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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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하루키다. 단숨에 읽어 치웠다. <색채개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거창해 보이지만 소소한 내용이다. 그런데 거기에 감탄할 만한 이야기의 힘이 있다.


하루키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스르륵하고 다른 세계로 미끌어져 들어가는 지점이 있다. 긴자의 대로를 걷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색채와 분위기, 공기의 맛이 전혀 다른 긴자가 펼쳐진다. 독자는 하루키가 부는 피리의 선율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 공간에 발을 딛는다. 이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러나 곰곰히 생각을 집중하면 이 곳이 이세계(異世界)라는 게 또렷이 드러난다.


다자키 쓰쿠루라는 남자와 그가 고등학교 시절 만났던 네 명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다섯은 그 나이 대의 청년들만이 지닐 수 있는 낭만적 이상에 따라 한점 "스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를 구성한다. 남자 셋 여자 둘. 쓰쿠루와 아카마쓰와 오우미와 시라네와 구로노. 빨강(아카)과 파랑(아오)는 남자. 하양(시로)와 까망(구로)는 여자. 쓰쿠루만이 유일하게 색채가 없는 남자다.


혈기 왕성한 남녀가 모였지만 그들에겐 이성간의 관계 발전을 자제하는 암묵적 룰이 있었다. 우정은 영원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으니까.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는 그렇게 유지된다. 그러나 조화로운 공동체는 쇳가루 맛이 나는 세상의 바람을 맞기 전에나 유지 가능한 법이다. 그들도 나이를 먹는다.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나야 할 시기가 오는 것이다. 쓰쿠루를 제외한 넷은 아직 그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나고야에서 대학을 다니기로 결심한다. 오로지 색채가 없는 쓰쿠루만이 도쿄의 공대에 진학해 공동체를 이탈한다. 물론 공동체는 변함없이 유지됐다. 그들의 우정은 신칸센으로 한 시간 반 만에 건널 수 있는 거리에 무너질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빨강과 파랑과 하양과 까망, 아카, 아오, 시로, 구로는 일방적으로 쓰쿠루와의 절교를 선언한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공기의 맛이 다른 이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아마도 이런 점이 하루키를 이토록 오랜 시간 대중적 지지를 받는 작가로 만든 힘인 것 같다. 알쏭달쏭한 이야기, 복잡한 메타포, 상징, 다채로운 해석. 소설에게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한 가지는 도대체 다음 페이지에 뭐가 써 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다. 하루키에겐 그 힘이 있다.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일본 남자의 절교 사건을 궁금해 해야 하는가? 따지고 보면 그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평범하고도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가 왜 내 마음을 잡아 당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정말? 조화로운 공동체가 쓰쿠루에게 내린 절교 선언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같이 떡볶이를 먹고, 땡땡이를 치고, 오락실을 다니고, 숙제를 안 해 복도를 오리 걸음으로 걷던 내 오랜 친구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나는 한 번도 그 친구들에게 절교를 선언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내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져 오로지 기억 속에서만 머무른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그 가능성은 현실의 칼날을 거쳐 몇 가지 실현 가능한 범주로 좁혀진다. 날카로운 가위가 싹둑 싹둑 필요 없어진 가지들을 잘라낸다. 당신은 인생이 다양한 경험을 하나 하나 축적해 나가는 풍요의 과정이라 믿고 싶겠지만, 냉정하게 말해 인생이란 가슴 깊숙이 간직했던 따뜻한 무언가를 조금씩 조금씩 잃어버리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자키 쓰쿠루의 상실은 그저 개인적 체험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미 우리는 그의 가슴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상처를 우리의 마음 속에 갖고 있다. 순례를 떠나야 하는 건 다자키 쓰쿠루만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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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한 생각들 -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52가지 심리 법칙
롤프 도벨리 지음, 두행숙 옮김, 비르기트 랑 그림 / 걷는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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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사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그 동안 전혀 읽지 않았던 종류의 책들을 많이 보리라 다짐했다. 예컨대 '삼성 경제 연구소'가 추천하는 'CEO'가 여름 휴가 때 들고 가는 책'들 말이다.


나는 지난 <괴짜 경제학> 리뷰에서 이런 류의 책만을 읽어선 결코 이런 류의 책을 쓸 수는 없을 거라고 말했다. 내 말은 틀렸다. 쓸 수 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잘.


CEO들이 하고 많은 날 중에 유독 여름 휴가를 골라 책을 읽는 이유는 평소엔 끔찍이도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바뻐, 할 일이 많아, 시간이 없다. 그래서 휴가 때라도 좋다는 책을 읽어야지. 그런데 어려운 건 안 된다. 내러티브가 있는 것도 곤란해. 원 포인트 레슨. 실용적인 것만 콕 집어. 쉽게 쉽게 가자. 


요구가 명확하면 만드는 것도 훨씬 쉽다. 게다가 그 요구는 대체로 변하는 일이 없어 제작 단계를 공정화 할 수 있다. 이른바 지식의 대량 생산. 교양으로 만드는 패스트푸드! 이것이 바로 이런 류의 책만을 읽고도 이런 류의 책을 쓸 수 있는 이유다. 자 그럼 우리도 한 번 만들어 볼까? 


버거킹, 맥도날드, KFC에서 햄버거를 시킨다. 빅맥 빵을 조리대 위에 놓는다. 버거킹에서 빼낸 할라피뇨와 치즈를 깔고 KFC에서 건진 징거 패티를 착. 이제 남은 야채를 적당히 섞어 그 위에 놓고 빅맥 빵을 덮어 마무리하자. 어? 그런데 내 햄버거는 팔리지 않는다. 이상하다. 내가 만든 햄버거를 먹어 본다. 맛은 비슷한데, 브랜드가 없구나! 


내용 자체는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누구나에게 만들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자격은 현란한 학위와 경력이다. 이 마법의 물약을 끼얹고 나면 책은 비로소 반짝 반짝 빛나는 권위의 훈장을 달게 된다. 이제 남은건 유력 언론사와 동류의 작가들이 보내는 두 줄 짜리 리뷰다. 그것으로 서빙 준비 끝. 완벽한 플레이팅이다.


이런걸 보면 인간은 좋은 생각만으로는 어지간해서 설득 당하지 않는 것 같다. 경험으로 증명해야 한다. 가시적 성과가 있어야 한다. 의견을 진리로 보이게 하는 권위가 필요하다. 세이버 매트릭스의 대부 빌 제임스가 딱 그렇다. 메이저 리그 구단들은 빌 제임스의 기가막힌 통계 이론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가 야구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는데다 번듯한 직장이나 학위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 제임스의 의견을 편견없이 받아들인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빌리 빈은 아메리칸 리그 최대 기록인 20연승을, 보스턴 레드삭스는 끔찍했던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84년 만에 메이저 리그 우승을 거머쥔다(이 이야기는 영화 <머니볼>에 잘 묘사되어 있다).


<스마트한 생각들>의 저자는 롤프 도벨리. 독일에서 가장 냉철한 경영자이자 위트있는 작가로 손꼽힌다고 한다. 그래서 더 컴팩트하다. 그래서 더 깊이가 없다. 원래 이런 책들은 유명한 교수님들이 자주 쓰는데 그 세계에선 나름 실험에 의한 검증이(혹은 통계에 의한) 보편화 되어 있어 근거가 확실한 편이다. 저자는 아무래도 학자가 아니다보니 그런면에서 많은 취약점을 드러낸다. 나쁘게 말해 이 책은 인간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흔히 저지르는 심리학적 오류들을 여기 저기서 긁어 모아 짜깁기한 사례모음집이고 아무리 좋게 봐줘도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CEO의 '자기' 경험담 이상을 넘어설 수 없는 책이다. 흥미롭진 않지만, 그럭저럭 재밌게는 읽을 수 있다. 심리학과 성공은 언제나 먹히는 키워드니까.


롤프 도벨리는 중요한 의사 결정에 앞서 이 책에 언급한 생각의 오류들을 쭉 써놓고 혹시 자기가 이 중 한 오류에 빠지진 않았는지 확인해 본다고 한다. 앎을 실천으로 옮기는 좋은 습관이다. 나도 첫 사업에 실패한 후 실패의 이유를 메모장에 적어 매일 아침 읽었던 적이 있다. 그 메모의 제목은 '나는 왜 멍천한가'였다. 항목은 무려 마흔 세 개 였다.


이 책은 뻔한 얘기를 반복한다는 혹평을 받을만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들은 너무 당연한 탓에 우리의 주의를 끌지 못하고, 그로인해 우리가 항상 멍청한 실수를 반복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책들의 목적은 뻔한 얘기를 진지한 얼굴로 함으로써 의식 속 깊숙히 묻혀 있던 진리를 주의의 역치 위로 올려놓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행인으로부터 '너는 결국 죽어'라는 말을 듣고난 뒤 평생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 한 남자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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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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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는 어렵다. 한병철의 글은 선언과 설명이 번갈아 가며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글을 쓰는 것 같다. 그래서 독해는 오래 걸린다. 철학에 대한 한병철의 관점을 생각해 봤을 때 이는 의도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에게 철학은 오래 머물러 숙고할 기회를 주는 학문이다. 읽자마자 이해가 되는 글은 투명한 글이다. 거기엔 깊이가 없다. 하나 하나 껍질을 벗겨 의미의 속살을 깨물어 먹는 묘미가 없다. <투명사회>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불투명한지를 자랑한다.


그의 책을 어렵게 만드는 두 번째 이유는 통념의 역전이다. 철학은 원래 저항의 학문, 의문의 학문이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당당히 질문을 던지는 것. 한병철은 이같은 철학의 본질을 극단까지 몰고 간다. 그의 사상은 너무나 독특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당연했던 세계가 무너질 때 우리는 엄청난 감정의 소모를 경험한다. 한병철의 철학은 우리를 탈진하게 만든다.


한병철은 부정성의 철학자다. 부정성이란 무엇이냐, 지난 수 세기 동안 우리가 싸워왔던 질병, 무지, 억압, 독재, 착취 등 세상의 온갖 나쁜 것들을 떠올리면 된다. 한병철은 인류의 문명이 이같은 부정성을 몰아내는 방향으로 진보해 왔다고 말한다. 성과는 훌륭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오래, 더 편하게, 더 자유롭게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 사회의 병폐들이 오히려 부정성이 사라진 바로 그 공간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부정성을 없애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싸워야 할 부정성이 남아 있지 않다. 이렇게 얻은 자유의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유가 어떻게 인간의 짐이 될 수 있는지, 그리하여 왜 인간이 그 숭고한 가치를 버리고 독재의 품 안으로 달려가는지를 밝힌 바 있다. 자유란 "사람들에게 각자의 삶에서 어떤 뜻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냐에 대한 대답까지 자도으로 주는 것은 아니었다."(p.230. 역자 해제 중).


"투명사회에 대한 한병철의 비판은 이러한 부정성의 사상을 시각적-인식적 차원으로까지 밀고 나간다. (중략) 모든 것을 손쉽게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으로 전환해주는 디지털 기술은 시각적-인식적 부정성의 축소 내지 제거에 기여한다."(p.231. 역자 해제 중)


우리는 현대 사회를 정보 사회라 부른다. 정보 사회에서는 정보의 유통이 부를 창출한다. 오늘날 정보의 유통 속도가 광속을 지향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더 빠른 유통은 더 많은 유통을, 더 많은 유통은 더 많은 돈을 야기한다. 그래서 정보는 투명해야 한다. 메타포를 포함하는 정보, 비밀을 간직한 정보, 은밀히 암시하는 정보, 즉 해석이 필요한 정보는 우리 앞에서 멈춘 채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선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긴 글이 읽히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쉽게 풀어내야 한다는 강박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숙고와 사색은 정보 유통의 최대 적이다. 수용하는 즉시 '좋아요'로 반응할 수 있는 것들만이 유통될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더 이상 해석을 원치 않는다. 사실 해석은 비밀로 둘러싸인 텍스트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가는데서 쾌락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해석은 일종의 에로티시즘이다. 하지만 정보는 투명하다. 그것은 이미 다 벗은 채로 세상을 돌아다닌다! 한병철이 현대 사회를 "포르노 사회"로 명명하는 것도 그래서 납득이 된다. 은밀한 가림과 유혹이 사라진 알몸 사회. 즉각적인 충동과 외설만을 감각하는 사회. 우리는 진정한 쾌락을 느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관점에서 나는 찌라시가 왜 그토록 빠르게 유통되는지 생각해 보려 한다.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또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찌라시는 불투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그것은 네트워크를 타고 전염병처럼 번져 나간다. 이유가 뭘까? 찌라시는 일종의 폭로고 폭로는 투명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람의 이면을 드러낸 것처럼, 가면을 벗겨 낸 것처럼 말한다. 이것은 너무나 어설픈 연기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왜? 인간은 사실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은 게 사실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남의 속살을 보고 싶은 추악한 욕망, 타인을 발가벗겨 모욕하고 싶은 더러운 욕망이 우리의 착각을 부채질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엉망으로 만드는 게 정치인이라는 사실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에게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 한병철은 "그렇다"고 말한다. 우리가 권력자에게 투명성을 요구하는 이유는 그들은 우리를 속속들이 보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리 몰래 죄를 지어도 끝내 법의 심판을 받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투명성에 대한 요구는 더 진실된 사회, 더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상호 감시의 사회'를 만들 뿐이다. 한병철은 신뢰가 "오직 지와 무지의 중간 상태에서만 가능하다."(98p) 고 말한다. 우리가 이미 모든 걸 투명하게 보고 있다면 어떻게 신뢰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신뢰가 아니라 판단일 것이다. 그러니까 신뢰는 결코 투명함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투명하리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투명성을 부패와 정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사람은 그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p.14). 


투명한 것이 옳은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가 정말로 투명해져야 한다면 세상에서 개성은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은 더이상 자신의 독특함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독특한 소수는 평범한 다수에 의해 억압받고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인간들만 존재하는 획일화된 사회,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전체주의 사회, 그것이 바로 투명사회의 종착지다.


우리는 타자의 불투명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타자를 투명하게 만들려는 의도에는 다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 거기엔 피아를 구분하려는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관동 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발음이 어려운 일본어를 시켜본 뒤 잘 못하면 조선인이라 판단해 무조건 살해했다(당시 일본인은 지진의 혼란을 틈타 조선인이 폭동을 저지른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그들은 누가 일본인이고 누가 조선인인지, 


투명하게 알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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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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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걸작이라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나와도 인연이 많은 야구팀이다. 나는 삼미의 후신인 청보 핀토스(뻐드렁니를 한 당나귀가 마스코트 였던 것 같다. 프로 스포츠에 당나귀라니!)와 태평양 돌핀스(당나귀 보다는 백 배 정도 귀여운 돌고래. 하지만 야구는 육지에서 한다.)를 응원하며 자랐고 그 후신인 현대 유니콘스(삼미에 뿌리를 두고 있는 팀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만큼 강팀으로 세상에 등장한 첫 해 한국 시리즈에서 준우승하는 기염을 토한다)의 우승을 지켜보며 야구를 떠난 사람이다. 왜냐고? 너무나 막강한 이 팀이 도저히 나의 팀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삼미와 청보와 태평양은 그 누구보다도 패배에 익숙한 팀이었다. 나는 그들이 7개의 팀 중 5위를 할 때 또는 8개의 팀 중 6위를 할 때 가장 기뻤고 꼴찌들과 접전을 벌여 가까스로 최하위를 탈출할 때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다. 물론 태평양 돌핀스가 기적적으로 2등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건 일종의 휴가 같은 것이었고 휴가는 본디 길지 않은 법이라 그들은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최하위의 진흙탕 속을 뒹굴었다. 이런 팀이 유니콘을 타고 한국 시리즈를 질주했으니 내 배신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겠지?


나는 가끔 생각한다. 어쩌다가 내 몸 속에 패배자를 사랑하는 피가 흐르게 됐는지를 말이다. 태어날 때 부터 받은 저주의 피일까? 아니면 불행히도 인천에서 태어나 그들을 응원하게 된 탓에 나도 모르는 사이 스믈스믈 피 속으로 스며드는 패배의 DNA를 받아들이게 된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피가 지독할 정도로 강력한 기운을 띄고 있어 도저히 씻어낼 수 없다는 걸 안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일등을 해 본 적이 없고 한 번도 강팀을 응원해 본 적이 없으며 한 번도 주류 사회에 낀 적이 없는 아웃사이더였다. 나는 언제나 꼴찌에게 갈채를 보내며 살아왔다.


이 소설은 세상의 모든 꼴찌들에게 보내는 위문 편지다. 작가 또한 삼미 슈퍼스타즈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삶을 산 인물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꼴찌에 대해 잘 알며 누구보다도 패배의 진실을 잘 꿰뚫는 사람이다. 그래서 박민규의 소설들은 일종의 혈액 검사지다. 당신의 중지를 바늘로 찌른 뒤 두어 방울의 피를 종이 위에 떨어뜨려보라. 그리하면 당신의 몸 속에 패배자를 사랑하는, 지독하게 끈적하고 태평한 그 피가 흐르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희한하게도 이 패배자들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아본다. 눈빛만 스쳐도 척! 게다가 이들은 은근히 잘 뭉친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둘 혹은 셋 씩 뭉쳐 있다. 청소기를 피해 어두운 구석으로 숨어 들어가 똘똘 뭉친 먼지처럼 세상의 끝없는 제거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제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고 우리를 동정할 필요는 없다. 먼지가 되 본 사람은 안다. 오히려 당신들이야 말로 우리의 동정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홍어 같은 책이다. 못 먹는 사람은 죽어도 못 먹는다. 그러나 맛을 아는 사람은, 크... 벌써 부터 입에 침이 고인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게 소설이지?"라고 생각한다. 뚜렷한 서사는 없고 말장난처럼 한없이 늘어지는 문장이 터진 봉투에서 줄줄 새는 반찬 국물처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반면 우리는 "어떻게 이게 소설이 아니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함부로 입 밖에 꺼내지는 않는다. 우리는 세계의 그림자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라 폭군 같은 태양 아래선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침묵이 이제 막 이 세계에 발을 디딘 사람들에게 "나 같은 사람은 정말 없구나"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침묵의 나선 효과. 잠깐! 그 뜨거운 태양을 피해 잠시 이 나무 그늘 아래 앉아보라. 여기 냉수건과 쭈쭈바와 방수 돗자리가 있다. 당신은 방수 돗자리에 앉아 냉수건으로 목을 훔치며 쭈쭈바를 빨아 먹는다. 그러다가 우연히 뒤를 돌아보고 순식간에 지구 보다도 커진 방수 돗자리 위에 소처럼 누워 쉬는 수 많은 삼미의 팬클럽을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의 피를 창피해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종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이제 당당히 나와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임을 인증하자.


*박민규 씨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거꾸로 보는 한국 야구사'의 일부를 표절했다고 합니다. 소설가 본인이 저작권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시절에 벌어진, 그야말로 무지의 소치임을 인정했으며 자신이 평생 안고 살아야 할 빚임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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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전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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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를 너무 믿었나보다. 675페이지 짜리 책인데 볼거리는 많지 않다. 평생 꼭 한 번 써보고 싶었다는 괴물 이야기인데, 아무래도 너무 아끼는 건 이토록 다루기가 힘든가 보다. 사랑이란 것도 적당히 평등한 관계에서 지지고 볶고 엎치락 뒤치락 해야 아름답지 한 사람이 신을 섬기듯 조심 조심 숭배해선 재밌는 사랑이 될 리가 없다.


<괴수전>은 전개가 느리다. 이제나 저제나 노심초사 괴물의 등장을 기다리는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아 이게 그거야?"라고 탄식을 할 정도로 맥 빠지게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이게 서사 기술이 가진 근본적 한계 같기도 한데, 실제로 뭔가를 자세히 묘사하면 할수록 오히려 신비감이 떨어지면서 밋밋한 존재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땐 영화가 정말 부럽다. 몇 페이지에 걸쳐 치밀하게 묘사해야 할 대상을 풀샷과 클로즈업 만으로도 끝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런 미지의 대상을 묘사할 땐 그 모습보다는 행동을 기술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예컨대 괴물이 청와대를 밟아 무너뜨린 뒤 공무원을 하나 씩 하나 씩 집어 씹어 먹었고 꼬리로 바닥을 내리 쳐 지진을 일으켰다고 하면 이 괴물의 크기와 신체 구조 그리고 그 모습을 나름대로 상상해 나갈 것이다. 신기한 건 그 희끗희끗한 상상이 오히려 더 생생할 수 있다는 사실.


또 하나, <괴수전>은 밋밋하다. 일본 굴지의 미스테리 작가답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캐릭터를 여럿 등장시키길래 치밀하게 얽힌 이야기가 전개되겠구나 싶었는데 글쎄 이게 다 맥거핀이었다. 종장에 이르러 몇몇 반전이 있긴 하나 비밀 캐릭터들이 사실은 별 거 없었음을 무마하기 위한 시도로 느껴져 그닥 충격적이지 않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소설은 베테랑 작가의 클리셰 모음집으로 보이기도 한다. 특히 괴물을 두고 벌이는 갈등, 종장에 이르러 그것이 처리되는 방식은 어디서 한 번쯤은 본듯한 친숙한 전개임이 분명하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더 많이 읽어봐야 알겠지만, 작품 수로는 일 이 위를 다툴 정도로 많은 수를 발표하는 작가임을 고려할 때, 어쩌면 클리셰들을 완성도 있게 조합해 내는 능력이 그 왕성한 창작욕의 비밀이 아닌가 싶다. 전반적으로 <괴수전>은 보던 사람들에게 익숙한 재미를, 뭔가 색다를 충격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2% 부족할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마지막 장, 사건의 뒷 이야기를 담은 두 페이지가 충격을 던져준다. 나는 그 두 페이지를 읽는 순간 얼어 붙고 말았다. 수 십 번이고 필사해 품에 넣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 기막힌 이야기. 674페이지에서 675페이지, 딱 두 페이지에 걸쳐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도시 전설' 류의 클리셰를 똑 닮아 있지만 그 정수라 불러도 아깝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미야베 미유키로부터 이 두 페이지를 훔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전 세계의 <괴수전>에서 이 두페이지를 잘라 아무도 못 보게 하고 싶다.

  

그래서 후세에 이 글을 쓴 사람이 나인줄 알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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