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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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김연수를 모른 척해왔다. 유명세에 비례해 손이 가지 않았고, 묘한 거부감이 있었다. 여성 작가의 글을 잘 읽지 못하는 편이다. 특히 풍부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할수록 따라가기가 어렵다. 읽어본 적 없으면서도 김연수에게는 비슷한 결이 느껴졌다. 하루키스러운 제목도 불호 리스트에 올리는 데 한몫 거들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니. 세계의 끝에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는 와중에 몇 권의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장편 한 두 개, 단편 두어 개. 첫 장편을 읽었을 때, 확실히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감성의 결은 비슷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다. 흥미롭고 매듭이 잘 지어져 있었으며 특히 훅하고 다가와 심장을 찌르는 펀치라인이 절묘했다.


<오래된 미래>와 <너무나 많은 여름이>. 평생 김연수의 책을 이렇게 짧은 기간 안에 연달아 읽은 적이 없었다. 이 연속적이고 우연한 기회를 통해 나는 이 남자를 완전히 받아들이게 됐다. 그의 작품은 압도적이고, 나는 김연수를 좋아한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한국 단편 소설들이 갖는 가학적 글자수 제한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원하는 만큼 쓰고, 끝내야 할 때가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이 쿨함에 얼마나 신났는지 모른다. 책장을 넘기는 손은 가벼웠고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에 등장할 이야기를 기다렸다.


이 소설들은 낭독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제주문화재단의 초청으로 가파도의 레지던스에 머물고 있었던 때라고 한다. 낭독회는 체류 작가들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해가 저물면 가파도의 제주 시민들이 하나씩 서점을 찾아 들어온다. 중년 여성들이 많았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인문학서를 읽는 독서 모임의 회원들이라고 했다. 캄캄한 밤 위로 희미한 조명을 켠 뒤 평생 보고 살 일 없었던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서로에게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듣는다. 한 사람은 소설을 읽고, 한 사람은 침묵으로 대답한다.


현실에는 낭만이 끼어들 데가 없지만 멀리서 지켜보는 이 모습에 나는 자꾸만 몽글몽글한 색을 입히게 된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그런 소설들이다. 책의 마지막에는 낭독회에서 같이 튼 음악 리스트도 있으니 찾아서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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