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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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호의 책을 읽는 건 쉽지 않다. 그것이 별 재미가 없을 때는 더더욱.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무려 1천 3백만 부가 팔린 소설이다. 한 번도 쓰기 어려운 대하 소설을 세 번이나 써낸 작가가 내놓은 200페이지 짜리 단편(조정래의 기준으로 단편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이 바로 <인간 연습>이다.


<인간 연습>의 가장 큰 특징은 고루함이다. 미전향 장기수들이 주인공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할 법도 하지만 똑같이 옛날 사람이 나오는 황석영의 작품을 읽을 땐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자. 시대를 탈주한 문장은 성의없이 쓴 문장과 마찬가지로 손발을 오그라들게 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행복의 조건은 사상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 어떤 위대한 사상이라도 인간성을 잃는 순간 사람을 불태우는 재앙이 된다. 이것이 <인간 연습>의 주제다. 그래서 미전향 장기수들이 등장한다. 끝까지 공산주의를 버리지 못해 몇 십 년을 감옥에 갇혀야만 했던 불행한 사람들. 이들만큼 작가의 주제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건 바로 이 소설이다. 똑같은 모양의 블록 중에 원하는 색깔을 찾아 끼워 맞춘 듯한 피상적 인물들. 대가는 장난 삼아 블록 놀이를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박동건과 윤혁이다. 두 사람은 모두 비전향 장기수였지만 박동건 쪽이 더 지독했다. 그 결과 박동건은 나라도, 가족도, 친척도 외면하는 외로운 죽음을 맞는다. 반면 윤혁은 변화된 세상에서 나름대로 살아야 할 이유를 모색하는 사람이었고 그 해답을 자신이 돌보는 고아 두 명과 보육원장 최선숙에게서 찾아낸다. 여기에 치열한 내면 갈등과 고뇌는 없다. 두 인물은 그저 작가의 손에 등 떠밀려 찍 소리도 못하고 정해진 길을 따라 가는 꼭두각시처럼 보인다. 인물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작가가 부여해준 성격에 따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어색했던 것 이리라. 자기 생각을 갖지 못한 인물들의 피상적 연기. 그건 마치 재연 배우들의 <서프라이즈>를 보는 것처럼 어색함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각본은 어떨까? 박동건의 죽음을 앞당긴건 소련의 붕괴였다. '사상의 조국'이 맥 없이 무너지는 걸 보고 '헛 살았다'라는 공허함이 밀려 들어 살려는 의지가 완전히 박살난 것이다. 그런데 박동건이 꿈꿔왔던 건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아니었던가? 소련이 붕괴한 건 공산주의라는 이름을 걸고 독재를 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련의 붕괴를 보고 박동건은 오히려 힘을 냈어야 한다. 소련의 붕괴가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 디렉션을 거부할 수 없는 이 연약한 늙은이는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와 함께 영원히 눈을 감는다.


한편 윤혁은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를 놓은 손에 자본주의를 움켜쥐는 우를 범한다. 그는 자신이 출판한 책의 성공과 함께 두 고아를 데리고 최선숙의 보육원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마치 유토피아적 소규모 공동체를 연상케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에 비춰볼 때 이는 언제 박살날지 모르는 위험한 공동체에 불과하다. 윤혁은 언제까지 두 고아를 보살필 수 있을까? 그저 재우고 입히고 가끔 삼겹살이나 짜장면을 먹이는 걸로 충분할까? 치솟는 사교육비는 어떻게 할 생각일까? 아이들이 대학을 갈 수는 있을까?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면 취업도 안 될텐데, 설령 좋은 대학을 간다 한들 등록금은 또 어떻게 하지? 윤혁의 행복을 산산 조각 내기 위해 기다리는 건 이것 뿐만이 아니다. 최선숙은 언제까지 이 식객들을 말없이 보살펴 줄까? 운영비가 떨어져가는 상황에서도 최선숙은 윤혁과 두 고아를 처음과 똑같은 미소로 맞을 수 있을까? 잔인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모습을 하기란 공산주의가 인간의 모습을 하기 보다 수 백 배는 힘들다. 공산주의에게 인간의 얼굴을 하는 게 선택의 문제였다면 자본은 그 자체가 비인간적이라 아예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정래는 얼핏 해피엔딩으로 보이는 윤혁의 선택 속에 아주 잔인한 진실을 숨겨둔 것이리라. 윤혁은 결국 또 실패할 것이다. 인간은 그저 끊임없이 실패하고 그로인해 고통을 당할 뿐. 고통의 결실은 없다. 바로 그 고통이야 말로 우리 삶의 본질이다. 이게 아니라면 나에게 <인간 연습> 해피엔딩은 완전히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아무래도 대문호의 뜻을 온전히 펼치기에 200페이지는 너무나 짧았던 것 같다. 아무리 대작가라도, 주어진 원고지가 다 한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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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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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늑대와 함께 문명 세계에서 살아가는 걸 상상하는 건 쉽지 않다. 알다시피 늑대는 야생의 존재다. 주변의 동물을 잡아 먹거나 지나가는 사람을 물어 죽일 수도 있다. 아니 심지어 자신을 키우는 주인마저도.


어릴 때 부터 큰 개와 친하게 지내왔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늑대를 키울 생각을 하다니, 그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당연한 말이지만 늑대는 개가 아니다. 웨일스어로 왕 이라는 뜻인 '브레닌'을 이름으로 얻은 이 늑대는 무게가 68kg에 키는 170cm가 넘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그저 큰 개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아마 그렇게 상상했다간 실제로 이 늑대를 만났을 때 두 발이 굳어 땅 위에 철썩 달라 붙을지도 모른다.


진화의 어느 순간 인간과 함께 살기로 결정한 개와는 달리 늑대는 야생에 남았다. 여기엔 단순히 거주지가 다르다는 것 이상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지프 차의 짐칸에 개와 늑대를 놔두고 잠시 장을 보러 갔다고 하자. 물론 각각 다른 차에 말이다. 추가로 늑대와 개 모두 갇혀 있는 걸 잘 못한다고 가정하자. 개는 늑대만큼 큰 대형종으로. 이 경우 개는 갇혀 있는 것이 답답해 시트를 물어 뜯거나 바닥에 똥 오줌을 갈겨 불쾌함을 표출하는 게 전부일 것이다. 당신은 이 개가 차 시트와 천장을 갈기 갈기 찢어 놓고 접이식 의자를 완전히 박살낸 뒤 숨이 막히지 말라고 살짝 열어둔 창문을 내리고 탈출해 유유히 마트의 시식 코너를 활보할 거라는 상상을 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늑대는 그렇게 한다.


방문을 닫고 개와 함께 있어보라. 잠시 후 오줌이 마려워진 개는 나가기 위해 방문을 두어 번 긁은 뒤 당신을 쳐다볼 것이다. 개는 인간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한 이래 인간을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활용하게끔 진화해 왔다. 문을 열수 없다고? 그럼 인간에게 도움을 구하면 된다. 하지만 늑대는 문을 여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야생에는 그들을 도울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늑대의 추론 능력은 개보다 훨씬 뛰어나다. 늑대는 이 추론 능력을 활용해 문제의 해결책을 스스로 찾아낸다. 이것이 개와 늑대의 차이다. 그래서 늑대를 기른다는 말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동물과 함께 산다는 의미다. 마치 결혼해서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처럼 말이다.


야생의 존재를 마음대로 인간의 집에 들이는 게 늑대에겐 폭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본성을 억누르게끔 교육 받아온 늑대가 진정 행복할 수 있냐는 것이다. 브레닌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집을 나갈 수 있었다. 1미터의 돌담 따위는 한 번에 훌 쩍 뛰어 넘을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브레닌은 야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남자와 사는 게 행복했기 때문이다. 야생은 생각보다 혹독한 곳이다. 매번 먹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를 벌이고 덫을 피하기 위해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냥꾼의 총을 피해 달아나고, 심지어 무리의 알파 수컷 외에는 섹스도 금지된다. 브레닌은 저자와 함께 11년을 살았다. 혼자 있는 게 싫어 저자를 따라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저자의 직업은 교수다). 수업이 지루해질 때면 길게 울었고 배가 고프면 학생의 가방을 뒤져 도시락을 훔쳐 먹었다. 와중에 집을 뛰쳐나가 동네 암캐를 덮치기도 했다(암캐의 주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매끼 질 좋은 고기와 사료는 보너스였다. 아마 브레닌이 야생에서 태어났다면 이 모든 일들은 꿈에서 조차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누군가는 이 모든 편의들이 진정 늑대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늑대는 야생에서 사는 게 더 옳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 주어진 삶의 조건이 있고 그것을 절대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반군에 의해 황폐화된 땅에서 태어나 동물의 썩은 시체를 주워 먹고 사는 아프리카의 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까? 인간은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조건을 찾아 끊임없이 환경을 바꾸는 동물이다. 그렇다면 늑대라고 이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당신은 늑대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두 삶을 모두 경험한 뒤 어느 것이 더 낫고 못한지 판단할 기회가 없었다고 말이다. 아까 그 아프리카 아이를 태어나자 마자 입양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아이가 7, 8살 때 쯤 됐을 때 다시 아프리카로 보내 그 생활을 경험하게 할 것인가? 스스로 어떤 삶이 더 나은지 판단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인간이 자기 삶에 늑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순간 늑대도 자신의 삶에 인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11년에 걸친 두 종의 동거기를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늑대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는다. 이 늑대를 보고 있으면 이성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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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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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십자가>는 스쳐 지나가는 두 개의 살인을 통해 사형제도의 허점을 드러내는 장르 소설이다. 일본에서만 30만 부가 팔렸다고 하니 아무래도 장르에 대한 재미에 무거운 주제의식 까지 더해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았나 보다. 사람들은 재미만 있어도 싫어하고 주제만 있는 건 더 싫어하니까. 440페이지에 걸쳐 사건의 진상을 드러내는 미스테리 소설이니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내용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겠다. 그러면 좀 다른 얘기를 해야 하는데, 이게 정말 고민이다. 아무래도 좋은 말이 나오긴 틀렸기 때문이다.


전세계 수백만 독자의 지지를 받는 작가와 작품을 너 따위가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게 말이 되냐 고 물으면, 솔직히 좀 송구스러운 기분이다. KPOP 스타의 박진영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이 작가와 작품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겐 모욕이 될 수 있고, 상처가 될 수 있고, 혐오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히가시노 게이고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이 두 번째인지 세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둘이든 셋이든 다 별로였다. 딱히 평을 하기도 애매할 만큼 별로였다. 사실 최악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동명의 소설가가 쓴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데뷔 후 5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써냈음에도 불구하고 늘 새로운 소재, 치밀한 구성과 날카로운 문장으로 매 작품마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국내에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전부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이리라. 대단한 다작 작가인데다 나오는 것마다 인기를 얻으니 늘 새로운 소재를 꺼내 보인다는 건 사실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 50편 전체를 읽은 건 아니니까 그에 대한 판단을 보류한다. 그런데 치밀한 구성과 날카로운 문장이라고 한다면 정말 똥그랗게 눈을 뜨고 쳐다보고 싶다. <공허한 십자가>는 억지와 인위의 덫을 보란 듯이 펼쳐 놓고 독자가 걸려들길 바라는 함정 소설이다. 아마 예민한 짐승이라면 어설프게 가린 쇠 냄새에 질려 거들 떠 보지도 않으리라. 소설에 인위적 구성이 아닌 게 어딨는가? 고 묻는다면 인위적 구성 조차 인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게 바로 좋은 소설의 조건이 아니냐고 되묻고 싶다. 이 책을 읽다보면 어디선가 스스스스하는 소리가 들린다. 대단하게 부풀려진 미스테리는 440페이지에 걸쳐 서서히 바람이 빠지다 종국에 이르러 피식 하는 방구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완전히 쪼그라들고 만다. 이게 정말 치밀한 구성이라면, 내가 한글 공부를 다시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러나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날카로운 문장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책 날개를 쓴 사람이 착각한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문장만큼은 정말 최악이다. 어설픈 대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인상 깊은 문장은 책 전체를 통틀어 하나에서 두 개 도 찾기 힘든 수준이다. 날카로운 문장이란 말을 밋밋한 문체, 짧은 문장, 별 생각 없이 쓴 문장 과 같은 의미로 쓴 거라면 동의한다. 또 이런 조악함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 자체가 문장의 디테일에 힘을 쓰기 보다는 이야기에 집중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이런 건 스타일 혹은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오히려 화려한 문체가 이야기의 흐름에 방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문장을 가져야만 좋은 소설이냐 하는 건 각자가 판단할 문제다. 그러나 날카로운 문장이 아닌데도 날카롭다고 소개하는 건 문제가 있다.


솔직히 이런 독설을 쏟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누가 내 글을 이런 식으로 평한다면 나도 아마 살인 충동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모르겠다. 회사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작정을 하고 완독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공허한 십자가>를 읽고 나니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지루함의 늪과 조악한 문장의 정글을 지나 마침내 발견한 보물 상자에서 고양이도 끌고 들어가지 않을 만큼 어이 없는 잡동사니를 얻는다면 도대체 왜 책을 읽어야 하지? 그러기엔 내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말 혹시 모르니 그의 책 중 가장 인기가 많고 평가가 좋은 책 한 두 권은 더 읽어 보겠다. 이 위험한 모험을 떠나는 나에게, 부디 이야기의 신의 축복이 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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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동양고전 슬기바다 2
맹자 지음, 박경환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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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춘추와 전국을 싸잡아 춘추전국 시대로 일컫지만 두 시대 사이에는 꽤 큰 시간 차가 있다. 단순하게 말해 춘추는 공자의 시대였고 전국은 맹자의 시대였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도 아닌 그 손자의 제자에게서 유학을 배웠다. 맹자가 태어난 때는 공자가 죽은 지 이미 100년이 가까운 시대였다.


전국은 춘추보다 혼란과 분열이 심화되었는데, 예(禮) 운운하며 격식을 차리던 제후들이 비로소 가면을 벗고 이빨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전국은 오로지 힘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당연하게도 전국을 평정한 남자는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교활하기로 소문난 '영정'이었다. 최초의 황제. 진시황 말이다.


공자나 맹자나 지금에 와서야 성인으로 떠받들여지지만 당시에는 내뱉는 족족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상주의자 떠돌이들이었다. 맹자의 말대로 인간이 본래 선하며 따라서 누구나 요, 순, 우, 탕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는거라면 춘추와 전국은 왜 그리 피와 살육을 즐겼을까? 군마를 이끌고 달려오는 적국의 왕에게 인과 예를 설파하여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단 말인가? 힘의 시대에 인의는 무력하다. 그리하여 힘을 강조한 시황이 비로소 길고 긴 춘추와 전국을 끝내고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그런데 웃긴 건 천하를 통일하게 만든 그 힘이 정작 통일된 천하를 무너뜨리는 힘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 진(秦)은 20년도 가지 못해 멸망하고 말았다. 분열된 천하를 두고 항우와 유방이 싸웠는데, 힘의 항우가 덕의 유방에게 패해 비로소 유학의 전성 시대를 여는 한(漢) 나라가 건국된다.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인 한 나라는 이후 400년 동안 유지된다.


유학은 확실히 전란의 시대에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나 평화의 시대, 즉 통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선 탁월한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인간은 우선 생존권이 확실하게 보장되야 인의라는 가면을 손 쉽게 쓸 수 있다는 말이다. 공자와 맹자는 이 점을 몰랐다. 두 사람에겐 큰 뜻은 있었지만 그 뜻을 실현할 전략이 부재했다. 상황이 받쳐주질 않는데 꼬장 꼬장 자기 주장만 되풀이 해서야 어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두 사람은 평생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다 "아아, 세상이 정녕 나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구나" 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나는, 당시의 사람들이 정말 공맹의 사상을 이해 못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충분히 유학의 사상을 적용하여 힘과 덕의 균형을 맞추는 정치를 벌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그 원인을 맹자 본인에게서 찾는다.


솔직히 맹자는 같이 일하기 싫은 동료 유형 중에서도 최악이라고 꼽을 만큼 짜증나는 인간이었다. 우선 잘난척이 심하다. <맹자> 공손추 하 편에는 그의 제자 충우가 "군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다"(p.137)며 스승의 언행 불일치를 힐난하자 "만일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리려 한다면 오늘날의 세상에서 나 말고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유쾌해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요즘 같으면 대단한 swag으로 치부하고 박수를 칠 수도 있겠지만 도무지 군자의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맹자의 잘난척은 사람을 너무 가르치려 한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무지한 사람을 경멸하고 모욕하는 걸 즐기는 전형적 엘리트였다. 사사건건 왕을 모욕하고 왕을 힐난하고 왕의 권위를 짓누르면 과연 누가 가르침을 받아들이겠는가? 이루 상편에서 맹자는 "사람들의 문제는 남의 스승 노릇을 하기 좋아하는 데 있다."(p.211) 고 말한다. 자기 자신이 이 말의 반만 지켰어도 전국 시대에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게 완전히 꿈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최악은 독선이었다. 맹자는 요, 순, 우, 탕이라는 전범을 세워 놓고 이들과 같으면 선, 다르면 악이라 몰아 세웠는데 아무리 성인이라 해도 행동에 모순이 있고 잘못이 있기 마련이다. 맹자는 온갖 변명을 늘어 놓아 이 같은 모순을 옹호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반드시 논쟁으로 굴복시키려 했다. 한마디로 맹자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유교 광신도였던 것이다.


정녕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다면 사람을 마음으로 감화시켜야 한다. 맹자는 그냥 뭘 해도 밉상인 사람이었다.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마음이 동하질 않는다. 맹자가 성인의 뜻을 헤아리는 대신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 보는 시간을 가졌다면, 그의 왕도정치는 충분히 전란을 평정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써 놓고 보니, 내 얘기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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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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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폴 오스터의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압도적이다.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라는 부제가 달렸는데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쓴 것 같다. 그냥 모든 소설을 이렇게 써줬으면 좋겠다. 확실히 모든 작가는 자기 체험을 얘기할 때 더 생생하고 더 진실되고 더 아름답다.


<빵 굽는 타자기>가 왜 재미있는고 하면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의 근거로 책 뒤 쪽에 나오는 두 편의 희곡을(희곡이나 소설이나 어쨌든 극화된 글 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 주시길) 제시한다. 나는 이 희곡들을 한 번에 10페이지 씩 넘겨서 봤는데 그건 나에게 속독술이나 투시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뭉텅이로 페이지를 넘겨 책을 뭉개버리고 싶을 정도로 두 희곡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빵 굽는 타자기>에도 극적 각색이 있는지 없는지(그러니까 이걸 소설이라고 간주할 만할),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알고 싶지도 않고 안다고 해서 딱히 대단한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패스하자. 그냥 내 주장이 틀린거지 뭐. 재밌으면 된 거 아냐!


나 같은 폴 오스터 혐오자가 왜 또 다시 폴 오스터의 책을 꺼내들었는지에 대해 얘기해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들어보라. 사실은 전혀 생각이 없었다. <환상의 책> 이후로 그와는 완전히 짜이찌엔, 굿 바이, 사요나라 해 버렸으니까. 도저히 그 지루함을 견딜 수가 없었어. 그런데 얼마전 <그림과 문장들>이란 책을 읽으며 어마어마한 문장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기적같은 역전을 꿈꾸었다. 복권에 당첨되어 수백만 달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따위의 일확천금을 꿈꾸며 터무니 없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중략) 한쪽에는 시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돈이 있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잘 다룰 수 있다는 데 내기를 걸었지만, 처음에는 한 입, 다음에는 두 입, 다음에는 세 입을 먹여 살리려고 애쓰면서 몇 년을 지낸 뒤 결국 내기에 지고 말았다.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시간을 얻기에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돈을 벌기에는 일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p.146)


이 말은 우리 우주에 사는, 소설가가 되기를 원하는 모든 생물들을 위한 잠언이다. 이 말 하나만 가슴에 품고 살면 당신의 삶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진리요 빛이요 바다를 집어 삼킨 캄캄한 폭풍우를 뚫고 들어오는 등대의 가르침이다. 명심하라. 누구나 돈을 갖진 못하지만 우리 모두는 시간을 갖고 있다. 폴 오스터는 시간을 얻기에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돈을 벌기에는 일을 충분히 하지 않은 탓에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이르러 결국 시간도 돈도 모두 잃고 말았다.


나는 너무 늦게서야 이 진리를 만났다. 돈은 애초에 없었으니 별로 원망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많던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나는 일 초도 멈추지 않고 꼬박 꼬박 쌓이는 시간을 수십 년이나 모았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을 담은 그릇은 밑 빠진 독이었고 시간은 빠진 밑을 따라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시간은 헤어진 연인과 같고 제 때에 뒤집지 못해 까맣게 타버린 삼겹살과 같다. 떠나간 연인에게 전화를 걸거나 타버린 삼겹살을 먹는 건 자유지만, 자유란 결코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무적의 화폐가 아니란 걸 알아두시길. 어쩌면 그 놈의 자유가 우리를 궁지로 몰아 넣은 주인공 일지도 모른다. 자유는 쓰기는 쉽지만 길들이기란 죽을만큼 어려운 괴물이니까. 당신의 인생이 왜 이리 누추한지 알고 싶다면 이 괴물이 어디에서 뛰놀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혹시 그 곤궁한 인생을 역전시키고 싶으면 괴물을 가장 놓고 싶지 않은 곳에 데려다 놓으라. 그리하면 고통과 함께 원하는 것을 얻을지니.


1947년에 태어난 폴 오스터는 1977년이 되서야 이 진리를 깨달았는데, 진리를 깨달은 후에도 한참이나 어두운 통로를 헤매다 1978년에는 파경을 맞았고 1981년이나 1982년, 혹은 1983년 쯤에 겨우 겨우 한 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그리고 소설은 한 권도 팔리지 않았다. 폴 오스터는 "여기까지 온 이상,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노력해서,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172) 정말 소름끼치게도, 


그 마지막 한 번의 노력이 나와 당신에게 폴 오스터란 이름을 기억하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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