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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 ㅣ 후마니타스의 문학
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9월
평점 :
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 보고 선택한 것인데
구입 목록에 왜 넣었는지 잊었을 즈음 이 책을 잡게 되었다.
그곳이 어디건 혁명이 있던 곳에서,
윗선들끼리는 서로 알게 모르게 갖고 있었을 그런 갈등이 가득한 책.
각 심문 시작 전마다 누군가의 격언과 루바쇼프의 일기가 차례로 들어가는데
제한된 공간에서 별다른 묘사 없이 이루어진 문체가 특별하다.
어디에든 있었을
넘버원,
루바쇼프, 이바노프.
그리고 글레트킨.
<첫 번째 심문>
'이바노프의 제의'
영웅 노릇을 그만 두면 곧 사면이 될 진술서를 쓰자는 제의를 거절하는 루바쇼프.
<두 번째 심문>
'궁극적 진리는 끝에서 두 번째 지점에서는 언제나 거짓이다.
결국 옳다고 입증될 사람은 그 전에는 틀린 것으로, 그리고 해로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누가 옳은 것으로 입증될 것인가? 그건 단지 나중에야 알려지리라.
그동안 그는 역사가 사면해 주리라는 희망으로, 반드시 외상으로 행동하면서
악마에게 자기 영혼을 팔도록 되어 있다.
넘버원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항상 침대 옆에 놓아둔다고 한다.
그 시대 이후 정치적 윤리의 지배에 대한 정말 중요한 것은 언급된 적이 없다.
페어플레이라는 19세기의 자유주의적 윤리를 20세기의 혁명적 윤리로 바꾼 사람은
우리가 처음이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옳았다. 크리켓처럼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혁명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역사가 휴식하는 동안 정치는 상대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
그러나 위태로운 전환기에는 오래된 법칙(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법칙)외에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
우린 이번 세기에 신마키아벨리즘을 도입했다. 다른 사람들, 즉 반혁명적 독재 정권은
그것을 서투르게 모방했다. 우리는 보편적 이성의 이름을 내건 신마키아벨리주의자였고,
그것이 우리의 위대성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민족적 낭만주의의 이름을 내건
신마키아벨리주의자였는데, 그것은 그들의 시대착오였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에 의해 결국 용서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안 될 것이다....'
위와 같은 루바쇼프의 말을 유명 기자가 사실적으로 현장화한 것이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라고 해도 될는지.
아주 우연히 이 책 다음으로 잡은 책이 연관이 있는 듯해 신기할 따름.
어쩌면 정일의 독서일기에서 본 내용일지도 모르지만 별다른 메모를 해 놓지 않은 상태에서
관련이 있을 것만 같은 두 권의 작품을 매달아 읽는다는 것은 남모를 기쁨마저 선사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는지 모를는지.
'이 세상을 감정을 풀기 위한 어떤 형이상학적 사창굴로 여겨선 안 된다는 것일세.
이게 우리의 첫 계율이야. 동정, 양심, 역겨움, 절망, 후회 그리고 속죄는 우리에게
혐오스러운 방탕거리일 뿐이지. 주저앉아 스스로 최면에 빠져들어 목덜미를 글레트킨
총 앞에 공손히 내놓는 건 쉬운 해결책이야. 우리 같은 사람에게 가장 큰 유혹은
폭력을 단념하고, 참회하며 자신과 화해하는 일이네. 스파르타쿠스에서 당통과
도스토옙스키에 이르기까지 가장 위대한 혁명가들도 이 유혹 앞에서 무너졌어.
그것이 바로 대의명분을 저버리는 고전적 형태의 배반이지.
신의 유혹은 늘 사탄의 유혹보다 인류에게 더 위험했네. 혼란이 세상을 지배하는 한
신은 하나의 시대착오네. 그리고 자기 양심과의 모든 타협은 배반이지.
저주받은 내면의 목소리가 자네에게 말을 건다면, 귀를 막아 버리게....'
위와 같이 말하는 이바노프.
진정한 유혹에 빠져 보지 않았다면 저런 말을 할 수 없었을 테지.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저런 도취를 피해야 하는 걸까?
무엇이 달라 저런 것을 가지고 태어나는 걸까?
이바노프의 재설득.
루바쇼프는 목숨을 택한 듯하다.
생명을 핑계로 한 합의 같은 것.
<세 번째 심문>
이바노프가 감금되다.
책을 보다가 글레트킨과 이바노프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메모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과 같은 비교를 해 놓는 저자.
육중하고 무표정하게, 글레트킨이 거기 앉아 있었다.
많은 루바쇼프와 많은 이바노프 덕분에 존재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잔인한 국가의 구현체인 그가.
글레트킨은 자신이 이바노프와 구세대 지식인의 정신적 상속자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는가?
글레트킨과 새 네안데르탈인들은 머리에 번호 적힌 세대의 과업을 완결했을 뿐이라고
루바쇼프는 수백 번 홀로 되풀이했다. 동일한 원칙이 그들 입으로 말해질 때 그리도
비인간적으로 변하는 것은 순전히 시대 풍조 때문이었다.
이바노프가 똑같은 주장을 할 때 그의 목소리에는 사라져 버린 세계를 잊지 않음으로써
과거에 남겨진 희미한 빛깔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사람은 자기의 어린 시절을 부정할 수는 있어도 그걸 지울 수는 없다.
이바노프는 최후까지 자신의 과거를 질질 끌고 다녔다.
그래서 그가 하는 무슨 말에나 장난기 어린 우수의 빛이 서려 있었다.
글레트킨이 그를 보고 냉소주의자라고 부른 이유는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글레트킨의 무리엔 지워야 할 어떤 것도 없었다.
그들은 어떤 과거도 안 가졌기 때문에 과거를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탯줄도 없이, 경쾌함도 없이, 우울도 없이 태어났다.
다음과 같은 루바쇼프의 말은 이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그리고 또...계속 들어맞는
어떤 틀과 같은 것이 아닐까.
무대를 떠나고 있는 우리가 무슨 권리로 우월감을 가진 채 글레트킨을 내려다보고 있는가?
네안데르탈인이 지구상에 처음 나타났을 때 원숭이들 사이에는 틀림없이 웃음이 있었을 것이다.
고도로 문명화된 원숭이들은 가지에서 가지로 우아하게 옮겨 다녔지만,
네안데르탈인은 거칠게 땅에 매여 지냈다.
평화롭고 포만감에 찬 원숭이들은 정교한 놀이를 하거나 철학적 명상 속에서 벼룩을 잡았다.
네안데르탈인은 곤봉으로 이리저리 치면서 세계를 짓밟고 다녔다.
원숭이들은 나무 꼭대기에서 즐거운 듯 그를 바라보다 호두를 집어 던졌다.
때때로 원숭이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원숭이들은 우아하고 세련되게 과일과 부드러운
식물을 먹었지만, 네안데르탈인은 날고기를 먹어 치우고 동물들과 자기 동료들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그는 늘 서 있는 나무들을 베어 내고,
바위들을 시간 숭배의 장소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겼으며, 정글의 모든 법칙과 전통을 위반했다.
그는 동물적 품위 없이 거칠고 잔혹했다.
고도로 문명화된 원숭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역사의 야만적 퇴보였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침팬지들은 인간을 보면 아직도 콧방귀를 뀐다....
<문법적 허구>
모든 혁명은 문법적 허구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