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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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분에 250명의 아기가 이 지구상에 새로이 태어나는데, 그중 197명이 이른바 제3세계라 불리는 122개 나라에서 태어난단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가 곧 이런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에 묻히는 운명을 맞는 거야. / 프랑스의 철학자 레지 드브레는 이들을 가리켜 "나면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힌 아이들"이라고 표현했어.(,p.79~80)

기아와 관련된 언론 매체의 기사, 프로그램을 보면서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론 안도했다. 굶주림은 아프리카 등 일부 빈민국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막연한 동정심에 기부를 하며 안도를 했다. 적어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기 전까지 만성적인 기아가 이렇게 전세계에 만연한 문제였고, 희생자 수가 심각한지 깨닫지 못했다.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 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에 1명꼴이다. 그리고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 기아에 희생당하는 사람이 2000년 이후 1,200만 명이나 증가한 것이다.(p.32)

 

10여 년이 지난 일이니 많이 개선되었을까. 만성 영양실조 인구가 "2015년 유엔 기아보거서에 의하면 기아 인구는 7억 9,500만 명으로 다소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세계 식량수급의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1990년에 8억 2,200만 명이었던 수치가 2005년에 도리어 증가했던 전례를 볼 때, 이러한 수치는 유동적일 뿐이라는 절망적인 추정을 하게 만든다.

식량 생산량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다. 이미 세계 식량생산량은 이미 1984년 기준 120억 명을 먹여살릴 수 있는 자급력이 충분했다. 2015년 세계 인구가 73억 명이니 식량은 넉넉하다. 19세기 토마스 멜서스의 '자연도태' 관점으로 죄책감을 씻을 명분이 없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는 이러한 구조적 부조리를 파헤쳤고, 장기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이번에 최근의 자료와 수치들을 업데이트하여 개정증보판이 발행되었다.

 

책은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십년 가까이 근무한 저자 장 지글러가 아들 카림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철저하게 자녀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른도 알지 못했던 전세계 사회구조적인 문제들이 드러난다. 특히 제3세계 빈곤과 기아가 단순히 그들의 무능력이나 나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반문했을 것이다. 왜 전세계적으로 식량은 남아도는데 몇 억 인구가 굶주릴까. 많은 구호단체들이 꾸준히 활동하지만 기아가 없어지지 않을까. 선진국들이 빈곤 국가에 지원과 기부를 하는데도 해결되지 않을까.  안타깝지만 이러한 질문들이 얼마나 순진했던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각종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구호단체들의 활동이 제약되고 심지어 구호물품이 독재자들과 군벌들의 뱃속을 채우는 현실, 그럼에도 한 명의 아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구호활동을 멈출 수 없는 딜레마. 예산과 물자가 부족해 눈 앞에 죽어가는 아이들의 구호 요청을 선별하고 돌려보내야 하는 사정이 절절했다.

 

기아를 유발하는 선진국들의 이면에 경악했다. 인도적 얼굴을 하고 빈곤국에 각종 기부와 지원을 하는 반면, 한편으론 구조적인 기아를 고착화시켰다. 농산물 보조금을 통해 덤핑 가격으로 제3세계에 수출하여 빈곤국의 식량 자립을 막아버리고, 육류와 식물  연료 생산에 사용되는 막대한 곡물량은 기아를 해소하는 데 일조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심지어 경제적 종속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정치적 개입까지 서슴지 않았다. 예컨대, 칠레 인민전선의 아옌대, 부르키나파소의 상카라 제3세계 혁명적 지도자들은 자국의 빈곤과 기아에 맞서 싸웠지만, 다국적 기업과 미국, 프랑스 등 강대국들의 정치, 경제 논리에 무참히 스러져갔다. 책은 안타까운 그들의 혁명사까지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도 단순히 빈곤국들이 문제 해결 의지가 없다고 단언하며 비난할 수 있을까. 결국 강대국은 인도적 가면을 쓰고 자국의 이익을 앞세웠던 것이다.

 

무엇보다 식량을 일종의 투자 대상으로 보는 금융과두제, 신자유주의적 행태가 화근이었다. 시카고 거래소에서 식량 투기가 이루어지고, 빈곤국들은 울며겨자먹기로 가격에 따른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안에는 최소한 도덕적 공감력이 전제되어 있었지만, 금융자본이 조장한 식량 경매 가격은 일말의 온정조차 담지하지 않는다. 또한 네슬레를 비롯한 다국적 식품 기업들은 이미 선진국도 함부로 규제하기 힘든 거대 공룡들이다. 거래소의 투기 세력과 다국적 기업의 이익 앞에서 제3세계 국가들의 무력함은 기아로 나타난다.

 

몇 달러치의 항생제와 영양분 부족으로 빈곤국 아이들이 시력을 잃고 굶어 죽는 이면에는 구조적인 부조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단순히 먼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도 불과 몇 십년 전까지 만성적 기아와 빈곤을 겪었고, 현재 북한 인구 대다수가 시달리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기조에 대한 반성이 일었다. 단순히 경제적 인식에서 벗어나 금융과두제가 양산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각성하는 것은 어떨까. 특히 기아와 관련해서 말이다. 이제는 막연한 동정이 아닌 구체적 현실을 직시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학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기아 문제를 얇은 한 권의 책이 일깨워주고 있다. 그 힘이 놀라울 따름이다. 계속 개정판이 발매되길 바란다. 바뀐 수치들을 확인하며 기아 문제가 얼마나 개선되었는지 한 눈에 알수 있도록, 나아가 끊임없이 문제를 환기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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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상처받는 나를 위한 심리학 - 마음속 상처를 자신감과 행복으로 바꾸는 20가지 방법
커커 지음, 채경훈 옮김 / 예문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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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내가 왜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왜 속마음과는 반대로 말하는지, 왜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마음이 우울한지, 왜 계속 남들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어 하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이 책은 프로이트가 제시한 심리 방어기제들을 통해 그동안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 상태와 행동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p.7)

 

심리 방어기제란, 마음의 상처나 불안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거나 회피하기 위한 일종의 무의식적 행동으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도입한 개념이다. 그의 성격구조론에 따르면, 인간의 인격은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로 나뉜다. 원초아는 쾌락원칙을 따르고 초자아는 이상향, 도덕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서로가 충돌한다. 이를 현실원칙의 자아가 중재하는데, 원초아의 충동과 욕망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불안이 발생하고,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방어기제를 발동한다.

 

인간은 심리적 상처나 불안을 있는 그대로 견디기 어렵다. 욕망은 무한하지만 사회적 규칙과 도덕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 항상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적당한 방어기제는 마음의 불안, 상처와 결핍으로부터 평정을 갖게 하여 정신 건강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심각할 경우 심리적 현실을 왜곡하여 성숙을 방해하고,  나와 남에게 피해를 입힌다. <항상 상처받는 나를 위한 심리학>은 이러한 무의식적 방어기제를 탐구하여 내 안에 감춰진 마음의 상처나 불안을 성찰하고, 보다 원숙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불안과 상처가 천차만별이듯 방어기제 또한 다양하다. 과거의 상처가 주는 무의식적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제들(PART 1. 나는 왜 과거의 상처를 잊지 못하는가), 욕망을 실현하지 못한 불만족에 대한 기제들(PART 2. 나는 왜 갖지 못하는 것을 사랑하는가), 대인관계에서 나와 남에게 상처를 주는 기제들(PART 3. 나는 왜 사람을 깊이 사귀지 못하는가), 불안정한 자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타인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는 기제들(PART 4. 나는 왜 항상 남의 말에 흔들리는가), 심리적 상처와 불안에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PART 5.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을 소개한다. 책이 말하는 "20일 간의 심리학 여행" 은 이러한 20가지의 종류별 심리기제를 알아가면서 나를 성찰하고 남을 이해하는 시간이다. 

 

과거의 아픈 상처는 나를 괴롭힌다.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시험에 빠뜨린다. 사소한 계기로 옛 상처가 떠오르고, 영문 모를 죄책감, 불안감이 엄습한다. 더러는 그러한 감정을 '격리'하고, '부정'하며, '회피'한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심리적 문제를 악화시키고 강박적 행동까지 유발한다면, 혹은 복수심에 대한 죄책감으로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무기력한 자신이 바보같다면, 쉽게 남을 믿고 타인의 이목과 의견에 휘둘리는 모습이 안타깝다면, 누군가가 왜 저렇게 거짓말로 사람을 기만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라면, 오히려 심리 방어기제가 삶을 망치는 것이다. 

 

예컨대, 한 중년 여성은 심리상담 전문가인 저자를 찾아와 남편이 내심 이혼하고 싶어한다며 걱정했다. 그러나 상담 결과 그녀는 미혼인 또래 여성 동료가 자유롭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부러움을 느꼈고, 도리어 남편에게 자기 욕망을 '투사'했음을 깨달았다.  스스로가 남편의 사소한 무관심, 행동을 이혼을 향한 갈망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그녀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인 후 남편에게 털어놓았고, 대화를 통해 더욱 안정적인 부부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듯 내가 어떤 방어기제를 주로 사용하며, 그 기저에는 어떤 심리와 불안이 도사리고 있는지 안다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나아가 남이 어떠한 방어기제를 활용하는지 이해한다면, 마치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라'는 격언처럼 그 사람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휘둘리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할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방어기제를 이해하고 내 마음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시간을 통해 보다 자연스럽게 마음 속 상처와 불안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럼 그동안 무조건 지우고만 싶었던 상처 속에 자신감과 행복의 가능성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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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 없애고 열 내려야 병이 없다 - 알게 모르게 쌓여 만병을 부르는 습열
쿵판시앙 지음, 정주은 옮김, 오수석 감수 / 비타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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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피로가 문제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개운하기는커녕 눅눅한 솜뭉치마냥 몸이 무겁다. 월요일은 재앙이다. 출근길은 붐비고 부랴부랴 도착하면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쉰다. 커피 카페인에 의지하여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또 반복. 규칙적인 생활, 음주를 삼가고 자연식 섭취하기, 스트레스 줄이기. 말은 쉽다. 현실은 피부 트러블이 번지고 구취가 걱정스럽다. 진료를 받지만 딱히 구체적인 병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습열을 의심해 보면 어떨까.

우리나라 인구 중 다수가 한의학상 태음인 체질이라고 자주 방송에 소개되는데, 특성상 습하고 신진대사 적체가 일어나기 쉽다. 몸 안에 열과 습이 엉켜서 뭉치면 습열이 되어 독으로 작용하니, 특히 한국인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개인적으로 심각한 단계는 아니지만,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설태가 자주 끼어서 고민하다가 평소 습열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중 <습 없애고 열 내려야 병이 없다>를 찾았다. 책은 한의학 병증 중에서도 습열을 본격적으로 다루는데, 습열증의 증상에서부터 오장육부별로 습열이 정체되는 원인과 병증, 해소법을 담았다. 말미에는 사계절 건강법을 첨부하였다.

습열의 증상은 다양하다. 만성피로, "간밤에 한숨도 못잔 것처럼 온몸이 뻐근"하고, "물에 젖은 솜옷을 입은" 느낌이다. 속이 더부룩하고 묽고 끈적한 변이 나온다. 입 안에 설태가 끼고 입김이 축축하며 냄새가 심하다. 눈이 누렇고 눈꼽이 많이 낀다. 피부가 황색이고 부종이나 부스럼이 나며, 유분과 여드름이 과하다. 나아가 배뇨가 시원찮고 원할하지 않다면 습열을 의심해 봐야 한다. (p.15~36) 피로감뿐 아니라 신체의 미관을 해쳐서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오장육부 대사에 장애를 일으키는 것이다. 

현대인의 문젯거리인 비만도 빼놓을 수 없다. 습열성 비만인은 열심히 트레이닝과 식단 조절을 하고 싶지만,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서 피로감이 심하고 신체적 증상까지 겹친다. 장사가 없다. 몸이 자꾸 가라앉고 의욕이 없다. 치료자도 비장과 위장을 보하면서 습열을 없애고 지방을 제거해야 하니 무척 까다롭다고 한다. 막연히 내가 게으르다고 자책하기보다는 습열성 비만인지 의심해 보고, 병증을 제대로 알고 대처한다면 다이어트가 한결 수월하다.

습열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대체적으로 비장과 위장에서 엉키기 시작하여 각종 장기에 영향을 미친다. 하초에서 발병할 때도 있기 때문에 습열을 방지하려면 비위와 신장에 신경을 써야 한다. 습도가 지나치게 눅눅하거나 건조하면 폐에 습열이 침범하기 쉽다. 방광은 비교적 나중에 영향을 받는데, 각종 습열 증상과 함께 배뇨까지 문제가 생긴다면 심각한 단계다.


책은 습열을 다스리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비용이 만만찮은 한약재나 어려운 방법보다 평상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건강법을 지향한다. 각종 차와 죽, 찜과 같은 약선 요리를 소개하고, 그 중에서 팥과 율무는 습열증에 특효약이다. 시중에서 구하기 용이한 재료를 가지고 책 레시피대로 간단히 밥이나 죽을 만들어도 좋다. 각종 경락도와 함께 장부별 건강 마사지법을 설명하는데 시간이 많이 들지 않으면서 따라하기 좋다. 오장육부별로 유용한 다섯 가지 기공법 후, 시, 쓰, 커, 쉬자공은 아침이나 여유 시간 짬짜미 수련하기를 권한다. 장기별로 진동하는 음역대의 소리를 내면서 호흡을 조절하는 양생법이다.

중의학 내과 전문의인 저자 쿵판시앙은 임상경험으로 습열이 삶의 질에 악영향을 미치고 각종 질환을 유발하는 것을 자주 접했다. 환자들은 단순히 신경성 증상으로 오인하고 습열을 방치하다 고혈압, 당뇨, 비만 등 큰 병을 초래하기도 했다. 습열이 만병의 근원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번쯤 의심해보고 예방할 만하다. <습 없애고 열 내려야 병이 없다>로 습열 진단과 건강 상식을 배우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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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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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오베라는 남자>의 작가 프레드릭 베크만의 신작,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가 출간되었다. 전작은 영화화되어 5월 중순에 개봉 예정이라니, 자신의 SNS에 소설을 연재하던 블로거가 일약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로 우뚝 섰다. 시작은 미미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는 격언이 떠오른다. 그의 가열찬 작가 행보는 어디까지일지 독자로서도 궁금해진다.


 

<오베라는 남자>가 고전 명작의 반열을 장식할 만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유머와 감동을 독자에게 선사했던 것처럼,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도 마찬가지의 매력이 있었다. 전작의 주인공 오베는 개성을 넘어 진상끼가 느껴지던 할아버지였고, 그런 오베의 일상이 주된 스토리었다. 이번 작품은 단순히 한 주인공만이 아닌, 소설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 입주민들 각각이 저마다 개성으로 똘똘 뭉쳤다.

 

특히 7살 주인공 엘사의 할머니는 단연 압권이다. 여성판 오베라고 할까. 전직 외과의사로 종군 의료봉사를 했던 "할머니는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데 별 재주가 없다. 규칙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모노폴리 게임을 할 때 속임수를 쓰고, 르노 승용차로 버스 전용 차로를 달리며, 이케아에 가면 노란색 쇼핑백을 슬쩍하고, 공항에서 수화물을 찾을 땐 안전선 밖으로 나와 서 있지 않는다. 볼일을 볼 땐 화장실 문을 닫지 않는다."(p.29) 딸의 재혼남을 '찐따"라고 부르는 객기. 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분쟁을 일으키는 싸움꾼이다.

 

하지만 7살 엘사에겐 학교 왕따인 자기를 대신에 교장에게 지구본을 던질 줄 아는 히어로였고, 미아마스, 깰락말락나라를 비롯한 여섯 왕국 판타지세계 이야기를 전해 주는 입담꾼이었다. 엘사는 엄연히 미아마스 왕국의 작위를 받은 기사였다. 그러나 갑작스레 암으로 돌아가신 할머니. 소설은 본격적으로 감동적인 시트콤 엔진의 엑셀을 밟는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엘사에게 보물찾기 유언을 남긴다. 그리고 엘사는 수수께끼를 풀어서 할머니의 편지를 이웃에게 전해주기 시작한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라고. 비로소 엘사는 깨닫는다. 수수께끼 판타지 인물들은 다름 아닌 편지를 받는 이웃들이었다. 그들은 미아마스 왕국의 울프하트였으며, 깰락말락나라의 바다천사였다. 저마다의 아픔을 간직한 채 할머니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과연 엘사의 여정은 어떻게 마무리되고 마지막 편지는 누구에게 전달될까. 감동은 독자들의 몫이다.

 

미아마스 기사 엘사의 무용담은 이웃 간의 이야기를 넘어, 할머니, 엄마, 엘사 모녀 3대의 화해를 담고 있다. 전쟁터에서 의료봉사를 하며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았던 할머니, 그로 인해 엄마는 성장기에 할머니의 부재를 감내해야 했고 완벽주의자로 컸다. 7살에 맞지 않게 맹랑해서 밉살스럽기까지 한 엘사. 때문에 학교에서 극심한 왕따를 당한다. 엘사의 여정 속에서 세 모녀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스웨덴뿐 아니라 한국적인 정서까지 담겨 있었다. 아마 전세계적인 공통감각일 것이다.

 

개성 넘치는 인물들의 감동 시트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오히려 <오베라는 남자>보다 영화화되기 안성맞춤이었다. 수수께끼같은 할머니의 보물 찾기 지령, 아픔을 간직한 이웃들과의 인연으로 만들어진 판타지 왕국 이야기, 영화 <조이럭클럽>처럼 엄마와 딸 사이의 갈등과 화해까지. 무료하고 팍팍한 일상을 감동 시트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로 힐링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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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 처음 만나는 에티카의 감정 수업
심강현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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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를 안 들어본 사람은 드물다. 진위여부 논란은 있지만, 자주 회자되는 명언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남긴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러나 막상 그의 철학은 난해하기로 정평이 났고, '능산적 자연', '소산적 자연' 같은 개념만 학창시절 윤리 수업에서 수박 겉핧기로 짚고 넘어갔다. 대표작 <에티카>는 스피노자가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윤리학" 이라 할만큼 수학 논증식 정리와 증명의 연속이다.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은 이러한 스피노자 철학을 에세이 형식으로 풀었다. 저자 심강현씨는 의사로, 의대 재학 시절 유독 정신분석학, 심리학 강의에 심취했고, 철학, 역사와 같은 인문학까지 관심을 넓혔다. 지금은 의료와 인문, 철학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책은 문학적인 문장으로 스피노자 철학을 물 흐르듯 전개한다. 철학 원전의 해설서는 외려 원작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우를 종종 범하는데, 마치 저자가 철학을 충분히 음미하고 내적으로 숙성시킨 것처럼 쉽고 아늑하다.

하룻밤에 다 읽었다. 철학이 따뜻한 힐링과 용기를 북돋을 줄 몰랐다. ​고단한 삶 속에서 후회와 자기 연민에 휩싸이기도 하고, 때로는 미움과 슬픔으로 아파한다. 스피노자는 독자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려놓으세요. 당신 어깨의 짐을. 그것으로 이제 되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힘들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일 뿐이니까요." (p.23)라고. 어려운 철학 속에는 다정한 위안이 들어 있었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욕망과 다양한 감정을 다룬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무의식적인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다. 월요일 아침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길에 오르는 것은 쉬고 싶은 마음보다 경제적 안정에 대한 욕망이 컸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이미 무의식적 욕망에 의해 정해져 있으며, 그의 세상에서 자유의지란 허상에 불과하다. 이러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능력이 '역량'인데, 그때 그때 사람의 욕망과 역량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 잘못했던 당시로 돌아간들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세상은 이러한 필연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우연은 없다. 그러니 후회하고 자책한들 무엇하리!

 

스피노자는 자기연민보다 역량 기르기를 권한다. 사람의 근본적인 욕망은 '코나투스', 즉 자기보존의 욕구, 삶에 대한 욕구다. 욕망이 충족될수록 기쁨을 누리기에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다면 역량의 기준이 무엇일까. 바로 이성이다. 스피노자에게 이성은 욕망의 우위에 있거나 그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크고 나은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조력자이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사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더 넓은 안목을 가질수록 욕망의 크기와 질 또한 높아진다.

 

욕망이 충족될수록 기쁨을 누리듯, 감정은 욕망의 표현이다. 스피노자는 사랑부터 시작하여 증오, 무관심까지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이야기한다. 슬픔, 자기연민, 교만 혹은 경쟁심, 질투 등 그가 설명하는 감정의 연원과 이유들이 단순히 피상적인 철학을 넘어 하나하나 납득이 되고 깨달음을 주었다. 특히, 기쁨과 사랑을 북돋아주는 관계를 '결합관계'. 슬픔을 주는 관계를 '해체관계'로 인식했는데, 전자는 코나투스를 늘리고 후자는 감소하기 때문이다. 선과 악은 정해져 있지 않고,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은 누군가에겐 착하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해체관계를 맺었을 수 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겐 선하지만 더러는 슬픔을 준다. 이러한 관계의 성찰은 독자에게 반성과 관용의 메시지를 내민다.

 

스피노자는 근본적인 감정을 사랑이라고 보았다. 미움과 슬픔은 사랑의 눈금에서 멀어진 감정일 뿐이다. 철학을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phy)으로 정의하듯, 무언가를 이해하는 행위의 밑바탕에도 사랑이 깔려 있다. 그에게 이성과 사랑은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단순히 세상의 편견과 수동적인 정념이 주는 '혼란된 생각'을 넘어, 필연적 인과관계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교감, 공감하는 '공통 개념'을 가능케 하는 것도 사랑이란 감정 덕분이다. 나아가 공통감각이란 단계적인 이성 인식에서 우주와 신(인격신이 아닌 능산적 자연)에 대한 지적 사랑까지 도달하는 '직관지'도 사랑과 다르지 않다.

 

스피노자 철학은 기하학적 외피 안에 사랑, 공감, 자유를 담고 있었다. 그에게 사랑, 공감, 자유는 서로 다른 이름이 아니었다.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은 이렇듯 딱딱한 껍질 속에 숨겨진 따뜻한 치유의 과실을 독자에게 맛보인다. 종교적 파문을 당하고 평생 광학 렌즈를 깎으며 힘든 삶을 살다 간 철학자의 정밀하고도 긍정적인 메시지로 힐링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는 자신과 같이 어려운 경에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말할 것이다. 후회와 자기연민의 시간을 넘어, 타인의 편견과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삶의 주인된 능동적인 기쁨을 누려보라고. 오히려 사랑, 관용과 용서의 마음가짐이 생기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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