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세상을 지어라
안도 다다오 지음, 이규원 옮김, 김광현 감수 / 안그라픽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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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철학이 필요하다. 철학이 확고한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아무리 힘든 일을 겪더라도 끝내 빛을 보고야 만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철학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실존주의나 니체를 뜻하는건 아니라는 걸 알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 철학이란, '누가 뭐라해도 자기 생각을 고집스럽게 추구해 나가는 것'이라고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안도 다다오가 소형 주택 '스미요시 나가야'로 건축계에 데뷔했을 때 안도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목조 건물이 줄지어 있는 빽빽한 골목, 그야말로 한 뼘이라고 표현할 만큼 조그만 땅에 안도는 차가운 콘크리트 입방체를 그대로 끼워 넣었다. 집 안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그 좁은 건물의 3분의 1 정도를 할애해 중정을 만들어 놓았다. 이 중정은 지붕이 완전히 오픈된 곳으로 비가 오는 날이면 집주인은 서재에서 마루로 가는 동안 우산을 써야 했다. 그의 작품은 실용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건축 본연의 의의를 떠나 파인 아트(Fine art)를 지향하는 듯 보였다.  

 

 

 

사람들은 스미요시 나가야를 '건축가의 이기심에서 나온 집'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안도는 이 집이야말로 '주거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상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한 건축이며 결코 예술 작품처럼 내키는대로 지은 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가 스미요시 나가야를 통해 내놓은 해답은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생활이야말로 주거의 본질'이라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그 넓지도 않은 집에서 3분의 1을 차지하는 중정은 얼마나 낭비적인 공간인가. 하지만 나는 어릴 적 살던 집을 떠올리면서 이 중정이라는 자연적 공백이야말로 좁은 집안에 무한한 소우주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동시에 중정으로 들어오는 자연의 그 냉혹함까지 받아들이고 일상생활의 멋으로 알고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함이 인간에게는 존재한다.' p88 

안도 다다오는 자신이 기성 세대의 관습과 사상에 맹렬히 저항하며 살아가듯 자신이 지은 집에 살아갈 사람들 또한 거기서 오는 불편을 감수하고 완강하게 살아낼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설계를 맡기러 온 고객에게 이런 말을 하면 대체로 절반 정도는 기가 죽어 발길을 돌린다고 한다. 안도는 미친 건축가였다.  

똑똑한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해 좋은 직장에 들어가 승진을 하고 바보들은 직장을 나와 일가(一家)를 이룬다. 하지만 미친놈들은 맨손으로 일어나 세상을 재패한다. 안도는 일반적인 관점에선 미친 건축가였지만 그 사상과 철학 만큼은 단단한 바위 같았다. 안도의 콘크리트 입방체들은 처음엔 극소수의 건축주들에게만 수용되었지만 그 어떤 건축과도 구분되는 확실한 존재감 탓에 도시는 곧 안도의 건축물을 하나의 풍경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안도 다다오의 '저항과 도전'이 비로소 도시의 삶 속에 단단히 뿌리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왜 노출 콘크리트 인가  

'저항과 도전'이 안도의 정신이라면 '노출 콘크리트'는 그 정신의 표현이었다. 사실 건축 소재에 있어 콘크리트만큼 따분한 소재는 없다. 한국의 주거문화를 완전히 망쳐놨다고 비판되는 집들이 바로 콘크리트 덩어리로 빚어낸 아파트라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사람들은 콘크리트가 뿜어내는 삭막한 풍경에 질식한다. 그래서 그 위를 유리로 덮거나 페인트로 칠하거나 각종 장식으로 치장한다.  

그런데 '노출 콘크리트'란 그 치장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 그러니까 거푸집을 만들어 콘크리트를 붓고 그것이 굳자마자 떼어낸 순수한 콘크리트 덩어리다. 안도 다다오는 그 적나라한 속살을 그대로 건축에 활용한다. 심지어 내부 인테리어까지 철저히 배제된 채로 말이다.  

 

다양한 건축 소재가 일반화된 요즘에도 안도가 '콘크리트'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그것이 '창조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도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도에 따르면 노출 콘크리트는 '벽 안팎을 단번에 마감할 수 있기 때문에 제한된 예산과 대지에서 최대한 커다란 공간을 확보하고 싶다는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저렴한 해결책'이다. 여기에는 건축물이란 건축가의 자의식을 표현하는 예술작품이 아니라 엄연히 '사람이 살아갈 건물' 이라는 안도의 자각이 반영되어 있다.  

  

도시에 도전하는 건축  

주택 스미요시 나가야로 도시에 강렬한 방점을 찍어 넣은 안도 다다오는 이어지는 상업 건축을 필두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안도 같이 자의식이 강한 건축가가 상업 건축을 선택했다는 건 사실 굉장한 아이러니였다.  

당시 건축계에는 '상업에 아부하는 시설은 공공성이 없는 이른바 하등한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고, 실제로 디자인도 겉만 장식하는 진부한 것뿐' 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상업 건축은 진정한 건축가로 불리길 원하는 사람들에겐 철저히 무시당하던 존재였다. 그러나 이 같은 업계의 편견은 기어이 안도의 반골 기질을 자극해 버리고 말았다. 안도는 상가가 즐비해 있는 상점가로 나가 또 한번의 반란을 꿈꿨다.  

한국만 그런줄 알겠지만 일본도 한 때는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려 옛 것을 모조리 파괴하고 그 위에 허세를 세우는 것이 근대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안도는 당시로선 그 개념조차 생소한 '풍경 보존'이라는 의식에 입각해 최초의 상업 건축 '로즈 가든'을 짓기 시작한다.  

로즈 가든'은 고베의 오래된 주택가, 기타노마치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그곳은 메이지시대부터 외국인 밀집 지역으로 이용되면서 보통의 일본과는 다른 이국적 풍광을 유지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도 마구잡이식 개발의 화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조만간 낙후된 시설에 대한 불만과 건축주의 상업적 목적이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와 수 십년의 역사를 흔적조차 없애 버릴 것이 분명했다. 안도는 자신의 건축이 그 파괴의 일익을 담당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과감히 노출 콘크리트를 배제하고 벽돌로 로즈가든을 짓기 시작했다.  

 

 

 

상업 건축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효율'이다. 임대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짜투리 땅이라도 어떻게서든 활용해 내는 것이 건축주의 바람이고 건축가의 의무다. 현대 건축은 이같은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높이 높이 솟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발달로 인해 현대 건축은 엄청난 높이를 쌓아 올리고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콘크리트를 배제하고 벽돌을 선택했다는 점, 그리고 건물의 높이를 주변의 건물들과 조화롭게 유지한다는 건 가히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뿐만 아니라 내부 구조는 스미요시 나가야와 같은 중앙 광장이 설치되 굉장한 공간 낭비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넌센스들이 건물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유일한 존재로 만들어 거리에 우뚝 서게 만든다.  

안도의 작업은 고베의 오래된 주택가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뒤이어 맡은 8건의 추가 건축은 로즈 가든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옛것의 소중함을 심어줬음을 암시한다. 안도의 고집스런 건축이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변화시킨 것이다. 

   

안도라는 이름의 건축가  

오래전부터 건축은 예술에 속하는 장르였다. 한국에서야 건축학도하면 그저 공대생을 떠올리지만 외국의 경우 건축학과는 대부분 미대나 독립된 단과 대학으로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건축이 예술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건축=아파트라는 도식이 확고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아파트 공사현장에선 예술의 향기 보다 열악한 근무 환경과 노가다가의 냄새가 짙게 배어난다.  

건축은 공간을 사유하고 그 안에서 삶을 빚어내는 미의식의 발현이다. 확고한 철학 없이 건축을 한다면 공간은 필연적으로 흉물스런 아파트의 향연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근성이다. 속도와 생산성이 몰고 오는 거대한 쓰나미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안도는 자신의 건축을 했다. 자신의 철학을 산다는 건 괴롭지만 걸어온 길 위에 길이길이 남을 족적을 새기는 일이기도 하다. 바다 위의 절벽은 거센 파도를 맞으면서도 수 천년을 버틴다. 안도의 건축도 그렇게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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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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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은 인류에게 있어 매우 의미있는 해였다. 노스트라 다무스는 이 해에 지구가 종말할 거라고 예언했었다. 유럽에는 새 시대의 통합을 상징하는 유로화가 도입됐다. 터키에선 7.8의 강진이 일어나 3만여명이 매몰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2년 5개월 만에 탈옥수 신창원이 검거되었다. 

1999년은 새 천년에 대한 기대와 지구 종말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뒤섞여 전반적으로 달뜬 한해를 보내고 있었다. 사회가 불안해 질 수록 사람들은 더 강한 자극을 원한다고 했던가? 60년 전 TV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거대한 스크린을 스펙타클로 이식한  헐리웃은 이 때야 말로 자신이 가장 큰 활약을 펼칠 때라는걸 깨달았다. 그리하여 헐리웃의 3대 제작자 조엘 실버는 아직은 형제였던 두 감독을 고용해 빨간약과 파란약을 만들어 낸다.  

1999년은 영화 매트릭스(Matrix, 1999)가 개봉한 해이다.   

 

1980년대에 빨간 휴지를 줄까 파란 휴지를 줄까하는 화장실 괴담이 그랬듯 1999년에는 빨간약이냐 파란약이냐라는 선택의 문제가 온 문화계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매트릭스는 비단 영화계만의 이슈가 아니었다. 매트릭스가 보여준 세계는 새롭고 막강한 기술 위에 세워진 가상 실재였다. 사람들은 360도로 회전하는 카메라(Bullet time)와 초고속으로 촬영된 건물 폭파씬에 이를 악물었다. 기술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세계를 만들어냈다.  

매트릭스 이후의 미디어들은 더이상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광고와 드라마는 더 정교하고 현란하게 세계를 창조해야 했다. 신문과 뉴스는 모피어스가 밝혀낸 진실보다 더 쇼킹한 사건을 보도해야 했다. 이 세계 자체가 우리 모두를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능가하는 내러티브를 찾기 위해 모든 미디어가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매트릭스의 영향력은 빛줄기 하나 범접할 수 없는 어둡고 침침한 골방 속, 시큰한 홀애비 냄새를 풍기며 잠들어 있던 철학을 깨우기에 이르렀다. 철학자들은 저급한 대중영화가 엄청난 신화, 종교, 철학적 상징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모든 논쟁이 그렇듯 그들의 의견도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어떤 이들은 매트릭스가 가진 철학적 메시지는 단순한 장식일 뿐이며 이 영화를 '철학'이라는 완결된 체계로 포섭하기엔 어설프기 짝이 없다고 비난했다. 또 어떤 이들은 매트릭스가 대중문화 역사상 가장 세련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철학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아도르노의 '문화 산업론' 이후에 철학이 이토록 대중 문화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아도르노는 재즈가 클래식을 대체하고 영화가 연극을 밀어내는 상황을 개탄하며 '문화 산업론'을 설파했다. 그러나 TV와 인터넷이 도래하자, 위태위태하던 철학은 그대로 절벽에서 떨어져 영원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매트릭스를 본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가 기독교의 예수 재림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네오(Neo)라는 이름은 '다음', '새로운' 같은 의미가 있지만 영어 철자를 재배치하면 '하나(One)' 즉 절대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1999년 부활절 주간에 개봉했다. 

그런가 하면 오라클의 집에서 만난 차기 네오의 후보중 한명이 손을 대지도 않고 숟가락을 구부리며 키아누 리브스에게 전한 말은 불교의 근본사상을 표현한다.   

"숟가락은 없어요. 구부러지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기계와 인간의 관계를 규명하는 방법도 가지각색이다. 기계를 인간에 대한 착취자로 설정하면 기계와 인간의 대립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결이 되며 이는 매트릭스가 위대한 맑시즘의 체제 안에서 읽힐 수 있음을 암시한다. 반면 기계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정을 느끼고 거기에 반응하며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관점에선 과연 인간이 기계를 지배하는 것과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 사이에 어떠한 도덕적 차이도 있을 수 없다는 도발적인 결론을 낳기도 한다.  

한편 '매트릭스'는 - 영화 제목으로서가 아니라 영화 안에 존재하는 가상 실재를 뜻함 - 오랜 시간 철학을 괴롭혀왔던, 인식론에 대한 논쟁을 부활시킨다. 이 세계의 근본은 과연 물질인가 아니면 관념인가? 우리는 실재를 통해 세계를 인지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지한다는 생각이 실재를 만들어 내는 것인가?  

이 논쟁은 17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이후로 가열찬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 자신을 의심할 수는 없으므로 물질이 실재한다'고 결론내렸지만 그 실재가 결국 뇌로 전해지는 전기 신호의 해석에 불과하다면 이 세계에 과연 '실재'를 증명할 방법이 있는걸까? 

 

 

 

매트릭스는 철학으로 말해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세계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트릭스에는 기독교가 있고 마르크스가 있고 인식론이 있으며 색즉시공과 인생무상과,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있다. 그리하여 슬라보예 지젝을 포함해 무려 17명의 교수들이 이 신화적 잡탕을 해체하기 위해 책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는 비록 제목에서는 촌스런 냄새가 풀풀 풍길지언정 그 해체 과정은 마치 *포정이 각을 뜨듯 철저하고 부드럽다.  

평소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거나 철학을 읽어 보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은 다소 터프하지만 훌륭한 선생님이 될 수 있다. 내용 자체가 아주 쉽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훌륭한 번역과 더불어 교수님들의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은 이 책을 사야만 하는 절대 이유이다.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이름에 혹한 사람이라면 잠시 서점에 들러 내용을 확인해 보기 바란다. 평소 그의 철학에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무려 40페이지에 이르는 그의 글이 생소하고 어려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 뒤통수를 얻어 맞은 사람들도 이 책의 훌륭한 독자가 될 수 있다. 알쏭달쏭 미묘했던 상징들이 스크린 보다 훨씬 고루한 종이 위에서 오히려 생생히 살아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신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이 책은 매트릭스 1편 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걸 알아 두시라. 1편에 비해 리로디드와 레볼루션이 할 얘기가 더 적은게 사실이니까. 

 

 

 

*춘추전국시대 양나라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았다는 전설의 백정. 손을 놀리고, 어깨로 받치며, 발로 밟고, 무릎을 굽히며 소에게 칼질을 하는 모습이 '도(道)'를 거스르는 일 없이 부드러워 문혜군이 '양생의 도'를 깨달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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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니어링 자서전 역사 인물 찾기 11
스콧 니어링 지음, 김라합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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씐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랬다. 그런데 샤바샤바 알샤바 1982년에 왕자의 고백을 받았을 때, 씐데렐라는 왕자가 강남에 대형 아파트를 해오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왕자는 지방에 수 만 평의 대지와 거대한 성을 갖고 있었지만 강남에 아파트를 살만큼 부자는 아니었다. 결국 왕자는 결혼을 포기했고 고향에 내려가 평생 외롭게 살다 고독하게 죽었다.  

이후에 씐데렐라는 유리구두를 신고 파티장을 누비다 부잣집 놈팽이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 놈은 사상 최악의 사기꾼 가난뱅이에다 극악무도한 바람둥이였다. 씐데렐라는 화병이 나 2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 평소 망자의 유언대로, 무덤 속에는 그 잘나빠진 유리구두 한 켤레가 함께 묻혔다. 

당신이 구입한 고급 세단과 대형 아파트는 당신의 무덤을 지키지는 못한다. 당신은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세상이 더! 더! 더!를 외치는 이유는 뭘까? 죽은 사람은 말이 없기 때문일까? 만약 시체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이 모든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돈과 지위를 탐하기 보단 당신의 이웃과 가족과 사회를 사랑하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해준다면 세상은 바뀔 수 있을까? 내가 너무 바보같은 질문을 한 것 같다. 

 

 

 

스콧 니어링은 1883년 미국의 한 탄광도시를 송두리째 지배하고 있던 부잣집의 첫째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쌓아 놓은 욕망의 결과물을 고스란히 물려 받을 수 있었지만 스스로 빈자의 길을 택했다. 그가 보기에 세상은 병들어 있었고 자본주의는 결코 인간의 진보를 보장해 주지 못했다.  

어떤 시대나 마찬가지로 대세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평생 외롭게 살다 고독하게 죽을 운명을 맞는다. 대세는 자신의 뜻을 거스리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대세가 반골들에게 내리는 최초의 형벌은 바로 사회로부터의 단절이다.  

스콧 니어링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아동 노동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9년 동안 일해 온 직장에서 - 펜실베니아 대학 교수직 - 해고 당했다. 어렵게 다시 찾은 교수직도 오래가지 못했다. 출판사와 잡지사들을 더 이상 니어링의 글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중 강연회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니어링 박사는 강연계의 섭외 목록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1917년에는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어 1919년 연방 법정에 피고로 섰다. 죄목은 '전쟁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스콧 니어링은 이 세계로 부터 완전히 버림 받았지만 그 자신은 세상을 버리지 않았다. 계속된 탄압과 굴욕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사회주의 이상을 실천했다. 그리고 그 이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걸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영원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큰 어려움이 뭔지 아는가? 그건 이 위대한 이상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외면 당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안된다고 하는 일을 끈덕지게 밀어 부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건 세상의 인정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의 믿음이다. 그러나 대개는 가족과 친구들이 제일 먼저 등을 돌린다. 스콧 니어링은 자신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포획되어 부유하고 탐욕스런 인생을 선물 받는 걸 목격했다. 그 자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부인과 별거 중이었다.  

경제적 압박은 신념을 향해 나아가는 배를 가로 막는 또 다른 암초다. 스콧 니어링은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하던 시절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예감하고 아주 작은 연금을 마련해 두었다. 연금은 결코 넉넉한 액수가 아니었기에 스콧 니어링은 자신의 삶을 철저한 무욕으로 통제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인생의 두 번째 동반자인 헬렌을 만난다. 헬렌은 니어링 보다 무려 스무살이나 어린 처녀였으나 누구보다도 그의 신념을 믿고 따랐다.  

둘은 곧 시골 마을로 내려가 돌로 된 집을 짓고 농장을 개간했다. 자신이 먹을 음식은 직접 재배했고 남은 음식은 다른 물건과 바꾸거나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러자 쥐꼬리만한 연금도 남 부러울 것 없는 액수가 되었다. 그는 철저한 지출 계획을 세워 한해를 대비했고 만약 다음 해에 써야 할 돈이 마련되면 지체없이 농사를 멈추고 여행을 떠났다.  

 

그는 이미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갖기 위해 가난한 자를 쥐어짜는 이 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계급사회의 밑바탕에는 '네가 일하고 나는 먹는다'는 원칙이 깔려 있다. 이 원칙은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대신 뿔뿔이 떼어놓는다. 이 원칙은 협력의 반명제이다. 미국에 만연해 있는 이 원칙은 오늘날 건강한 공화국의 장래를 위협하는 가장 큰 독소 가운데 하나이다.' 

1983년 8월 24일, 스콧 니어링은 곡기를 끊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딱 100세가 되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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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데드 Walking Dead 1~5 세트
로버트 커크먼 지음, 장성주 옮김, 찰리 아들라드 외 그림 / 황금가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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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만화는 텅 빈 병원에서 깨어난 주인공이 좀비가 득실거리는 폭력의 땅으로 들어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세상이 개벽한 줄도 모르고 무지의 발걸음을 내딛는 주인공 '릭'. 아직은 순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는 최후의 인간. 

좀비 영화를 봐왔던 사람이라면 이 장면이 대니 보일 감독의 2002년 작 '28일 후'(28 days later, 2002)에 어느정도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그렇다면 이 뒷이야기 또한 예상할 수 있을텐데, 그것은 짐작한대로 '살아남은 사람들과의 재회'다.  

 

 

1968년 조지 로메로가 좀비(Zombie)를 창조한 이래 좀비가 단순히 공포의 소재로만 씌였던 적은 없다. 물론 무섭게 생긴 좀비들이 으드득 으드득 인간을 씹는 장면 없이 좀비물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좀비는 단순한 괴물 이상을 상징한다.

많은 좀비물에서, 주인공들이 처음 맞닥드리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살아있는 시체'들이 거니는 길거리에서 그들은 매 순간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를 재정의해야 한다. 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극도로 희미해진 세상에 홀로 서 있다. 그들은 이 혼란을 떨쳐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원래의 세계를 찾아 떠난다. 진짜 '살아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러나 명작 좀비물들은 대개 이 만남의 과정을 아름답게 그리지 않는다.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워킹데드'의 주인공 릭 그라임즈의 여행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병원에서 홀로 살아 남은 릭이 아내와 아들이 살고 있는 캠프를 처음 찾았을 때, 그는 캠프에서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는 정상 세계의 파편을 목격한다. 그 곳엔 물이 있고 먹을게 있다. 그리고 살아남은 가족이 있다. 사람들은 숲 속에 숨어 살며 라이플의 보호를 받는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카니발을 극복하기 위해선 살아남은 사람들간의 연대가 유일한 해답이다. 캠프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인간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캠프에선 매일 밤 희망의 모닥불이 피어 오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둘일 때, 둘이 아니라 셋일 때 더 사악해진다. 연대는 인간성을 회복시키지만 그 인간성에 욕망과 이기심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다. 집단은, 거의 예외없이 악을 생산해 낸다. 

안전할 것으로 믿었던 캠프가 좀비들의 습격을 받아 사랑했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캠프를 옮겨야 되냐 말아야 되냐를 놓고 의견 다툼을 벌이던 릭과 셰인(주인공의 절친)의 갈등이 더 첨예화 된다.  

릭은 이 갈등의 씨앗이 자신의 아내 로라와 셰인과의 의문스런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애써 무시한다. 릭은 여전히 셰인을 친구로 여긴다. 그러나 로라를 뺏긴 셰인의 상실은 너무나 크다. 셰인은 릭만 혼자 병원에 놔두고 왔다는 죄책감에 누구보다도 로라와 그의 아들 칼의 안전에 힘써 왔다. 그는 자신이 릭을 대신해 훌륭한 남편과 아빠가 될 수 있을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의 눈 앞에 릭이 찾아온 것이다. 친구의 생환을 진정으로 기뻐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마음 놓고 기뻐하기도 그렇다고 슬퍼하지도 못하는 셰인의 마음에 균열이 생기고 악은 이 균열에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운다. 이 악을 제거하는 것은 한 발의 총알. 인간의 악은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 정화된다. 

 

 

 

캠프를 떠나 릭 일행이 도착한 곳은 교도소였다. 교도소에는 살아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간수가 아니라 죄수였다. 그때까지 교도소는 죄수들의 것이었지만 총을 가지고 있는 건 릭이었다. 릭은 죄수들로 부터 교도소를 빼앗았다. 망가진 세계에선 모든 인간이 평등해야 마땅했지만 릭은 총을 가진 인간으로서 폭력을 행사한다. 그는 '살인하지 말 것'이라는 불문율을 정해 생존자들을 보호하려 하지만 이 규칙을 제일 먼저 어기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릭은 좀비들이 습격한 혼란을 틈타 폭동을 일으킨 죄수를 살해한다. 그것은 명백한 살인이었지만 일행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리더로서의 사명감이 살인을 처형으로 정당화한다. 릭의 마음은 서서히 폭력으로 물들어 간다.  

아슬아슬 연약한 연대를 유지해오던 릭 일행은 추락하는 헬리콥터를 목격하면서 전환기를 맞는다. 릭과 두 명의 동료로 구성된 팀이 추락한 헬기를 찾아 떠나지만 헬기는 이미 누군가에게 발견된 뒤다. 릭은 근처에 또 하나의 생존자 집단이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일행은 교도소로 복귀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곳을 찾아 떠나지만 밤이 깊을 때까지 생존자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모두가 포기하고 있을 때 그들 앞에 나타난 건 교도소보다 단단한 울타리와 강력한 무기와 쌩쌩한 자동차와 전기로 보호받는 거대한 도시였다. 릭은 모든것이 갖춰진 완벽한 도시 안으로 들어선다. 눈 부신 불 빛 속에 드러난 광경은, 생존자들을 산채로 토막내 좀비에게 던져주는 '인간'들의 모습이었다.  

 

 

 

좀비물이 진짜 공포스러워 지는 순간은 바로 살아있는 인간이 좀비보다 무섭다는 걸 깨달을 때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무의(無) 세계에도 인간의 욕정과 배신과 탐욕과 이기심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깊이 깊이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새 무섭게 자라나 남겨진 자들의 목을 조른다. 차라리 좀비가 됐더라면 인간이 인간때문에 무너지는 무참한 경험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좀비는 흉측할 지언정 결코 자기들끼리 공격하지는 않는다. 동족을 짓밟는 유일한 동물은 오직 인간 뿐이다. 

저자는 만화의 서문에서 '이 책은 순전히 실제 상황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들이 자연스레 발전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라고 말했다. 내 보기에 이 말은 '실제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자연스레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라고 고쳐 써야 한다.  

좀비는 과연 무엇인가? 당신은 거울 속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당당한가? 나는 탐욕에 굶주린 시체들의 거리가 욕망에 가득찬 인간들의 거리와 무엇이 다를지 생각해 본다.  

좀비는 더 이상 괴물이 아니다. 좀비는 나이며 바로 당신이다. 좀비는 단지, 우리보다 조금 더 솔직할 뿐이다. 

  

<'만화'로서의 워킹데드> 

책을 구매하려는 사람을 돕기 위해 몇 가지 덧 붙인다.  

만화 워킹데드는 두 가지 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 첫째는 캐릭터들의 감정 묘사다. 감정의 변화란 언제나 기승전결을 갖고 서서히 나타난다. 작가는 이 감정선을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데, 어쩐지 워킹데드의 캐릭터들은 중간이 쑹텅 잘려 나간 듯 감정의 변화가 급작 스럽다. 

둘째는 컷 구성이다. 컷은 만화와 영화만이 가진 절대 무기다. 컷은 긴장과(클로즈 업) 이완을(풀 샷) 반복하면서 이야기의 역동성을 만들어 내는데, 이 만화의 컷 나누기는 심심할 정도로 기계적이다. 강약약중간약약 절묘하게 휘몰아치는 컷이 이야기를 좀 더 쥐어짜 주었다면 탄성을 지를 정도의 만화가 되지 않았을까? 

갖추지 못한 것은 이토록 아름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에는 뒷 이야기가 궁금해져 계속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강력한 마력이 있다. 터져나오는 뇌수와 내장의 파편들이 피곤할 법도 한데, 마치 피멍이 든 상처를 꾹꾹 찔러 보고 싶은 기분이 드는것처럼 손은 자꾸만 다음 권으로 향한다. 그래픽 노블 사상 최초의 밀리언 셀러라는 건 역시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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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빈의 서양고전 껍질깨기
김태빈 지음 / 도서출판 해오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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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란 제목과 줄거리는 읽히 들어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읽어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읽을 예정이 없는 책을 말한다. 또 고전이란, 보통 사람들은 고사하고 책 깨나 읽는 사람들마저 그 제목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책을 말하기도 한다. 의욕 넘쳐 구매한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은 독서를 종용하는 희망찬 송가가 되지만 곧 목구멍을 짓누르는 바위가 됐다 이내 실내 장식으로 전락하고 마는게, 이른바 '고전'이란 것의 운명인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고전이 너무 과대평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책들은 각 시대별로 최초의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의 저작인데, 아무래도 사람들은 '최초'라는 가치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최초'라는게 그렇게 대단한가? 서양 근대 문학의 물꼬는 셰익스피어가 아니었어도 결국 누군가는 틀지 않았을까? 시대를 송두리째 뒤집어 버리는 새로운 물결, 새로운 시도란게 과연 한 명의 천재적 인간의 힘만으로 가능한 걸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위대한 인간이란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기로에 들어선 시대가 우연히 빚어 내는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한권의 가치가 몇 백, 몇 천년을 이어 내려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고전이, 최초라는 재기발랄함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 역사를 관통하는 보편적 가치까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최초는 이내 구식이 되 버리지만 '보편'은 결코 시들지 않는 법이다.   

 



 

 

 

'김태빈의 서양고전 껍질 깨기'는 이 보편적 가치를 네 개의 장으로 나눈다. 그리고 이 장들에서 각각 세 권의 고전을 소개한다. 이 책의 탁월함은 바로 이 구성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시작해 세상의 모든것을 연역하려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내가 누군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래서 1장은 '나를 바라보기'다.  

 

'나를 바라보기'위해서 소개되는 책은 카뮈의 '이방인'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이다. 저자가 이 책들을 통해 제기하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고 둘째는 우리가 사회적 관습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질문을 곱씹어 보자. 그러면 어느 순간 나를 둘러 싸고 있던 익숙한 세계가 갑자기 낯설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좀더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제로는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다. 

 

철학적 사유는 바로 이 낯섬과 무지의 공포가 만들어 놓은 삶의 균열을 비집고 탄생한다. 이때 '철학적 사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괴로움을 맛보지만 동시에 우리를 둘러 싸고 있던 '당연한 진리'를 깨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흔히 이것을 '껍질 깨기'라고 부른다. 





<출처: Flickr. Sammy Naas>



'껍질 깨기'에 성공한 사람들은 비로소 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찬찬히 혹은 진지하게 그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관습에 저항하는 사람과(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껍질 안의 사람들이 미쳤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의 진정성과(셰익스피어의 '햄릿') 세계와의 육체적 다툼을 통해 그것을 긍정하는(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인간의 모습을 인식한다. '나'를 넘어 '너'를 인식하고 비로소 '우리'의 연대가 시작되는 시간. 2장의 제목은 '우리와 마주하기'다.  

 

껍질의 실체를 깨닫고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동지가 된 '나'의 두 손엔 어느새 뾰족한 망치가 들려있다. 나는 얼굴을 가까이 하여 껍질이 이루고 있는 단단한 구조의 비밀을 파악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껍질 깨기에 나선다. 튀어오르는 껍질이 얼굴에 부딪히면서 수 많은 생채기를 낸다. 손에는 어느새 굳은 살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철퇴를 휘둘러 세상을 응징'하기다. 철퇴는 생명의 위협을 피해 은근한 풍자의 모습을 띄는가 하면(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조용한 묘사 속에 묵직한 메시지를 숨겨두기도 하고(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정해진 목적과 질서 속에서 세상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신과 종교에 대적하며(호메로스 '오디세이아') '확신에 찬 이 세상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제 남은 일은 폐허가 된 세상에 새로운 꽃을 피우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인간이 소중히 간직하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탐구해봐야 한다. 또 새로운 세상 만들기라는 맹목적 목표가 다시금 두터운 껍질이 되어 인간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사태가 되풀이되는 것은 아닌지 지켜봐야 한다. 마지막 4장의 제목은 '이상으로 나아가기'다. 

 

이 책의 구성은 마치 매트릭스의 네오가 기계 군단의 억압으로부터 세계를 구원하는 여정과 닮아 있다. 네오가 모피어스의 빨간약을 먹고 '나'와 '세계'의 진실을 인식한 뒤 마침내 시온이라는 이상을 지켜냈듯이 독자는 고전이 풍기는 시큼한 방부제 냄새를 맡으며 나에서 우리로 우리에서 세계로 그리고 마침내 이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 받는다. 

 

 

 






저자는 한성여고에서 문학과 논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문장은 구어체로 읽기 쉽게 씌여졌다.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의 고전을 이렇게 쉬운 글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선생님은 그렇게 흔치 않다. 만일 내가 고등학교 때 이런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60세로 계획한 노벨 문학상 수상을 적어도 10년은 단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시나 자신이 읽지 않은 책을 소개한다고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저자는 매 챕터마다 등장인물과 가상 인터뷰를 진행하며 책의 줄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영리함을 보인다.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봐! 

 

보너스로 각 챕터의 마지막 부분에는 고등학생이 쓴걸로 보이는 감상문이 실려 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라고 해서 만만히 봤다간 큰 코 다친다. 몇몇은 정말 기가 죽을 정도로 잘 쓴 글들이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에게 논술을 지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활용해 보는 것을 강력 추천한다.  

 

Education의 어원은 '무언가를 이끌어 낸다'라는 것이고 인류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진실의 출산을 돕는 산파로 자처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선생 김태빈'은 Education의 화신이자 진정한 산파다. 내 일찍이 허풍으로 이름을 날려 뭇 사람들을 불신의 세계로 몰아 넣은 전력이 있으나, 그대여 이번만큼은 나의 진심을 알아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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