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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평점 :
내가 이과를 선택한 이유는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 얘기는 지난 <생물학의 쓸모>에서도 한 적 있다. 그런 감수성으로 이공계의 메인스트림을 맞닥뜨렸을 때? 솔직히 나쁘진 않았다. 아마도 내가 이 분야들을 이야기의 관점으로 접근했기 때문인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나는 확실히 특정 분야 그 자체보다는 그것에 대한 '역사'를 더 좋아했다. 철학보다는 철학사, 과학보다는 과학사, 수학이 아닌 수학사, 기타 등등.
양자역학이 어쩌고 저쩌고, 데카르트가 어쩌고 저쩌고, 파인만이니, 파동함수니, 쿼크, 힉스, 페르미, 라마누잔, 가우스 아무튼 그들의 연구는 단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만 줄줄이 읊고 다니던 시절.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창피하지는 않다. 링 위에서 뛸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우러러보고 사랑하는 마음을 무시한다면 우리네 평범한 인간은 모두 경멸 속에서 살아야 한다. 과학을 존경한다면 그걸 사랑하는 이도 존경받아야 한다.
나는 비록 본성을 거스른 일련의 선택 덕분에 수많은 수학, 과학 교양서를 거쳐 여기까지 왔지만 다른 문과생들은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유시민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생 문과들과 어울려 살았다. 공부를 할라치니 아는 과학자가 없어서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닥치는 대로 살아온 인생과 같이 우연히 마주친 과학 교양서를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꽤 많은 과학책을 읽은 문과생이 되었다.
유시민 작가의 말에 따르면, 공부는 그렇게 해도 되지만 남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 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다. 과학과 인문학은 연구 대상과 방법이 다르고, 쓰는 말과 사고방식도 같지 않다. 과학자는 현상을 관찰해 가설을 추론하고, 실험과 분석으로 그것을 검증한다. 하지만 결과를 이야기할 때는 그 반대다. 이를테면 양자역학이 무엇인지 밝히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는 세상을 만드는지 설명한다. 바로 이 순서가 문과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다.
물리학자도 잘 모른다는 양자역학을 제일 먼저 공부하라는 것은 '문과 학대'일 수 있다.(p. 290)
문과의 고충을 잘 아는 저자는 정확히 반대로 과학을 시작했다. 위대한 철학이든 사상이든 인간의 정신은 모두 뇌활동의 결과다. 그래서 시작을 뇌과학으로 했다. 그러면 생물학에 관심이 생기고 생명 현상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 화학을 들여다보게 된다. 원소주기율표를 이해하려면 양자역학을 알아야 하고 그러다 보면 우주론이, 바로 그 우주를 기술하는 언어인 수학에 호기심이 생긴다.
그래서 이 책은 정확히 이 순서를 따른다. 문과생이 과학책을 읽고 정리한 내용을 모은 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는 그 어떤 과학책보다 명료하다. 중언부언이 없고,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지의 소치라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다. 알면 알수록 모르게 되는 것이 학문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호쾌함에 어딘지 모를 믿음이 생긴다. 최근에 이런저런 방송에 나오며 여러 과학자들을 사귀고, 그들이 감수까지 봤다고 하니 그냥 써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는데, 하물며 유시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