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역시 하루키다. 단숨에 읽어 치웠다. <색채개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거창해 보이지만 소소한 내용이다. 그런데 거기에 감탄할 만한 이야기의 힘이 있다.
하루키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스르륵하고 다른 세계로 미끌어져 들어가는 지점이 있다. 긴자의 대로를 걷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색채와 분위기, 공기의 맛이 전혀 다른 긴자가 펼쳐진다. 독자는 하루키가 부는 피리의 선율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 공간에 발을 딛는다. 이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러나 곰곰히 생각을 집중하면 이 곳이 이세계(異世界)라는 게 또렷이 드러난다.
다자키 쓰쿠루라는 남자와 그가 고등학교 시절 만났던 네 명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다섯은 그 나이 대의 청년들만이 지닐 수 있는 낭만적 이상에 따라 한점 "스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를 구성한다. 남자 셋 여자 둘. 쓰쿠루와 아카마쓰와 오우미와 시라네와 구로노. 빨강(아카)과 파랑(아오)는 남자. 하양(시로)와 까망(구로)는 여자. 쓰쿠루만이 유일하게 색채가 없는 남자다.
혈기 왕성한 남녀가 모였지만 그들에겐 이성간의 관계 발전을 자제하는 암묵적 룰이 있었다. 우정은 영원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으니까.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는 그렇게 유지된다. 그러나 조화로운 공동체는 쇳가루 맛이 나는 세상의 바람을 맞기 전에나 유지 가능한 법이다. 그들도 나이를 먹는다.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나야 할 시기가 오는 것이다. 쓰쿠루를 제외한 넷은 아직 그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나고야에서 대학을 다니기로 결심한다. 오로지 색채가 없는 쓰쿠루만이 도쿄의 공대에 진학해 공동체를 이탈한다. 물론 공동체는 변함없이 유지됐다. 그들의 우정은 신칸센으로 한 시간 반 만에 건널 수 있는 거리에 무너질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빨강과 파랑과 하양과 까망, 아카, 아오, 시로, 구로는 일방적으로 쓰쿠루와의 절교를 선언한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공기의 맛이 다른 이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아마도 이런 점이 하루키를 이토록 오랜 시간 대중적 지지를 받는 작가로 만든 힘인 것 같다. 알쏭달쏭한 이야기, 복잡한 메타포, 상징, 다채로운 해석. 소설에게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한 가지는 도대체 다음 페이지에 뭐가 써 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다. 하루키에겐 그 힘이 있다.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일본 남자의 절교 사건을 궁금해 해야 하는가? 따지고 보면 그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평범하고도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가 왜 내 마음을 잡아 당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정말? 조화로운 공동체가 쓰쿠루에게 내린 절교 선언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같이 떡볶이를 먹고, 땡땡이를 치고, 오락실을 다니고, 숙제를 안 해 복도를 오리 걸음으로 걷던 내 오랜 친구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나는 한 번도 그 친구들에게 절교를 선언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내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져 오로지 기억 속에서만 머무른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그 가능성은 현실의 칼날을 거쳐 몇 가지 실현 가능한 범주로 좁혀진다. 날카로운 가위가 싹둑 싹둑 필요 없어진 가지들을 잘라낸다. 당신은 인생이 다양한 경험을 하나 하나 축적해 나가는 풍요의 과정이라 믿고 싶겠지만, 냉정하게 말해 인생이란 가슴 깊숙이 간직했던 따뜻한 무언가를 조금씩 조금씩 잃어버리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자키 쓰쿠루의 상실은 그저 개인적 체험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미 우리는 그의 가슴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상처를 우리의 마음 속에 갖고 있다. 순례를 떠나야 하는 건 다자키 쓰쿠루만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