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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강호 1~8 세트 - 전8권
김용 지음, 전정은 옮김 / 김영사 / 2018년 11월
평점 :
김영사에서 신필(神筆) 김용 작가의 <소오강호> 정식 완역본을 출간했다. 이른바 사조삼부곡이라 불리는 <사조영웅전>, <신조협려>,<의천도룡기>을 완역한 출판사라 출간 전부터 입소문을 탔다. 일반적으로 무협 소설은 순수 문학에 비하여 작품성이 평가 절하된다. 그러나 작가의 소설은 김학(金學)이란 학문이 있을 만큼 이미 문학적 연구 대상으로 자리잡았고, 중국 교과서에 작품이 수록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팬층이 두텁다. 하지만 번역본 선택지가 부족한데다 정식 완역본이 없어서 불만이 컸는데, 이번에 해갈할 수 있게 되었다.
소오강호(笑傲江湖), 쉽게 말하면 "강호를 비웃다'이고, 넓게는 "얽매이지 않고 즐겁고 자유롭게 강호에 사는 것"(8권, p.380)이란 뜻이다. 무협 소설이면서 주 무대인 강호를 비웃는다는 제목이 역설적이다. 한국에도 익숙한 작품인데, 무협 독자나 중국 문화 연구인에게 유명한 소설이고, 제목을 몰라도 임청하 주연의 영화 <동방불패> 등 많은 매체에서 알게 모르게 접한 덕분이다.
<소오강호>는 정파, 사파 간의 혼란스러운 다툼 속에서 주인공 영호충이 무림의 평화를 지키는 이야기다. 소설은 단순한 무협지 영웅담으로 끝나지 않는다. 진가는 강호를 배경으로 현실의 인간 군상을 드러내는 데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수단은 무공이 아니라 음험한 계략과 무시무시한 함정"(2권,p.288)이듯이, 인물들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벌이는 위선과 간계, 암투를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주인공의 영웅담이 더욱 통쾌하다.
영호충도 다른 무협 주인공처럼 절세 무공을 익힌다. 바로 독고구검이다. 독고구검은 무초승유초가 요결인데, 초식이 없는 검법으로 초식이 있는 검법을 파해한다는 뜻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검법도 초식을 깨면 검법이 무너진다. 하지만 애초에 초식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검법을 파해하기 위한 초식을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이 무초승유초의 원리이다. 작중 인물들의 군상에 비유해보자면, 초식이 허례허식과 위선, 공명심인 반면 무초식은 그에 맞서 인간 본연이 가진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노력이다. 빠르고 매섭게 세상의 위선과 모순을 찌르고 파헤친다. 스토리와 검법은 이렇게 맞물린다.
작가가 <소오강호>를 집필할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이 한창이었다. 강청을 비롯한 사인방이 득세하여 홍위병을 선동했고, 하루아침에 많은 인사들이 숙청되었다. 비록 반환 전이었지만 작가가 살던 홍콩도 세파를 피할 순 없었고, 시대상은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강호를 비웃다'라는 제목으로, 야만적인 시대를 강호에 투영했다. 자유로운 성격을 가진 영호충과 무학을 앞세워 권력을 향한 위선과 탐욕을 무찔렀고 대리만족을 시켜주었다. 시리즈 8권 "저자 후기"나 특별 부록 <자유로운 강호를 꿈꾸며>를 참고하길 바란다. 이미 내용을 꿰고 있는 독자라면 먼저 특별 부록 해설집 읽기를 추천해 본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깊이 있게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출간 소식을 듣고 무엇보다 번역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이른바 김용 마니아 중엔 절판된 <영웅문> 시리즈나, 특히 <소오강호>의 해적판 <아! 만리성>, <동방불패>와 같은 예전 해적판을 소장하기 위해 웃돈을 지불한다. 이유는 첫째, 김용 팬으로서 비록 해적판이지만 옛 판본에 대한 추억이 있고, 둘째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판본과는 다른 번역의 맛이 있다고 해서다. 실제로 해적판 번역을 더 쳐주는 독자도 있다.
다행히 김영사판 <소오강호>무협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번역이 매끄럽고, 무협 번역의 고질적 문제인 무협지의 맛과 한글세대의 구미를 동시에 잘 갈무리했다는 평가다. 작중 일상 언어는 상황과 맥락에 알맞도록 한글체로 윤문해서 쉽게 읽히지만 어색하지 않다. <자유로운 강호를 꿈꾸며>라는 특별 부록 해설집을 보면 전정은 번역가가 작품에 얼마나 애정을 갖고 임했는지 알 수 있다. 김용 작가가 작품의 오류를 수정한 세 번째 신수판을 원전으로 삼았고, 매끄러운 한글 번역, 나아가 등장 인물의 지역 방언투까지 살리려 했다. 앞서 밝혔듯 김용 마니아에게 특별 부록을 먼저 읽기를 권하는 이유 중 하나다.
또 하나 팬으로서 설렌 점은 책 뒤에 사조삼부곡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소개와 함께 '천룡팔부(근간)', '녹정기(근간)'이 찍혀 있다는 것이다. <천룡팔부>와 <녹정기> 또한 작가가 남긴 필생의 역작으로 꼽힌다. 중국 교과서에 실린 작품이 바로 <천룡팔부>다. 위작과 해적판이 판치는 한국에서 꾸준히 정식 판본을 번역해 주는 김영사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김용 작가는 2018년 올해 10월 30일 타계했다. 무협지계뿐 아니라 문학계의 큰 별이 졌다. 많은 국내 팬들이 상심하던 차에 이번 <소오강호> 출간되어 더욱 의미가 깊다. 그가 남긴 작품들 앞 글자를 따서 만든 한문 대구, "비설연천사백록飛雪連天射白鹿, 소서신협의벽원笑書神俠倚碧鴛 - 휘몰아치는 눈 하늘 가득 흰 사슴을 쏘고, 글 비웃는 신비한 협객 푸른 원앙에 기대네"(1권, p.11, 저자 서문)이 가슴에 사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