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서스 - 석기시대부터 AI까지, 정보 네트워크로 보는 인류 역사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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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이 지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세계는 지금 AI에 대한 희망과 공포로 들끓고 있다. 낙관론자들은 AI가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 줄 거라고 믿고 비관론자는 총을 든 안드로이드가 인간을 살육하거나 자아를 얻은 초지능이 우리 종을 지배하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미래를 알든 모르든, 우리가 그 미래를 만드는 주체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낙관론부터 시작해 보자. 낙관론자들은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 세상이 더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AI봇들이 많아질수록 '옳은' 뉴스를 만들어내는 AI들도 많아질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인간의 오해와 편견은 모두 정보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옳은 정보를 얻고 나면 어떻게 그른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유튜브에 넘쳐나는 극우 사상들과, 미국의 큐어넌(QAnon) 같은 커뮤니티, 그리고 이들을 열렬히 지지하는 수많은 팬들을 보면 낙관론자들의 주장이 지나치게 낙천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이들은 아마 강력한 AI를 만드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학습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히 판단하는 AI가 등장하면, 애초에 이런 정보들이 세상에 유통되지 않도록 강력히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현실은 아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여전히 무엇이 '옳은가'를 어떻게 판단하냐는 문제가 남는다. 성경을 학습한 AI는 아마 노예를 소유하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사람들 중에는 절실한 기독교인들도 있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과, 유대인을 샤워실에 몰아넣어 죽음의 가스를 살포하라는 명령 사이에서 그들은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었을까?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유대인은 이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조차 아니었다.


이제 비관론을 얘기해 보자. 그들은 정보가 곧 진실이고 진실이 지혜와 힘이라는 사실을 순진한 발상이라 일축한다. 지혜까지는 모르겠지만 힘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비관론자들은 20세기 중반부터 반세기 가깝게 이어온 냉전을 사례로 들며 정보가 힘이라는 사실을 조롱할 것이다. 소련과 중국 같은 공산국가들은 발전한 기술을 토대로 정보를 중앙에 집중했고, 이를 인민의 배고픔을 해결하거나 자유를 보장하는 데 이용하는 대신 강력한 전체주의 독재국가를 수립했다! 그러니 정보=힘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뭐 그렇게 해도 좋다.


비관론자들은 공산주의 독재국가들이 결국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패배한 이유를 정보 처리의 비효율에서 찾는다.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그 정보로 인간을 억압해 질서를 유지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국가는 엄청난 자원을 소비했다. 문제는 그렇게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음에도 완벽한 통제가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잠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는 AI의 등장에 독재자들의 마음이 설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초거대 AI는 지금까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었던 양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판단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반정부 사상을 가졌는지, 언제 어디서 전복을 위한 테러를 감행할지, AI는 쉬지 않고 명령을 내려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일 것이다.


<넥서스>는 비관론자의 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계속 읽어나갈수록 긍정론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 낙관과 비관과 긍정은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확실한 차이가 있다. '망했다. 앞으로는 뭘 해도 안 될 거야.'라는 게 비관이라면 '걱정 마 뭘 해도 잘 될 거야.'라는 게 낙관이다. 긍정은 이런 거다. '망했다.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하지?' 유발 하라리는 비관론자처럼 보이는 긍정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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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타씨에게 묻다 - 닌텐도 부활의 아이콘
호보닛칸이토이신문 엮음, 오연정 옮김 / 이콘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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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타 사토루, 미야모토 시게루, 레지널드 피서메이는 닌텐도 부활의 삼신기였다. 사토루는 개발자, 시게루는 기획자, 레지널드는 마케터다. 그야말로 완벽한 조합이랄 수밖에.


닌텐도는 일본 회사였지만 당연히 해외 매출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고, 이렇게 돈을 벌어와 닌텐도의 심장에 연료를 공급한 게 레지널드 피서메이였다. 그는 닌텐도 미국 법인의 대표였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게임 기획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다. 마리오의 아버지라고 하면 설명 끝. 여기에 굳이 젤다까지 붙일 필요가 있을까? 이와타 사토루는 일본 닌텐도, 본사의 사장이었고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이다.


이와타 사토루는 도쿄 공대를 졸업한 뒤 학창 시절 가끔 일을 도왔던 HAL연구소에 입사한다. 그냥 개발 너드였다. 뭔가 만들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을 대단히 좋아했다. 규모가 아주 큰 회사는 아니었지만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다 덜컥, HAL연구소의 대표 자리를 맡게 된다. 취임 당시 회사의 빚은 100억. 이를 갚기 위해 닌텐도의 외주 개발을 맡아 유명 타이틀 몇 개를 만들어낸다. 그중 하나가 바로 '별의 커비'다.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뭐 마리오보다는 인지도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지만 이 바닥에선 의외로 또 '별의 커비'를 인생작으로 꼽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성공 끝에 그는 닌텐도의 대표가 된다. 외주 개발사 사장이 본사의 사장이 됐을 정도니 그야말로 회사의 심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타 씨의 말을 듣다 보면 뭔가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공통된 질문이 하나 있음을 알게 된다. 그건 바로 '왜?'다. 그냥 단순한, 본질적인 의문이다. 저건 어떻게 동작하지? 어떻게 만들었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의문은 학습을 유발하고 학습은 더 거대하고 많은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이 순환을 흔히 '성장'이라 부른다. 머릿속에 '왜?'가 없으면 인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가끔은 의문 없이도 좋은 성과를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 따르는 건 가능해도 절대 이끄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명함 속에 나는 사장입니다. 머릿속에 나는 개발자입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나는 게이머입니다.(p.193)


머릿속에 나는 개발자입니다를 기획자로 바꾸면 이와타 사토루의 인생은 내가 되고 싶어 했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비록 그처럼 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 작은 영역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여전히 '왜?'를 앞세우면서, 때로는 무시와 비난을 받지만. 이제 몇 년 후면 나는 이와타 씨가 세상을 떠난 나이가 된다. 운이 조금만 따라준다면, 나는 아마 그보다 훨씬 오래 살 것이다. 행운처럼 주어진 이 시간을 어떻게 쓰면서 살아야 하는지, 이와타 씨에게 배우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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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임무는 게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 벼랑 끝의 닌텐도를 부활시킨 파괴적 혁신
레지널드 피서메이 지음, 서종기 옮김 / 이콘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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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텐도는 정말 정말 신비한 회사다. 죽을 듯 죽을 듯하면서도 기적같이 살아나고, 그 방식 또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하다. 갈라파고스 같은 일본 문화의 정수를 심장에 박아 넣은 기업인데, 바로 그 고유함으로 세계에 족적을 남겼으니 정말 놀랍다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다.


레지널드 피서메이는 무너져가는 닌텐도에 입사해 제2의 전성기를 이끈 미국 법인의 사장이다. 마케팅 출신의, 대단히 공격적인 전략을 구사하는 인물로 그로스(growth)에 특화된 인재로 보인다. 침몰하는 배의 키를 맡기에는 제격이었던 셈!


사람들은 성공 신화의 뒤에 늘 위대한 지도자가 있다고 믿는다. 완전히 틀린 믿음은 아니다. 닌텐도DS와 Wii의 전 세계적 히트에는 레지널드 피서메이, 이와타 사토루, 미야모토 시게루라는 삼위일체가 있었으니까. 세 사람은 의견이 늘 같았던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완벽한 팀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E3 쇼의 키노트를 기획하며 있었던 일이 이 추정에 아주 좋은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레지널드 피서메이는 세계 최대의 게임쇼 E3에서 전 세계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저는 레지라고 합니다. 제 임무는 경쟁자들을 박살 내는 겁니다. 또 제 임무는 그들의 명성을 끝장내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임무는 게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My name is Reggie. I'm about kicking ass. I'm about taking names. And we're about making games."

(p.184)


쥐뿔도 없었던 회사가 하기엔 지나치게 건방진 대사였지만 이것이 그대로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어버렸다. 확실히 성공을 위해선 망상에 가까운 일도 자기만큼은 확신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 같다. 늘 조심스럽고 우울해 보이는, 언제든지 깜짝 놀랄 준비가 되어 있는 일본인은 많이 불편했겠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발언은 맨 마지막 문장 '그리고 우리의 임무는 게임을 만드는 것입니다.'였다. 왜냐하면 이 대사의 초안이 '우리의 임무'가 아니라 '나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이런 공격성이 마뜩잖은 일본인인데, 게임 개발자도 아닌 마케터가 '나의 임무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겠다니 사실관계조차 맞지 않는 이 말에 우리의 재패니즈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많은 우려와 반대 끝에 이 대사는 '우리'로 변경됐고 결국 전설로 남았다.


나는 이 '우리'에 속은 사람 중 하나다. 이 책의 제목이 '나의 임무는 게임을 만드는 것입니다.'였고 지은이가 레지널드 피서메이였다면 내가 이 책을 살 일이 있었을까? '게임을 만드는 것'이라는 말에 '나의 임무'를 붙이는 건 이와타 사토루나 미야모토 시게루 정도나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은 닌텐도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레지널드 피서메이의 자서전에 가깝다. 닌텐도는 무려 140페이지에 가서야 등장한다. 생생한 게임 개발 이야기는 마케터의 커리어에 섞여 풀이 죽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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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과 시간여행 (보급판) - 아인슈타인의 찬란한 유산
킵 손 지음, 박일호 옮김, 오정근 감수 / 반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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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타임머신 얘기가 657페이지부터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제목이 <블랙홀과 시간여행>이니까, 그래도 중반부터는 시작될 거라 생각했다. 이 책은 707페이지가 끝이다.


앞에서 무슨 얘기를 한 걸까?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이 나오고 백색왜성의 신비를 풀어내고 곡률의 잔물결을 설명한 뒤 블랙홀의 증발과 안쪽의 상황을 전해준다. 그러니까 핵연료를 소진한 별이 내폭파하여 블랙홀이 되는 과정을 이런저런 얘기에 태워 보내는 게 이 책의 임무다. 기대했던 이야기를 만나기에는 너무 먼 여행을 가야 한다. 사건의 지평선을 건너 영원히 박제된 광자처럼, 기다림은 영원에 가깝다.


저자 킵손이 대중에 알려진 건 영화 <인터스텔라> 덕분일 것이다. 모든 걸 실제로 구현하는데 미친 남자 크리스토퍼 놀란은 단순한 블록버스터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세계적인 물리학자 킵손의 감수를 받았다. 그는 놀란에게 웜홀의 비밀과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얘기해 준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노력을 들인 <인터스텔라>도 사실은 다 뻥이라는 걸 깨달았다.


50페이지 밖에 없는 이야기를 짜낼 대로 짜보자. 우선은 웜홀이다. 웜홀은 우주에 난 구멍이다. 이 구멍 하나가 이 쪽 우주에, 다른 하나가 10광년 떨어진 곳에 있다면 이 구멍을 통로로 이용해 우리는 10광년의 거리를 단숨에 이동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웜홀이 완전히 상상에 근거한 산물이라는 점이다. 세상 모든 것을 빨아들여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그 존재를 의심할 법한 블랙홀조차 생성에 관한 한 지극히 타당한 물리 법칙을 따른다. 우리 우주의 법칙에 의하면 블랙홀의 존재는 필연적이다. 하지만 웜홀은 그렇지 않다. 우리 우주는 웜홀을 만들 이유가 없다.


그래도 킵손은 두 개의 전략을 제시한다. 하나는 중력 진공요동 속에서 웜홀을 낚아채 원하는 크기로 늘리는 양자전략이다. 중력 진공요동은 아주 작은 공간 안에 존재하는 용광로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안에서 시공간은 무한한 방식으로 존재했다가 소멸하기를 반복하는데 말 그대로 모든 게 가능하다 보니 그중 하나가 웜홀일 확률도 생각보다 낮지는 않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공간을 구부리고 늘린 뒤 찢어 이어 붙이는 것이다. 그림으로 보면 이 말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공간을 구부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도대체 어떤 힘을 이용해 그걸 한다는 건지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이 우주는 모든 공간이 하나로 연결된 풍선 같은 게 아닌가? 어디서부터 어디를 구부린다는 건가? 풍선에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공간을 잘라내는 게 우선일지도 모른다. 커다란 2절지를 접기보다는 색종이가 훨씬 쉬울 테니까 말이다. 구부린 공간에 존재하는 별들은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하다. 외계인이 구부려 놓은 공간에 재수 없게 지구가 걸리면 우리 몸도 같이 구부러지는 걸까? 평소에 요가를 해뒀으니 다행이다. 나마스테! 물론 우주의 법칙은 우리 눈에 반듯해 보이는 공간도 사실은 엄청나게 휘어져 있다는 걸 증명한다. 중력이라는 게 휘어진 공간 그 자체 아닌가! 질량이 커질수록 공간은 더 많이 휜다. 공간을 구부린다고 해서 별이 접히거나 그 안에 사는 우리가 접히는 건 아니다. 그렇다 해도 공간을 구부려 이어 붙이는 걸 구현하는 기계와 힘을 상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저런 문제를 극복한 뒤 어쨌든 웜홀을 만들었다 치자. 그다음은 이 웜홀을 늘려 쪼그라들지 않게 유지하는 게 관건이다. 이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이름부터 신뢰하기 힘든 '이상 물질'이다. 그래도 이상 물질은 존재할 가능성이 웜홀보다는 높은 것 같다. 이 물질은 음의(-) 평균에너지 밀도를 갖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수축하는 공간을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 미래에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라면 이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활용해 웜홀을 우주선이 통과할 정도의 크기로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토성 옆에 웜홀을 만든 <인터스텔라>의 머피 쿠퍼처럼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시간 여행이 남았다. 여기까지 읽어서는 도대체 이게 시간여행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아할 것이다. 공간과 공간을 연결한 통로 따위가 어떻게 시간여행을 가능케 한단 말인가? 아마 이 얘기를 다 듣고 나면 당신은 킵손이 제시한 시간여행도 우리가 원하던 형태는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우선 웜홀이 연결한 두 입구가 웜홀의 내부에서 볼 때는 서로에 대해 정지해 있고, 그래서 하나의 기준좌표계를 공유하며, 따라서 동일한 시간 흐름을 경험할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다만 외부에서 바라볼 때 두 입구는 다른 기준좌표계에 있으므로 시간의 흐름은 서로 다르다. 나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했지만 이게 왜 그렇게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으므로 여러분에게도 그냥 받아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자, 이제 진짜 시간여행을 할 차례다. 당신은 30cm 길이의 웜홀로 연결된 두 개의 입구를 만들었고 하나는 당신의 집 거실에 다른 하나는 마당에 주차해 놓은 우주선의 내부에 놓아두었다. 권태기에 빠져 우울해하던 아내는 새로운 자극을 위해 우주선을 타고 광속 여행을 하기를 원했고 당신은 마음속으로는 환호를 질렀지만 굉장히 서운해하며 그 여행을 허락했다. 대신 변치 않는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여행 내내 웜홀을 통해 손을 잡고 있기로 했다.


2024년 1월 5일 오전 10시 당신의 아내는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지구를 떠났다. 6시간쯤 우주를 여행하다 그녀는 다시 방향을 바꿔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의 기준에서 여행은 총 12시간이었고, 이는 손을 잡고 있었던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웜홀을 통해 바라본 우주선의 창문에는 당신의 집이 보였기 때문에 당신은 손을 놓고 아내를 맞으러 마당으로 나갔다. 그런데 웬걸, 마당은 비어있다. 우주선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고성능 천체망원경으로 관측하니 당신 아내의 우주선은 아주 빠른 속도로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지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아내의 여행은 10년이 지나야 완료될 것이다(움직이는 속도에 영향을 받는 시간의 상대성을 떠올려보자).


12시간인 줄 알았는데 10년이라니. 얼마나 기쁜가!! 당신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10년을 기다렸고 마침내 아내가 돌아왔다. 우주선에 들어가 웜홀을 통해 집을 바라보니 이제 막 아내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뛰쳐나갔으나 텅 빈 마당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당신은 웜홀을 기어들어가 10년 전의 나에게 아내의 여행은 10년 뒤에나 끝날 것이라 얘기해 준 뒤, 그의 환호를 뒤로한 채 다시 웜홀을 거쳐 나와 10년 전의 아내의 손을 잡고 2034년을 살아간다. 물론 아내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우주선 내부의 웜홀을 통해 10년 전으로 돌아가 젊은 나와 함께 살지, 아니면 혼자서만 10년의 세월을 맞은 늙은이와 함께할지. 이러나저러나 나에게 큰 손해는 없는 것 같다.


이해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10년 전의 나, 지금의 나, 그리고 아내 중 그 누구도 웜홀이 처음 생겼던 2024년 1월 5일 오전 10시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상상하는 타임머신과, 이론적으로나마 가능하다고 알려진 타임머신의 가장 큰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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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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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귄은 왜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을까? <기묘한 이야기들>을 읽고 나니 딱 그 생각이 떠올랐다. 같은 장편으로 비교한 게 아니니 올가 토카르추크 입장에선 좀 억울할 수 있겠지만 재미는 어슐러 K. 르귄 쪽이 더 나았다. 더 명확하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어슐러 K. 르귄이 '사회적'이라면 올가 토카르추크는 뭐랄까, 올개닉(organic) 요거트 같은 느낌이 있다. 히피스럽기도 하고, 마주치면 '피스'를 외칠 것도 같고, 무정부주의적이면서, 자연친화적이다. 전자가 인간 사회에 깃든 병에서 소재를 배양해 이야기를 직조한다면 후자는 지구 위를 굽어보며 툭 튀어나온 인간의 이상 행동을 관조한다. 르귄의 메타포들은 우리에게 성차별이나 빈부격차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인지 알려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세계가 무엇인지 꿈꿀 수 있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이 지구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역설한다. 그녀는 지구에서 자리하는 우리 종의 위치를 이렇게 표현한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여전히 침팬지이나 고슴도치이고 낙엽송입니다."(p. 147)


그래서 이 소설에는 기꺼이 다른 존재가 되려는 사람이 나온다. 인간이라는 굴레어서 벗어나 낙엽, 고슴도치 혹은 늑대가 되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건 없다. 그들과 우리는 구성하는 원자는 다를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기꺼이 다른 존재가 되려는 사람보다 그의 가족들에게 더 공감이 간다. 왜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떠나려 하지? 이야기를 곰곰이 따라가다 보면 인간으로 태어난 게 죄처럼 느껴진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지금까지 우리 종이 살아온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다른 종 위에 군림하고, 자연을 멋대로 파괴하면서, 함께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기보다는 다른 것을 바꿔 자기에 맞추는 폭력을 행사해 온 게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변화를 촉구하는 수단으로써 이러한 이야기들이 효과적인가 하면 잘 모르겠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인간 종에 내재한 근본적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결함을 나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고쳐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만, 본성을 고쳐 산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든다. 비버는 댐을 만들어 주변 환경을 파괴하고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 비버에게 그 본성을 버리고 다른 동물처럼 정정당당하게 수영해서 사냥하라고 하는 게 옳은 일인가? 아니 가능한 일인가? 인간은 다른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달라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대자연은 늘 균형을 맞추는 법을 찾아냈고 우리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본성에 내재한 결함을 고쳐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기보다 이 세상에서 우리 종 자체를 없애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 같다. 세계적인 저출산 문제가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생물의 역사에는 수많은 멸종의 기록이 있다. 이번엔 그 차례가 우리 인간에게 온 것일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 소멸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 모든 것이 조화롭게,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게 인간의 관점에선 아주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주라면, 지구 하나쯤 박살 나 먼지가 된다 한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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