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 위스키의 향기를 찾아 떠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성지여행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윤정 옮김, 무라카미 요오코 사진 / 문학사상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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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 여행>의 신판이다. 페이지는 6쪽, 무게는 9그램이 줄었다. 풀컬러에 빳빳한 종이다. 글보다 그림이 많아 숨 쉬듯 읽을 수 있다. 나는 구판과 신판을 모두 소유했고, 당연히 둘 다 읽었다.


그런데 느낌이 이렇게 다를 줄은. '위스키 성지 여행'을 읽었을 때는 이제 막 싱글 몰트에 입문했던 때라 좀 더 심취했달까? 우와, 우와 감탄사를 연발하며 위스키 진열장을 뛰어다니던 초심자의 열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쪽수도 훨씬 많았다고 기억했다. 신판은 구판의 내용을 발췌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유는 아마도 내가 위스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탓일 테다. 그때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술들이 줄줄이 나왔겠지만 지금은 이 중 모르는 브랜드는 하나도 없고, 심지어 마셔보기까지 한 게 꽤 되니까, 좀 더 차분한 마음으로 그렇지,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당시 쓴 서평을 보니 내 최애 싱글 몰트는 글렌모렌지 시그넷, 꼬냑은 까뮈 X.O였다. 지금도 그런가 하면, 글쎄 고민을 하게 된다. 싱글 몰트가 아니면 안 마시던 시절도 있었는데 최근에 히비키를 마시고 완전히 생각이 달라졌다. '이런 게 가능하다니!' 싶을 정도로 전율이 이는 맛이었다. 아일랜드 위스키가 궁금해 우연히 마셔본 부쉬밀도 기가 막혔다. 확실히 나는 부드러운 목 넘김에 알코올향이 강하지 않은 걸 좋아한다. 꼬냑은 미안하지만 헤네시로 갈아탔다.


당시엔 싱글 몰트보다도 꼬냑을 좋아했지만 지금 당장 바텐더가 '한 잔 줄까?'라고 물으면 '히비키'하고 답할 것 같다. 시간은 흐르고, 경험은 쌓이고, 인간은 바뀐다. 그래도 바뀌지 않은 게 있다면,


"You need cube?"라는 질문에

"No thanks. With just water, please."라고 대답한다는 것. (p.83)


이 책을 읽고 위스키에 너무 환상을 가지면 안 된다. 향과 풍미가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쓰디쓴 알코올임에는 변함이 없다. 하루키는 아드벡을 향해 '영혼의 한 가닥 한 가닥까지 모조리 선연하고 극명하게 부각하는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p.43)이라 말하지만 위스키를 마셔본 적이 없고, 있더라도 피트가 없는 온화한 계열을 즐겼다면, 당신이 아드벡을 마신 뒤 내놓을 감상을 나는 100% 예상할 수 있다.


우웩!!!!!


세상은 넓고, 술의 세상은 더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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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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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미국을 향한 음모>는 대담한 가정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홀로코스트가 미국에서 벌어진다면?'


일본의 생체실험과 더불어 20세기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 꼽을만한 홀로코스트. 역사는 그것이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닌 독일에서, 나쁜 독일인들에 의해 벌어졌음을 실증한다. 놀라우리만치 사악한 히틀러와 소름 끼칠 정도로 정교한 나치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누가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한나 아렌트에 분노했다. 1960년 이스라엘의 첩보 기관 모사드가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평화로운 삶을 살던 나치 친위대 장교, '파이널 솔루션'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납치하여 이스라엘로 압송한다. 이스라엘은 그를 기소되어 1961년 공개 재판이 열렸는데 이를 참관한 한나 아렌트가 당시의 경험을 엮어 낸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한나 아렌트의 핵심은 잔인했다. 그녀에게 악행은 악마가 아니라 평범하고, 성실하고,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볼 땐 선하기까지 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것이었다.


'악의 평범성'


약간의 조건만 갖춰진다면 누구나 홀로코스트의 열렬한 실행자가 될 수 있다. 남의 전쟁에 불과했던 싸움에 뛰어들어 용감하게 나치를 무찌른 미국인들도? 나치의 가장 큰 적이자 홀로코스트에 누구보다 분노했던 그 선한 양키들이? <미국을 향한 음모>는 이 가정이 전혀 지나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이 소설은 정말로 '공상'이라 부를 만큼 완전한 거짓말로 문장을 쌓아나가지만 그 이야기는 무서울 정도로 현실감이 있다. 이것은 진짜 벌어진 일, 너무나 완벽해서 가짜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페이크 다큐다.


필립 로스는 이 소설이 출간되기 전 뉴욕 타임스의 요청으로 에세이를 기고한다. 그 글에서 필립 로스는 미국의 33대 대통령을 린드버그로 만든 역사적 사실의 변형 이외에는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사실적으로, 논픽션을 쓰듯이 쓰고자 했다고 밝혔다. 또 역사적 실존 인물들이기도 한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놀랍고, 아름답고, 충격적으로, 하지만 그럴법하게 행동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이 대가는 자신이 말한 그대로, 한치의 어긋남 없이 문장을 직조하여 완벽한 거짓을 파렴치한 현실로 만들어낸다.


정말 대단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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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기 - 세상을 내 편으로 삼는 법
오후 지음 / 생각의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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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언의 책이다. 시원하고 호쾌하다.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기보다는 인간 세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미지가 세상을 지배하는데 왜 이미지와 싸워야 하는가? 따라야 한다. 이용해야 한다. 성공을 하려면 이데아에 모신 절대윤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칠 게 아니라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게 '옳다'는 게 아니다.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것이다.


심장에 찔린 듯 날카로운 문장을 하나 소개한다.


사람들은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참지 못한다.(p. 40)


환경운동가나 각종 공익 캠페인을 벌이는 사람들은 이 문장을 손바닥에 적어놓고 틈날 때마다 읽어야 한다. 기후 위기가 심각하니 정부가 차량 5부제를 시행한다고 하자. 아마 이 정부는 다음 선거에서 대패할 것이다. 사람들은 망가지는 지구에 대해선, 그게 사라지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존속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그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뿐이지만 자신이 감수해야 할 불편에는 치를 떤다.


실리콘 벨리에서 프리우스와 테슬라가 대인기를 끌었던 것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전기차를 몰면서 쿨하고, 진보적이고, 심지어 더 윤리적이라는 '이미지'를 얻어갔다. 전기차가 대의를 강조하는 상품이었다면 아마 오늘날의 테슬라는 없었을 것이다. 테슬라는 우리 내면의 욕망과 허영을 완벽하게 이해한 기업이다.


살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세상 많은 일은 운이며 그 운에는 겉보기가 쓸데없이 중요하다는 것이다.(p. 7)


쓸데없이 중요한 것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쓸데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게 진짜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한때 카카오는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기업이었다. 문자 메시지의 시대, 한 건에 30원이나 하던 커뮤니케이션 비용은 카톡의 등장으로 거의 0원이 됐다. 사람들은 거기서 연락을 하고, 업무를 보고, 선물을 주고, 송금을 한다. 생활의 모든 편의가 단 한 개의 앱에서 제공됐다. 수익성 측면에선 최전성기를 누리는 지금도 네이버보다 작은 회사지만, 사람들은 카카오를 더 큰 기업으로 생각했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세계에서 더 크다는 건, 더 좋다는 걸 의미한다.


카카오는 정보 부족과 인간의 몰이해 그리고 환상이 만든 신기루였다. IDC 화재로 실질적인 불편을 겪자 신기루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편의를 제공하던 시민의 친구 카카오는 어느새 국민의 선택을 억압하는 독재자가 되어버렸다.


이게 바로 세상이다. 보여주기는, 거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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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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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의 책날개 사진을 통해 처음으로 제임스 설터의 얼굴을 봤다. 잘 생긴 미국인이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방탕하고, 허무한 남자 주인공들의 얼굴과 은근히 겹쳐지면서, 또 묘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제임스 설터는 그 남자들보다는 좀 더 남성적이었다. 티모시 살라메가 아니라 브래드 피트에 가까웠다.


1925년 뉴욕에서 태어난 제임스 설터는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다. 비행 중대장까지 지냈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이때의 경험을 살려 데뷔 장편 <사냥꾼들>을 내놓는다. 평은 시원찮았다. 나는 좋았다. 이후의 소설들은 완전히 달랐다.


제임스 설터를 제임스 설터로 만든 건 <사냥꾼들>이 아니었다. <고독한 얼굴>은 <사냥꾼들>에 더 가까운 소설이다. 원래 이 소설은 영화 시나리오로 집필됐다. 영화화되지 못하자 소설로 다시 썼다. 화면으로 봤다면 굉장히 지루했을 것이다. 강렬한 사건은 없다. 이 정도 이야기를 맡을만한 감독이 누가 있을지 생각해 본다. <디 아워스>의 스티븐 달드리. <디 아워스>는 마이클 커닝햄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원작 소설이 얼마나 지루한지를 알고 나면 스티븐 달드리가 신처럼 느껴질 것이다. <Running on Empty>의 시드니 루멧도 떠오른다. 고독을 주제로 결을 맞춘다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토마스 알프레드슨도 맡길만하다.


<고독한 얼굴>은 산악인의 이야기다. 별 직업도 없이 이 여자 저 여자를 떠돌아다니며 산을 오르는 남자. 배경은 몽블랑. 설산과 거대한 빙벽. 인간의 나약함을 가장 철저하게 알려주는 장소. 주인공 랜드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경로를 찾아 몸을 던진다. 때론 친구들과 함께, 주로는 혼자서. 친구들 중 둘이 떨어졌다.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크게 다쳤다. 랜드는 살아남았고, 홀로 남았다.


산을 오르는 이유가 뭘까? 산은, 오를 때만큼 내려올 때도 용기가 필요하다. 실패했다는 자괴감을 떨쳐낼 수 있어야 한다. 중간에 내려왔다면,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것이 낫다. 하지만 기자들은 실패에도 플래시를 터뜨린다. 실패의 이유를 묻는다. 대답할 마음이 들지 않지만 해야 한다. 그들은 실패를 먹지만, 성공은 더 잘 먹기 때문이다.


소설은 몽블랑에서 불어오는 바람만큼 서늘하고 간결하다. 잡내가 없다. 해야 할 말만 하고,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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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 이야기 - 보급판
리처드 파인만 강의, 폴 데이비스 서문,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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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파인만은 칼텍의 1~2학년 학부생들에게 물리학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른바 '물리학의 정석'을 이제 갓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강좌의 수강생은 180명이었고 일주일에 두 번 진행했다. 대형 강의실에 모여 수업을 한 뒤 15~20명의 소그룹을 이뤄 조교의 지도하에 토론하는 시간도 있었다. 실습은 매주 한 번이었다. 강의의 목적은 당연히 신입생들에게 물리학의 재미를 알려줌으로써 그 관심이 꾸준히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다들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 정말 사랑해서, 열심히 배우기 위해 대학에 왔는데 내용은 너무 어렵고, 교수는 우리가 이미 다 아는 것처럼 강의를 하고, 실생활과는 아무런 연결도 없는 순수한 이론 덩어리들을 주입받으면서 느끼는 소외감. 파인만은 이 강의가 '목적 없이 끌려가는 수업'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파인만은 강의의 목적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어려운 개념이라도 쉽게 풀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유머와 위트는 청량감을 더해 무게를 더는 핵심 소스였다. 언제나 신선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그의 태도는 학생들로 하여금 내용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까지 배우게 했다.


이 전설의 강의는 총 52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는 그중 수식이 적고 내용이 쉬운 것을 6개만 추려 담은 책이다. 내용이 '비교적' 쉬운 것이지 마냥 쉬운 건 절대 아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소파에 앉아 가볍게 읽는 건 불가능하다. 말만 물리 이야기지 그냥 물리다.


파인만 자신도 이 강의의 성과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부생의 입장에서 볼 때는 결코 훌륭한 강의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학생들이 제출한 시험답안지를 볼 때, 아무래도 이 강의는 실패작인 것 같다. (중략) 강의실에 들어왔던 동료 교수들의 말에 의하면, (중략)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은 학생이 10~20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p.33)


무려 '칼텍'의 수재 중에서도 5~10% 되는 최상위 학생들만 이해할 수 있었던 수업을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흡수할 수 있겠는가! 이 강의는 오히려 동료 교수들과 대학원생에게 더 큰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읽고 또 읽으면 언젠가 이 여섯 가지 물리 수업도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올 수 있을까? 그래도 문제에 접근하는 파인만의 방식은 충분히 곱씹을만하다. 아주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해 법칙을 빌드업한 뒤 현상을 해석하는 능력. 이런 지능을 갖출 수 있다면 세상 무서울 게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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