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어둠 후마니타스의 문학
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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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 보고 선택한 것인데
구입 목록에 왜 넣었는지 잊었을 즈음 이 책을 잡게 되었다.

 

그곳이 어디건 혁명이 있던 곳에서,
윗선들끼리는 서로 알게 모르게 갖고 있었을 그런 갈등이 가득한 책.
각 심문 시작 전마다 누군가의 격언과 루바쇼프의 일기가 차례로 들어가는데
제한된 공간에서 별다른 묘사 없이 이루어진 문체가 특별하다.

 

어디에든 있었을
넘버원,
루바쇼프, 이바노프.
그리고 글레트킨.

 

<첫 번째 심문>
'이바노프의 제의'
영웅 노릇을 그만 두면 곧 사면이 될 진술서를 쓰자는 제의를 거절하는 루바쇼프.

 

<두 번째 심문>
'궁극적 진리는 끝에서 두 번째 지점에서는 언제나 거짓이다.
결국 옳다고 입증될 사람은 그 전에는 틀린 것으로, 그리고 해로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누가 옳은 것으로 입증될 것인가? 그건 단지 나중에야 알려지리라.
그동안 그는 역사가 사면해 주리라는 희망으로, 반드시 외상으로 행동하면서
악마에게 자기 영혼을 팔도록 되어 있다.

 

넘버원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항상 침대 옆에 놓아둔다고 한다.
그 시대 이후 정치적 윤리의 지배에 대한 정말 중요한 것은 언급된 적이 없다.
페어플레이라는 19세기의 자유주의적 윤리를 20세기의 혁명적 윤리로 바꾼 사람은
우리가 처음이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옳았다. 크리켓처럼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혁명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역사가 휴식하는 동안 정치는 상대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
그러나 위태로운 전환기에는 오래된 법칙(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법칙)외에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

 

우린 이번 세기에 신마키아벨리즘을 도입했다. 다른 사람들, 즉 반혁명적 독재 정권은
그것을 서투르게 모방했다. 우리는 보편적 이성의 이름을 내건 신마키아벨리주의자였고,
그것이 우리의 위대성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민족적 낭만주의의 이름을 내건
신마키아벨리주의자였는데, 그것은 그들의 시대착오였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에 의해 결국 용서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안 될 것이다....'

 

위와 같은 루바쇼프의 말을 유명 기자가 사실적으로 현장화한 것이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라고 해도 될는지.
아주 우연히 이 책 다음으로 잡은 책이 연관이 있는 듯해 신기할 따름.
어쩌면 정일의 독서일기에서 본 내용일지도 모르지만 별다른 메모를 해 놓지 않은 상태에서
관련이 있을 것만 같은 두 권의 작품을 매달아 읽는다는 것은 남모를 기쁨마저 선사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는지 모를는지.

 

'이 세상을 감정을 풀기 위한 어떤 형이상학적 사창굴로 여겨선 안 된다는 것일세.
이게 우리의 첫 계율이야. 동정, 양심, 역겨움, 절망, 후회 그리고 속죄는 우리에게
혐오스러운 방탕거리일 뿐이지. 주저앉아 스스로 최면에 빠져들어 목덜미를 글레트킨
총 앞에 공손히 내놓는 건 쉬운 해결책이야. 우리 같은 사람에게 가장 큰 유혹은
폭력을 단념하고, 참회하며 자신과 화해하는 일이네. 스파르타쿠스에서 당통과
도스토옙스키에 이르기까지 가장 위대한 혁명가들도 이 유혹 앞에서 무너졌어.
그것이 바로 대의명분을 저버리는 고전적 형태의 배반이지.
신의 유혹은 늘 사탄의 유혹보다 인류에게 더 위험했네. 혼란이 세상을 지배하는 한
신은 하나의 시대착오네. 그리고 자기 양심과의 모든 타협은 배반이지.
저주받은 내면의 목소리가 자네에게 말을 건다면, 귀를 막아 버리게....'

 

위와 같이 말하는 이바노프.
진정한 유혹에 빠져 보지 않았다면 저런 말을 할 수 없었을 테지.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저런 도취를 피해야 하는 걸까?
무엇이 달라 저런 것을 가지고 태어나는 걸까?

 

이바노프의 재설득.
루바쇼프는 목숨을 택한 듯하다.
생명을 핑계로 한 합의 같은 것.

 

<세 번째 심문>
이바노프가 감금되다.


책을 보다가 글레트킨과 이바노프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메모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과 같은 비교를 해 놓는 저자.

 

육중하고 무표정하게, 글레트킨이 거기 앉아 있었다.
많은 루바쇼프와 많은 이바노프 덕분에 존재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잔인한 국가의 구현체인 그가.

글레트킨은 자신이 이바노프와 구세대 지식인의 정신적 상속자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는가?
글레트킨과 새 네안데르탈인들은 머리에 번호 적힌 세대의 과업을 완결했을 뿐이라고
루바쇼프는 수백 번 홀로 되풀이했다. 동일한 원칙이 그들 입으로 말해질 때 그리도
비인간적으로 변하는 것은 순전히 시대 풍조 때문이었다.
이바노프가 똑같은 주장을 할 때 그의 목소리에는 사라져 버린 세계를 잊지 않음으로써
과거에 남겨진 희미한 빛깔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사람은 자기의 어린 시절을 부정할 수는 있어도 그걸 지울 수는 없다.
이바노프는 최후까지 자신의 과거를 질질 끌고 다녔다.
그래서 그가 하는 무슨 말에나 장난기 어린 우수의 빛이 서려 있었다.
글레트킨이 그를 보고 냉소주의자라고 부른 이유는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글레트킨의 무리엔 지워야 할 어떤 것도 없었다.
그들은 어떤 과거도 안 가졌기 때문에 과거를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탯줄도 없이, 경쾌함도 없이, 우울도 없이 태어났다.

 

다음과 같은 루바쇼프의 말은 이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그리고 또...계속 들어맞는
어떤 틀과 같은 것이 아닐까.

 

무대를 떠나고 있는 우리가 무슨 권리로 우월감을 가진 채 글레트킨을 내려다보고 있는가?
네안데르탈인이 지구상에 처음 나타났을 때 원숭이들 사이에는 틀림없이 웃음이 있었을 것이다.
고도로 문명화된 원숭이들은 가지에서 가지로 우아하게 옮겨 다녔지만,
네안데르탈인은 거칠게 땅에 매여 지냈다.
평화롭고 포만감에 찬 원숭이들은 정교한 놀이를 하거나 철학적 명상 속에서 벼룩을 잡았다.
네안데르탈인은 곤봉으로 이리저리 치면서 세계를 짓밟고 다녔다.
원숭이들은 나무 꼭대기에서 즐거운 듯 그를 바라보다 호두를 집어 던졌다.
때때로 원숭이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원숭이들은 우아하고 세련되게 과일과 부드러운
식물을 먹었지만, 네안데르탈인은 날고기를 먹어 치우고 동물들과 자기 동료들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그는 늘 서 있는 나무들을 베어 내고,
바위들을 시간 숭배의 장소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겼으며, 정글의 모든 법칙과 전통을 위반했다.
그는 동물적 품위 없이 거칠고 잔혹했다.
고도로 문명화된 원숭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역사의 야만적 퇴보였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침팬지들은 인간을 보면 아직도 콧방귀를 뀐다....

 

<문법적 허구>
모든 혁명은 문법적 허구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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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힘 - 조선, 500년 문명의 역동성을 찾다
오항녕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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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공부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책에 빠지지 않는 공통점.
바로 비방. 특히 역사에 관한 글을 읽어 보면 거의 대부분.
이번 책도 마찬가지였다.
 
독자인 나는 저자 오항녕의 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람인데 아주 신나게 깐다.
그들 사이에서 말하면 아,,그 사람, 하고 알 만한 그런 인물일 것.
뭐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냥 내가 찾은 건 이건데 그가 말하는 그건 옳지 않은 게 아닐까
정도로 하는 게 보기 좋을 듯하다.
이런 게 끼이면 책을 좋게 보려 해도 좋게 볼 수가 없게 된다.
열정은 좋은데 그게 지나쳐서 상대방에게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날아가고 그걸 독자가 느끼게 되어
좋지 않은 기분을 갖게 되는 게 기꺼운 일은 아니라는 걸 좀 알아 줬으면.

위와 같은 불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많은 사실을 알려 준다.

 

1장 문치주의의 꽃

 

조선에서 빠지면 안 되는 경연, 이는 임금과 신하가 경전을 놓고 세미나를
벌인다는 것인데 지금의 상황과 아주 다른 낯선 풍경.
저자는 시기별로 경연을 어떻게 활용했고 경연을 폐지한 왕은 누구인지 등을 다루고 있다.

 

2장 실록, 그 돌덩이 같은 저력

 

실록은 중국 당 태종 때부터 편찬되기 시작됐고, 우리는 통일신라 말 9세기경부터였다고 하는데
세계 그 어느 나라를 보아도 이와 같은 1차 사료는 찾아 보기 힘들다고 한다.
아주 많은 내용이 실려 있지만 아래와 같은 문장이면 충분할 듯.

실록의 묘미는 아무나 볼 수 없었다는 데에 있다. 국왕은 물론이고, 사관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기록이었다. 조선 양반 관료제가 자정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큰 힘이
바로 이 실록에 있었다. 역사라는 심판관이 쥔 판결문을 아무나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과연 지금 우리의 정치는 어떤 존재가 심판할 것인가~!

 

3장 헌법과 강상

 

조선에도 지금과 같은 헌법이 있었을까?

조선 초에는 [국조오례의]라는 예서를 통해 국가 차원의 예제를 확립했고
고금의 예서를 참고해 성종 5년(1674) 신숙주 등에 의해 완성된 이 책이
[경국대전]과 함께 기본예전이 되었다고 한다.

 

4장 대동법, 혁신하는 시스템

 

대동법이 광해군대에 시행되지 못한 이유는 단지 지도층이 대부분 양반 관료였기 때문이라는
한국사전의 내용은 옳지 않다면서 그 증거들을 나열하고 있다.

 

광해군은 대동법의 확대성과 임진왜란 이후 재정과 민생을 수습해야 한다는 시급성 때문에
이원익의 제안에 따라 선혜청을 설치했지만, 안팎의 조건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집권 기반이었던 북인이자, 소북이었던 유영경 대신 좌의정에 임명되었던
기자헌이 바로 방납 커넥션의 주인공이었다. 이들은 방납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자들로,
대동법 시행을 반대하는 게 당연했다.


비변사의 보고에 따르면 경기선혜법 이후로도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자는 주장은 여러 번
제기되었다. 광해군 원년에 사간원에서 올해에 한해 일단 선혜청 사목에 따라 시행하자고
요청했으나, 광해군은 천천히 하자고 미루었다. 광해군 2년 9월의 기록을 보아도
곽재우 뿐 아니라 조정 신하들도 여러 번 확대 실시를 요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제안은 광해군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광해군은 '특산물이 나는 곳에 공물을 분정한다'는
관례에 기초한 '현물납'을, 포기할 수 없는 원칙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유공량 등
북인들의 대동법 반대 의견에 동조했다.

 

5장 오래된 미래, 조선 성리학

 

중국 사상계에서 탄력을 잃어가는 성리학의 주체성과 자발성을 환기시키는 혁신이었던 양명학이
왜 조선에서는 발을 붙이지 못했는가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퇴계의 양명 비판 때문이었고
그 이유는 양명학의 견해가 불교의 견해와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었다고 간단히 정리하면 되겠다.
고려를 잇지 않기로 한 만큼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와 비슷한 견해를 지닌 양명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당시로썬 말이 안 되는 일이고, 송시열이 주자의 저술을 정리, 재해석하기 시작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6장 부활하는 광해군

 

그레이트 북스 역사 수업 교육 과정에서 처음 접한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족을 죽인 패륜왕인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다리기 외교를 적당히 잘한 지혜로운 왕인가.

저자는 그와 같은 시작이 일본의 이나바 이와키치 덕이었고, 그때부터 이병도에 이르는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한배를 타고 광해군을 새롭게 부활시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나바의 해석은 중국사의 변동을 통해 역사를 규정짓는 관점인데, 소선사는 늘 중국이나
일본의 외부 조건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명시하고 싶은 것이었다는 저자의 말.

 

7장 당쟁과 기에 대한 오해

 

위에 얘기했던 이덕일 소장의 글을 비판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김시습 VS 네모들 정도?

위와 같은 글을 끝으로 저자는 이제는 우리가 그분들의 당색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의 크기를 배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8장 역사 바로 세우기_단종과 사육신

 

노산군이 단종이 되고,
사육신이 충신이 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재미있다.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

127쪽 2줄: 그럴 듯하면서도 -> 그럴듯하면서도
133쪽 5줄: 바랬다 ->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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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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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을 거절한 남자의 그녀가 중매 결혼을 했을 때,
그리고 확실히 판정을 받은 것도 아니면서(물론 세상에 그 따위 판정이 있기는 한가)
자신이 남색가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런 남자인 화자의,
그녀가 자신을 버린 게 아니라 자신이 그녀를 버린 것이라고
스스로에 까불고 장난 치는 심정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경험이고
나 역시 경험을 지닌 채 살고 있지만
그것을 이런 훌륭한 표현의 고백으로 풀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확실히 그의 고백은 흔하게 있던 분위기나 문체의 그것들과는 다르다.

 

201쪽부터 있는 집장촌 첫 경험에 대한 고백은
어쩐지 여자인 나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란 생각에
조금 우스운 질투심이 봉긋 솟아올랐다.
정말 우스운.

 

이 작품에는 예전 같으면 열심히 베껴 썼을 문구들이 넘쳐났지만,
이제 그런 정도의 표현들은 그냥 '음,,,좋구나'하고 넘어갈 수 있을 만큼
내 속에 많은 것들이 들어 앉아서 굳이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또한 제목에서 보듯, '가면'이란 단어에 매달려서 책의 내용을 신나게 그리고 어렵고 묘하게

장난치며 읊조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말장난보다는 그저 책을 잡고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더 생산적일 듯.

 

독후감이 짧다고 해서 작품이 별로였다는 뜻은 아니라는 말을 이렇게나 지저분하게 하고 있다.

 

궁금한 단어가 있어서 찾아 봤다.

 

165쪽에 나오는 단어

 

악머구리[명사] [앙머구리]


1.잘 우는 개구리라는 뜻으로, ‘참개구리’를 이르는 말.
2.아주 시끄럽게 소리를 내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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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우울증 - 수줍음은 어떻게 병이 되었나?
크리스토퍼 레인 지음, 이문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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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옛날엔 '사내 녀석들'이라고 불리던 아이들이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라는 정신병 환자로
불리게 된 이유가 미국 정신분석학자들 덕분이고, 이는 DSM진단이라는 기준을 마련해 보편화됐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 '만들어진 우울증'은 과거 주요 인사들 사이에 오갔지만 발표되지 않은
접근이 불가능했던 서신과 문서, 메모 등 미국 정신의학협회의 방대한 기록물을 참고했으며
제약회사 임원들 사이에 오고 간 과거 미공개 내용들을 이용하고, 오늘날 가정 필수품으로
자리잡은 약들의 부작용을 심각하게 우려하는 문서들을 그대로 보여 주며 문제의 정신의학자들과
심도 깊게 인터뷰한 내용들을 싣겠다고 한다.

 

1. 정신의학 VS 정신분석 - 불안을 둘러싼 백년 전쟁
불안에 대해 뒤집었다 제자리로 돌렸다를 서로 반복하는 프로이트 VS 나머지 정신의학자들의
100년 동안의 이야기. 결국, 한때는 정신의학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던 전혀 다른 차원의
수줍음 같은 일상적 감정과 행위들이 이제 정신장애라는 타이틀을 달고 정신의학 매뉴얼 속에
포함되고, 그 장애로 고통을 받는 이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2. 진단 전쟁 - 감정이 병이 되다
수줍음을 질환으로 바꾼 장본인 중 하나인 로버트 J스피처 박사를 중심으로 15명이 함께한
질병 목록 업데이트. 무슨, 병이 인터넷 바이러스 방지 업데이트도 아니고 26년 새에
두 배나 늘어난 질병의 종류라니.


정신 분석학 관련 용어들을 금지하고자 했던 DSM-III특별위원회를 반대하는 그들은 DSM-III이
'신경증'이란 성채를 없애고 그 자리에 레비타운(2차 세계 대전 이후 갑자기 늘어난 중산층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교외에 지은 대규모 주택단지로, 큰길을 따라 동일한 규모와 형태의 주택들이
늘어섰다)을 세운다며 불만을 토로했다고.

 

그보다 앞서 1977년 6월에는 마릴과 동료들이 다음과 같이 경고를 했었다고 한다.
"정신의학 용어가 의미를 지니려면 쉽게, 기분 내키는 대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그런 식으로 바뀌면 일시적인 유행에 따른 개념화로 과학의 지속적인 진화가 방해를 받는다.
만일 누군가가 말들을 끊임없이 갈아치운다면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잘 모를 것이다."
라고.

 

3. 결정적 승리 - 수줍음이 병이 되다
마릴과 동료 또는 그 외 많은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공황장애 승인 이후 사회 공포증 같은
다른 질환들을 포함시키는 일이 더욱 순조로워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말 '중국집 메뉴판'이란
놀림을 받을 만하다. 그들의 결정적 승리는 사회불안장애의 전 지구적인 현상들을 가져왔고,
몇십 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 연예인들은 자신이 과거에 공황장애 등을 겪어 죽을 만큼
힘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역시 이는 그들이 확실히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4. 소비자를 겨냥하라! 질병을 팔아라!
일상적인 두려움이 장애의 요소로 변모하고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치료법만 등장하면
되는 분위기, 당연히 그들은 약물학과 자유롭게 손잡을 수 있는 대표적인 환경을 만들면 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항우울제 팍실인데, 제약업계의 블록버스터라 불릴 만큼 세계적으로 성공한
팍실의 매출에 대한 이야기는 얼핏 단순한 성공 스토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상 정신건강과
불안에 대한 일반 대중의 생각을 전혀 새롭게 형성할 만큼 사회불안장애를 마케팅의 대상으로
삼아 공격적으로 밀어 붙인 결과였다고 한다.

 

임상실험의 형편없는 결과에도 불구하고 쉽게 복용되던 팍실의 부작용이 실제로 타타났음에도
해당 부분 시장의 독점은 계속됐다고 한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의료제품을 선전하고
변신시키는 콘앤울프의 기술이 워낙 탁월해서였다고 하는데 그들이 어떤 식으로 질병을 팔았는지
광고 사진을 함께 실어 내용을 구체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는?

 

5. 반동성 증후군 - 행복을 약속한 알약, 불행을 낳다
드디어, 뉴욕주 법무국장 엘리엇 스피처가 마침내 04년 6월 팍실의 전력과 관련 중대 정보 은닉에
대한 책임을 물어 글락소스민스클라인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불안 치료'가 말해져야 함이 당연한데, 저자는 다시 프로이트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전과 같아서는 안 됨은 물론이고, 불안 치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6. 약물 만능 사회에 저항하라!
불안 치료제를 주제로 만든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을 소개하는데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불안 치료제를 선택한 그들은 약물학과 정신의학이 일상적인 고통을 덜어 주는 현실적 치료책이
라기보다는 증상들을 더욱 악화시키는 현대사회를 각자의 인물과 상황을 통해 강하게 고발한다.

 

7. 불안 없는 영혼이 더 위험하다
수줍음이 질병이 되었으니 그다음 차례는 과연 무엇이 될까?
바로 무감정.


이러한 배경들을 알 생각도 이유도 없는 해당 전공자들은 지금도 발달이 조금 느리거나
자신의 수업에 지장이 생기게 하는 어린 맑은 영혼에게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잘난 척
떠들어 대고 뒤에서는 그 아이가 지겹다고 말하는 선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의사일 수도 있고, 온통 비윤리와 비양심으로 치장해 놓고
아닌 척 너스레를 떠는 교사일 수도 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다.
무서운 일이다.

 

발견된 오탈자

 

52쪽 9줄: 펼치지 -> 펼치기
101쪽 4줄과 279쪽 밑에서5줄, 280쪽 6줄: 추측컨대 -> 추측건대
202쪽 12줄과 275쪽 4줄: 10명 당 -> 10명당, 5명 당 -> 5명당
234쪽부터 243쪽까지 글락소스미스클라인 뒤에 붙은 조사가 굉장히 많이 틀렸다.
291쪽 6줄: 필요가 ->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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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낮은 언덕들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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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배수아의 새 책이 나왔다.
문체도 내용도 많이 쉬워진 느낌.

 

혼자 하는 맥주를 끊은 후,
좀처럼 먹지 않던 저녁 식사를 하고, 한동안 읽은 책을 정리하는 이 시간.
다시 내일, 다시 아침, 다시 월요일이 오겠지만 난 이 시간 덕에 희망을 산다.
역사, 사회, 우리말 등의 책 사이에서 이런 깊이를 마음으로 알게 해 주는
그런 배수아를 다 읽은 상태여서 더욱 그렇다.
과거 지금 그리고 미래의 모든 그녀에게 절이라도 해야 할 깊은 밤.

 

+++++++++++++++++++++++++++++++++++++++++++++++++++++++++++++++++++++++++++++++++++++++

 

낭송 전문 무대 배우인 경희 위주로 진행되는 내용.
읽는 내내 현재까지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남경희 실장이 떠올랐는데,
이런 우연스런 일치가 신기하기만 했다.

 

몇 년 전 갑작스럽게 헤어져 만나지도 못했던 독일어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 무작정 걸어서 여행을 떠났다는 경희,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받아들이는 우리라는 존재들.
그들에게 낭송 중 자신의 발가락이 부러졌던 경험을 말하는데, 그것은 감정이 육체를 제압하는
훌륭한 표현이 될 듯해서 여기 옮긴다.

 

19쪽~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걸음을 옮기는 도중에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저절로 뚝 하고
부러질 정도로 그렇게 물리적으로 격한 감정이란 것이 과연 존재할까요. 심지어 가장 앞줄에
앉은 관객들에게 그 소리가 들릴 정도였답니다. 뚝! 나는 아픔보다도, 커다란 소리로 인해
낭송이 방해받은 것에 몹시 당황했습니다. 아픔은 정확히 이 초 뒤에야 찾아왔지만 격한
당황스러움은 소리와 매우 동시적이었으니까요. 신발, 아 그것을 잊고 있었군요.
굽이 높거나 앞코가 과장되게 뾰족하거나 그런 신발은 아니었어요. 늘 신는 평범한 펌프스
구두였는데요. 동료 낭송 배우나 극단의 관계자들은 내가 늘 늙은 수녀처럼 굽이 낮고 발등이
넓적한 신발을 신고 다닌다는 생각을 숨기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므로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어요. 너무나 겪하고, 너무나 과잉되고, 너무나 무겁고,
너무나 들뜨고, 너무나 카오틱 하고, 너무나 거슬리고, 너무나 현기증이 나는, 너무나 많은,
너무나 결핍된, 소용돌이치는, 깃털을 잡아 뜯는, 모든 일과 사물에 대해 소리 내어 우는,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극단적인 종류의 감정 속으로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죠. 감정이나 정신의 현기증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추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랍니다. 구체적인 형체와 냄새가 있어요.
심지어 어떤 장소는 그것으로 가득 차 있기까지 하죠. 예를 들자면, 부엌의 두번째 의자에
앉을 때 나는 항상 특정한 감정을 느끼곤 한답니다. 그건 그 감정이 거기 살고 있어서 그런 거죠.
우리는 어느 순간 우연히도 그의 나라로 걸어서 들어간 거예요. 그때 뚝 하는 소리가 나고,
이 초 후에, 아찔한 아픔 때문에 이마에 식은땀이 고이고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을 때,
하지만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서너 걸음 떨어진 의자로 가서 간신히 그 위에 걸터 앉을
수 있었을 때, 나는 알았어요. 오, 나는 나로부터 너무 과도하게 가버렸어.
내 육신은 횃불처럼 타오르는 삶의 신호등이지. 그것이 불이 켜진 거야. 가시오.
이제 나는 계속해서 갈 수밖에 없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답니다.

 

24쪽에서 발가락 깁스를 풀다가 깁스 절단용 톱에 발가락이 절반쯤 톱날에 잘려 나간 경험이
있는 경희가 말하는 병원.

 

이빨이 저절로 악물릴 정도로 지독한 아픔 가운데서, 문득 지금 분명 병원의 침상에 누워 있을
어떤 사람 생각이 났습니다. 병원은 의술이라는 이름의 정신적 육체적 고문을 자행하는 장소라고
그는 예전에 말한 적이 있어요. 그들은 죽음을 단지 의료적인 절차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왜냐하면, 비록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잊은 사실이지만, 병원이란 곳은 원래
도시의 사형수들을 위한 처리 시설에서 출발했으니까.
그의 말에 의하면 도시는 원래 도시의 탈출자나 도시의 침입자에게 도둑과 배반자라는 누명을
씌워 목을 매다는 기능에서 출발한 군사시설이었어요. 그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사형에 필요한 도끼와 밧줄, 오물을 걷어내는 나무통이 많이 필요했으므로
시장과 상거래가 이루어진 거랍니다. 도시는 으스대는 사람들을 위한 고향이에요.
세밀화를 그리는 화가들과 아마추어 해부학자들이 사형수의 몸을 병원으로 실어 갔지요.
인간의 몸 안에는 알려지지 않은 모종의 자동기계가 들어 있으니, 한번 멈추게 된 그것을
다시 작동시킬 방법이 없을지 궁금해하는 취미 공학자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녀의 글이 다시 몸으로 치닫고 있나, 작품 전체를 빙 둘러싸는 것은 온통 몸과 관련한 것들뿐.

 

79쪽, 사람의 귀를 정말이지 쪽! 빨아서 치유하는 치유사가 말하는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의 몸.

 

"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는, 독일어 단어의 성과 반대로, 태양이 남성, 그리고 하늘이 여성으로
묘사된답니다. 움직이는 것은 태양이고 정지한 것은 하늘이며, 하늘의 몸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도 태양이니까요. 아침의 장밋빛 햇살은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존재의 상징이 되는 거죠.
밤은 우리를 꿈으로 몰아가고, 그래서 생명의 기운을 소진시킵니다. 밤새도록 작은 새와
어린 여자아이, 기묘한 난쟁이와 여인의 머리를 한 나비 등으로 모습을 바꾸며 나타나는 정령이
사람을 미혹시키고 덧없는 사랑의 불길에서 허우적대게 만들어요. 이집트 신화에서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태양의 신 '레'가 밤 동안 지하 세계의 강물 위를 조각배를 타고 고요히
여행하는 동안 보게 되는,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어지러운 사물의 그림자이자 환영들인 거죠.
저녁이 되면 하늘의 여신 '누트'는 태양을 삼킵니다. 삼킨다는 건 육신의 내부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러므로 태양은, 낮과 마찬가지로 밤에도 누트의 몸속을 관통하며 여행하는 셈이죠.
누트는 부드러운 만곡을 그리며 대지의 위로 길고 우아한 몸을 구부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사지는 모두 대지에 닿아 있죠. 그것이 동서남북을 가리킵니다.
이집트의 고대 벽화에는 그렇게 지상을 향해 몸을 굽힌 여신 누트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어떤 그림에는 구부린 누트의 하복부 틈새를 향해 불붙은 화살처럼 돌진하는 힘찬 태양이 그려져
있기도 하지요. 밤 동안 지하 명부의 강물을 배 저어 간 태양은 다음 날 아침이면, 자신이
밤새도록 휘저어 갔던 누트의 축축하고 따듯한 아랫배를 떠나, 지상과 하늘의 틈바구니인 그녀의
음부에서 스윽 하고 빠져나오는 겁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그스름하고 사랑스러운
만족감의 광채와 함께 말이죠. 그리고 저녁이 되면 젖꼭지가 그리운 어린 짐승처럼 자신이 나왔던
그 음부를 찾아서 다시금 파고드는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하루하루 떠오르는 태양은 자연이
그려내는 우주적인 관계의 형상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엄마라고 믿고 찾아 갔던 경희에게 '저는 한 번도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답니다'
로 모든 걸 대신한 마지막 부분 때문에,
다음에 옮기는 치유사의 말에는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이 전부 들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는 저자도 모를 일이겠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거나.

 

"모체와 교접하는 형국인 태양은 스스로가 자신의 아버지이자 자식인 셈이죠.
서로에게 조상이자 미래가 되어주는 관계. 우리는 끝없이 되풀이하여 샘솟는 분수에서 태어난
것이고, 영원한 생명의 순환 고리에 매달려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이런 사실을 진심으로 깨닫는 순간, 내 영혼이 번개에 맞은 듯 떨립니다.
개인은 작고 이름 없지만, 누구나 영원의 사막에 발자국을 남기며 끝없이 걷고 있으니까.
난 아침이 좋답니다. 태양이 투명한 하늘과 지평선의 경계를 비집고 솟구쳐 오르는 광경은
언제 봐도 감격스럽지요. 아침이 되어 그 빛 속에 홀로 서면 지난밤 나를 고통하고 고뇌하게
만들었던 온갖 형상적 사물들이 허무하게 바스라지니까요. 우리를 괴롭히던 거짓으로 아름다운
육신들이 영혼 없이 소멸하는 시간이죠. 마력을 잃은 유혹의 몸들은 헛것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껍데기뿐인 그들의 소멸은 당연한 숙명이에요. 그들의 본질은 메아리 없는 죽음,
그 이상의 것은 아니죠.

 

93쪽, 역시 몸. 경희의 귀에 흡착 키스를 해주겠다는 치유사.

 

하나의 태양이 몸이 되었다. 몸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하늘을 향해 길게 너울거리는
섬광의 형태로 나타났다. 발 없는 흰 횃불이었다. 몸은 불의 형체를 지녔다.
몸은 일생 동안 피투성이이며 몸은 신기하다. 몸은 몸이 내버린 것들로 뒤범벅된다.
태양이 제 몸을 태우며 타오른다. 몸은 나에게 속해 있다. 혹은 내가 몸에 속해 있는 것이다.
몸은 열려 있다. 사물과 정신이 몸을 투과하여 흘러간다. 몸은 안긴다.
몸은 따스하므로, 몸은 춥다. 몸은 아픔을 안다. 몸은 배가 부르며, 몸은 운다.
몸에서 뜨끈한 액체가 흘러나오는 것을 피 혹은 오줌이라고 부른다.
몸은 입맞춤과 어루만짐을 당한다. 몸은 몸을 사랑한다. 몸은 기꺼이 잠든다.
잠든 몸은 영혼의 여행자이다. 몸은 꿈을 꾼다. 꿈속에서 몸은 색이 춤추는 것을 본다.
묘사할 수 없는 반짝임이 세계를 이룬다. 나는 이것을 장님의 반짝임이라고 부른다.
눈동자에 와서 맺히는 영롱한 어룽거림들. 그러나 결코 묘사도 기억도 할 수 없는.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무형체의 빛들.

 

118쪽, 반치가 말하는 경희. 그런 존재와 함께 하고 싶다는 갈망이 늘 내게는 있다.

 

나는 네가 이 도시를 네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와 쉽사리 겹쳐서 생각할 수 있는 그 방식이
놀랍고도 두려워. 네가 즐겨 말하는 '동시에' 란 어휘가 두려워. 그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고 무해한 게 아냐. 반복되는 어휘는 어휘 이상의 힘을 갖지.
나는 이렇듯 바람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수없이 많은 별의 어휘를 쏟아놓고 다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사라져버릴 것이 분명한 네가 놀라워. 놀랍고도 두려워.
이 도시에 도착해서 저 도시를 떠날 수 있는 너를 감탄해.
너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이야기를 낭독하는 사람, 그 이야기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여. 너는 구분할 수 없는 우주만큼이나 현기증이 나.
너는 내가 어린 시절에 들었던, 사흘 밤 낮 동안 계속해서 낭독되던 옛날이야기 같아.
네 입은 늘 뭔가를 낭송하듯이 말하는데, 너는 늘 너는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말해지는 것은 너 자체라는 생각이 들어.
변형되고 파생되고 비유되고 한없이 희박해져서 성분이 투명해진 너.
 

271쪽부터 나오는 옥타비오 파스의 에세이집에 인용된 피그미족 매장 노래를 재인용했다는 부분.

녹음장비가 제대로 작동되고 시간이 예전처럼 많았다면 소리내 읽어 녹음해 보고 싶은 내용이다.

 

다음은 발견한 오탈자

 

45쪽 8줄: 들려준다면 -> 들러준다면
101쪽 밑에서7줄: 연결되고 했지 -> 연결되곤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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