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묘한 이야기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평점 :
어슐러 K. 르귄은 왜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을까? <기묘한 이야기들>을 읽고 나니 딱 그 생각이 떠올랐다. 같은 장편으로 비교한 게 아니니 올가 토카르추크 입장에선 좀 억울할 수 있겠지만 재미는 어슐러 K. 르귄 쪽이 더 나았다. 더 명확하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어슐러 K. 르귄이 '사회적'이라면 올가 토카르추크는 뭐랄까, 올개닉(organic) 요거트 같은 느낌이 있다. 히피스럽기도 하고, 마주치면 '피스'를 외칠 것도 같고, 무정부주의적이면서, 자연친화적이다. 전자가 인간 사회에 깃든 병에서 소재를 배양해 이야기를 직조한다면 후자는 지구 위를 굽어보며 툭 튀어나온 인간의 이상 행동을 관조한다. 르귄의 메타포들은 우리에게 성차별이나 빈부격차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인지 알려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세계가 무엇인지 꿈꿀 수 있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이 지구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역설한다. 그녀는 지구에서 자리하는 우리 종의 위치를 이렇게 표현한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여전히 침팬지이나 고슴도치이고 낙엽송입니다."(p. 147)
그래서 이 소설에는 기꺼이 다른 존재가 되려는 사람이 나온다. 인간이라는 굴레어서 벗어나 낙엽, 고슴도치 혹은 늑대가 되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건 없다. 그들과 우리는 구성하는 원자는 다를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기꺼이 다른 존재가 되려는 사람보다 그의 가족들에게 더 공감이 간다. 왜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떠나려 하지? 이야기를 곰곰이 따라가다 보면 인간으로 태어난 게 죄처럼 느껴진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지금까지 우리 종이 살아온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다른 종 위에 군림하고, 자연을 멋대로 파괴하면서, 함께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기보다는 다른 것을 바꿔 자기에 맞추는 폭력을 행사해 온 게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변화를 촉구하는 수단으로써 이러한 이야기들이 효과적인가 하면 잘 모르겠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인간 종에 내재한 근본적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결함을 나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고쳐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만, 본성을 고쳐 산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든다. 비버는 댐을 만들어 주변 환경을 파괴하고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 비버에게 그 본성을 버리고 다른 동물처럼 정정당당하게 수영해서 사냥하라고 하는 게 옳은 일인가? 아니 가능한 일인가? 인간은 다른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달라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대자연은 늘 균형을 맞추는 법을 찾아냈고 우리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본성에 내재한 결함을 고쳐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기보다 이 세상에서 우리 종 자체를 없애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 같다. 세계적인 저출산 문제가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생물의 역사에는 수많은 멸종의 기록이 있다. 이번엔 그 차례가 우리 인간에게 온 것일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 소멸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 모든 것이 조화롭게,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게 인간의 관점에선 아주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주라면, 지구 하나쯤 박살 나 먼지가 된다 한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