에. 이는 겉모습뿐 아니라 연출이 의도하는 배우와 실제로 배우가 연기하는 역할이 얼만큼 일치할 수 있느냐 하는 그 어려운 문제까지 떠올릴 수 있는 부분이다.

 

475쪽에서 제를로가 말하는 배우의 자세는 지금도 필요한 것,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고 또 할 수 있는 배우는 거의 없거나, 있어도 정말 아주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만큼 그가 제시하는 배우의 상은 아주 이상향에 근접하고 있다.

배우는 누구나, 멋있고 칭찬받을 만하고 화려한 배역을 받으면 매우 만족해 하지요. 그러나 자만심에 가득차서 마치 자신이 아주 그 배역의 주인공이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남도 자기를 그렇게 보아 주는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배우가 대부분이고, 그 이상을 행할 줄 아는 배우는 아주 드물어요.
작품에서 원작자가 생각한 것이 무엇이며, 한 배역을 충분히 해내려면 자기의 개성을 얼마나 죽여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자기는 이제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확신을 통해 관객도 마찬가지로 그런 확신을 갖도록 할 수 있겠는지, 그리고 또 어떻게 하면 표현력의 내면적 진실성을 통해 무대를 신전으로, 그리고 마분지를 숲으로 변해 보이게 할 수 있는지를 생생하고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지요.
정신의 이런 내적인 힘을 갖추어야 비로소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고,  이와 같은 허구적 진실을 보여줘야만 효과를 거둘 수 있으며, 이런 효과를 거둘 수 있어야 환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데,
이런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2권의 처음부터 117쪽까지는 '어느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종교적 체험을 어느 여자의 입을 통해 밝히고 있다. 그녀가 63쪽에서 말하고 있는 종교적 감정과 종교를 위한 열성은 지금도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종교적 열성에 기운 나머지 종교적 감정을 잃고 강요하거나 본질을 잊고 종교생활을 하는 신자가 이 세상에는 넘쳐나기 때문에.

아래는 142쪽에서 빌헬름이 연극하는 사람들에 관해 말한 부분이다.

각자가 모두 제일인자 행세를 하고 싶어할 뿐만 아니라 유일한 존재인양 행동하려 듭니다. 각자가 모두 다른 모든 사람들을 배척하고 싶어하고, 자기가 타인들과 함께 어울려서는 아무 일도 이루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두들 자기가 굉장히 독창적인 인물이라 생각하지만, 낡은 관습을 벗어나는 것을 소화해 낼 능력이 없습니다. 게다가 항상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아 불안하게 서성대지요. 그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보면 격렬하기가 이를 데 없어요!

다만 아주 보잘것 없는 자부심, 극히 편협한 이기심이 그들을 간신히 서로 묶고 있을 따름입니다. 상호간의 예의라고는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지경이고, 음험한 악의와 비방하는 욕설을 통해 영원한 불신이 조장됩니다. 방종하게 생활하지 않는 사람이 보기에는 어리석게 생활하고 있단 말입니다. 저마다 다 무조건 존경받으려 하고, 지극히 사소한 비판에 대해서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요. 자기는 이미 그런 것쯤은 모두 훤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항상 그 반대로 해왔을까요? 그들은 항상 명예에 굶주린 상태이며 항상 남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이성과 훌륭한 취미를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처럼 보이고, 자기들이 개인적으로 멋대로 부여한 절대권위를 유지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야르노는 그가 말한 모습이 비단 연극하는 사람들만의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모습은 세상 전체를 묘사한 것이라고.

대략 열 개 정도의 일터를 전전했던 것 같은데 그 중 위와 같지 않았던 데는 단 두 군데밖에 되지 않는다. 도대체가 사람들은 서로 헐뜯기 바쁘고 누굴 칭찬할 줄도 모르고 예쁘게 말할 줄도 모른다. 물론 저런 말은 누굴 향해 할 말이 아니라 그저 거울을 보고 해야 할 말에 불과함을 알고는 있지만, 그 때마다 얻는 우리의 상처는 참 이루 말할 수가 없다.

251쪽에서는 친구 베르너가 그동안의 모습을 지켜본 소감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와 같은 경험을 한 빌헬름은 누가 봐도 어느 면으로든 성장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이처럼 우리도 사회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더 큰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것이란 말. 중요한 것은 개인이 추구하는 것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것, 누가 뭐라고 하든.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직접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들 말하지!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친구들이 -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서- 내게 장담하기를,
자네가 어떤 방탕한 젊은 귀족과 함께 살면서 그에게 여배우들을 소개해 주고 돈을 탕진하도록 부추기고 있으며 그가 자기의 온 친척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모두 자네 탓이라는 거야.
내가 연극계에서 뼈가 굵으면서 갖은 고약한 험담을 다 삭여내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를 위해서도 그렇고 이 훌륭한 분들을 위해서도 화를 내고 말았을 거야.
우리의 행동이 그 사람들에게는 단지 산발적인 단편으로밖에 나타나지 않아, 그리고 선과 악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 일어나고 대개는 아주 대수롭잖은 현상이 노출된 따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물의 극히 일부분밖에 볼 수 없거든.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우리의 행동에 대해 평가를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눈앞에 남녀배우들을 높은 무대 위에 올려놓고 사방에서 불을 환히 밝혀준다고 치세. 그래서 한두 시간 안에 전체 작품의 공연이 끝났네.
하지만 그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아는 사람이란 원래 드문 법이지.  

아래는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
<1권>
121쪽, 8줄 : 찾아볼래야 -> 찾아보려야
139쪽, 9줄 : 길다란 -> 기다란
162쪽 밑에서 7줄/ 517쪽,518쪽 밑에서 8줄 : 빨강색 -> 빨강
185쪽 7줄 : 뗄래야 -> 떼려야
436쪽 밑에서 12줄/ 504쪽 밑에서 9줄 : 검정색 -> 검정
476쪽 9줄 : 깨우치다 -> 깨치다
496쪽 밑에서 4줄 : 멈출래야 -> 멈추려야
519쪽 3줄 : 맞춰보시지요 -> 맞혀보시지요
522쪽 11줄 : 그들 둘이가 -> 둘이

<2권>
57쪽 9줄 : 들리곤 -> 들르곤
78쪽 밑에서 4줄 : 이빨 -> 이
413쪽 9줄 : 전해드리지까지는 -> 전해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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