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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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는 어렵다. 한병철의 글은 선언과 설명이 번갈아 가며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글을 쓰는 것 같다. 그래서 독해는 오래 걸린다. 철학에 대한 한병철의 관점을 생각해 봤을 때 이는 의도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에게 철학은 오래 머물러 숙고할 기회를 주는 학문이다. 읽자마자 이해가 되는 글은 투명한 글이다. 거기엔 깊이가 없다. 하나 하나 껍질을 벗겨 의미의 속살을 깨물어 먹는 묘미가 없다. <투명사회>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불투명한지를 자랑한다.


그의 책을 어렵게 만드는 두 번째 이유는 통념의 역전이다. 철학은 원래 저항의 학문, 의문의 학문이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당당히 질문을 던지는 것. 한병철은 이같은 철학의 본질을 극단까지 몰고 간다. 그의 사상은 너무나 독특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당연했던 세계가 무너질 때 우리는 엄청난 감정의 소모를 경험한다. 한병철의 철학은 우리를 탈진하게 만든다.


한병철은 부정성의 철학자다. 부정성이란 무엇이냐, 지난 수 세기 동안 우리가 싸워왔던 질병, 무지, 억압, 독재, 착취 등 세상의 온갖 나쁜 것들을 떠올리면 된다. 한병철은 인류의 문명이 이같은 부정성을 몰아내는 방향으로 진보해 왔다고 말한다. 성과는 훌륭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오래, 더 편하게, 더 자유롭게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 사회의 병폐들이 오히려 부정성이 사라진 바로 그 공간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부정성을 없애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싸워야 할 부정성이 남아 있지 않다. 이렇게 얻은 자유의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유가 어떻게 인간의 짐이 될 수 있는지, 그리하여 왜 인간이 그 숭고한 가치를 버리고 독재의 품 안으로 달려가는지를 밝힌 바 있다. 자유란 "사람들에게 각자의 삶에서 어떤 뜻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냐에 대한 대답까지 자도으로 주는 것은 아니었다."(p.230. 역자 해제 중).


"투명사회에 대한 한병철의 비판은 이러한 부정성의 사상을 시각적-인식적 차원으로까지 밀고 나간다. (중략) 모든 것을 손쉽게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으로 전환해주는 디지털 기술은 시각적-인식적 부정성의 축소 내지 제거에 기여한다."(p.231. 역자 해제 중)


우리는 현대 사회를 정보 사회라 부른다. 정보 사회에서는 정보의 유통이 부를 창출한다. 오늘날 정보의 유통 속도가 광속을 지향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더 빠른 유통은 더 많은 유통을, 더 많은 유통은 더 많은 돈을 야기한다. 그래서 정보는 투명해야 한다. 메타포를 포함하는 정보, 비밀을 간직한 정보, 은밀히 암시하는 정보, 즉 해석이 필요한 정보는 우리 앞에서 멈춘 채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선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긴 글이 읽히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쉽게 풀어내야 한다는 강박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숙고와 사색은 정보 유통의 최대 적이다. 수용하는 즉시 '좋아요'로 반응할 수 있는 것들만이 유통될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더 이상 해석을 원치 않는다. 사실 해석은 비밀로 둘러싸인 텍스트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가는데서 쾌락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해석은 일종의 에로티시즘이다. 하지만 정보는 투명하다. 그것은 이미 다 벗은 채로 세상을 돌아다닌다! 한병철이 현대 사회를 "포르노 사회"로 명명하는 것도 그래서 납득이 된다. 은밀한 가림과 유혹이 사라진 알몸 사회. 즉각적인 충동과 외설만을 감각하는 사회. 우리는 진정한 쾌락을 느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관점에서 나는 찌라시가 왜 그토록 빠르게 유통되는지 생각해 보려 한다.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또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찌라시는 불투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그것은 네트워크를 타고 전염병처럼 번져 나간다. 이유가 뭘까? 찌라시는 일종의 폭로고 폭로는 투명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람의 이면을 드러낸 것처럼, 가면을 벗겨 낸 것처럼 말한다. 이것은 너무나 어설픈 연기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왜? 인간은 사실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은 게 사실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남의 속살을 보고 싶은 추악한 욕망, 타인을 발가벗겨 모욕하고 싶은 더러운 욕망이 우리의 착각을 부채질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엉망으로 만드는 게 정치인이라는 사실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에게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 한병철은 "그렇다"고 말한다. 우리가 권력자에게 투명성을 요구하는 이유는 그들은 우리를 속속들이 보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리 몰래 죄를 지어도 끝내 법의 심판을 받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투명성에 대한 요구는 더 진실된 사회, 더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상호 감시의 사회'를 만들 뿐이다. 한병철은 신뢰가 "오직 지와 무지의 중간 상태에서만 가능하다."(98p) 고 말한다. 우리가 이미 모든 걸 투명하게 보고 있다면 어떻게 신뢰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신뢰가 아니라 판단일 것이다. 그러니까 신뢰는 결코 투명함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투명하리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투명성을 부패와 정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사람은 그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p.14). 


투명한 것이 옳은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가 정말로 투명해져야 한다면 세상에서 개성은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은 더이상 자신의 독특함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독특한 소수는 평범한 다수에 의해 억압받고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인간들만 존재하는 획일화된 사회,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전체주의 사회, 그것이 바로 투명사회의 종착지다.


우리는 타자의 불투명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타자를 투명하게 만들려는 의도에는 다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 거기엔 피아를 구분하려는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관동 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발음이 어려운 일본어를 시켜본 뒤 잘 못하면 조선인이라 판단해 무조건 살해했다(당시 일본인은 지진의 혼란을 틈타 조선인이 폭동을 저지른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그들은 누가 일본인이고 누가 조선인인지, 


투명하게 알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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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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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걸작이라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나와도 인연이 많은 야구팀이다. 나는 삼미의 후신인 청보 핀토스(뻐드렁니를 한 당나귀가 마스코트 였던 것 같다. 프로 스포츠에 당나귀라니!)와 태평양 돌핀스(당나귀 보다는 백 배 정도 귀여운 돌고래. 하지만 야구는 육지에서 한다.)를 응원하며 자랐고 그 후신인 현대 유니콘스(삼미에 뿌리를 두고 있는 팀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만큼 강팀으로 세상에 등장한 첫 해 한국 시리즈에서 준우승하는 기염을 토한다)의 우승을 지켜보며 야구를 떠난 사람이다. 왜냐고? 너무나 막강한 이 팀이 도저히 나의 팀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삼미와 청보와 태평양은 그 누구보다도 패배에 익숙한 팀이었다. 나는 그들이 7개의 팀 중 5위를 할 때 또는 8개의 팀 중 6위를 할 때 가장 기뻤고 꼴찌들과 접전을 벌여 가까스로 최하위를 탈출할 때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다. 물론 태평양 돌핀스가 기적적으로 2등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건 일종의 휴가 같은 것이었고 휴가는 본디 길지 않은 법이라 그들은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최하위의 진흙탕 속을 뒹굴었다. 이런 팀이 유니콘을 타고 한국 시리즈를 질주했으니 내 배신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겠지?


나는 가끔 생각한다. 어쩌다가 내 몸 속에 패배자를 사랑하는 피가 흐르게 됐는지를 말이다. 태어날 때 부터 받은 저주의 피일까? 아니면 불행히도 인천에서 태어나 그들을 응원하게 된 탓에 나도 모르는 사이 스믈스믈 피 속으로 스며드는 패배의 DNA를 받아들이게 된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피가 지독할 정도로 강력한 기운을 띄고 있어 도저히 씻어낼 수 없다는 걸 안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일등을 해 본 적이 없고 한 번도 강팀을 응원해 본 적이 없으며 한 번도 주류 사회에 낀 적이 없는 아웃사이더였다. 나는 언제나 꼴찌에게 갈채를 보내며 살아왔다.


이 소설은 세상의 모든 꼴찌들에게 보내는 위문 편지다. 작가 또한 삼미 슈퍼스타즈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삶을 산 인물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꼴찌에 대해 잘 알며 누구보다도 패배의 진실을 잘 꿰뚫는 사람이다. 그래서 박민규의 소설들은 일종의 혈액 검사지다. 당신의 중지를 바늘로 찌른 뒤 두어 방울의 피를 종이 위에 떨어뜨려보라. 그리하면 당신의 몸 속에 패배자를 사랑하는, 지독하게 끈적하고 태평한 그 피가 흐르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희한하게도 이 패배자들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아본다. 눈빛만 스쳐도 척! 게다가 이들은 은근히 잘 뭉친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둘 혹은 셋 씩 뭉쳐 있다. 청소기를 피해 어두운 구석으로 숨어 들어가 똘똘 뭉친 먼지처럼 세상의 끝없는 제거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제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고 우리를 동정할 필요는 없다. 먼지가 되 본 사람은 안다. 오히려 당신들이야 말로 우리의 동정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홍어 같은 책이다. 못 먹는 사람은 죽어도 못 먹는다. 그러나 맛을 아는 사람은, 크... 벌써 부터 입에 침이 고인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게 소설이지?"라고 생각한다. 뚜렷한 서사는 없고 말장난처럼 한없이 늘어지는 문장이 터진 봉투에서 줄줄 새는 반찬 국물처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반면 우리는 "어떻게 이게 소설이 아니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함부로 입 밖에 꺼내지는 않는다. 우리는 세계의 그림자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라 폭군 같은 태양 아래선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침묵이 이제 막 이 세계에 발을 디딘 사람들에게 "나 같은 사람은 정말 없구나"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침묵의 나선 효과. 잠깐! 그 뜨거운 태양을 피해 잠시 이 나무 그늘 아래 앉아보라. 여기 냉수건과 쭈쭈바와 방수 돗자리가 있다. 당신은 방수 돗자리에 앉아 냉수건으로 목을 훔치며 쭈쭈바를 빨아 먹는다. 그러다가 우연히 뒤를 돌아보고 순식간에 지구 보다도 커진 방수 돗자리 위에 소처럼 누워 쉬는 수 많은 삼미의 팬클럽을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의 피를 창피해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종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이제 당당히 나와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임을 인증하자.


*박민규 씨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거꾸로 보는 한국 야구사'의 일부를 표절했다고 합니다. 소설가 본인이 저작권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시절에 벌어진, 그야말로 무지의 소치임을 인정했으며 자신이 평생 안고 살아야 할 빚임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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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전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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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를 너무 믿었나보다. 675페이지 짜리 책인데 볼거리는 많지 않다. 평생 꼭 한 번 써보고 싶었다는 괴물 이야기인데, 아무래도 너무 아끼는 건 이토록 다루기가 힘든가 보다. 사랑이란 것도 적당히 평등한 관계에서 지지고 볶고 엎치락 뒤치락 해야 아름답지 한 사람이 신을 섬기듯 조심 조심 숭배해선 재밌는 사랑이 될 리가 없다.


<괴수전>은 전개가 느리다. 이제나 저제나 노심초사 괴물의 등장을 기다리는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아 이게 그거야?"라고 탄식을 할 정도로 맥 빠지게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이게 서사 기술이 가진 근본적 한계 같기도 한데, 실제로 뭔가를 자세히 묘사하면 할수록 오히려 신비감이 떨어지면서 밋밋한 존재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땐 영화가 정말 부럽다. 몇 페이지에 걸쳐 치밀하게 묘사해야 할 대상을 풀샷과 클로즈업 만으로도 끝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런 미지의 대상을 묘사할 땐 그 모습보다는 행동을 기술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예컨대 괴물이 청와대를 밟아 무너뜨린 뒤 공무원을 하나 씩 하나 씩 집어 씹어 먹었고 꼬리로 바닥을 내리 쳐 지진을 일으켰다고 하면 이 괴물의 크기와 신체 구조 그리고 그 모습을 나름대로 상상해 나갈 것이다. 신기한 건 그 희끗희끗한 상상이 오히려 더 생생할 수 있다는 사실.


또 하나, <괴수전>은 밋밋하다. 일본 굴지의 미스테리 작가답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캐릭터를 여럿 등장시키길래 치밀하게 얽힌 이야기가 전개되겠구나 싶었는데 글쎄 이게 다 맥거핀이었다. 종장에 이르러 몇몇 반전이 있긴 하나 비밀 캐릭터들이 사실은 별 거 없었음을 무마하기 위한 시도로 느껴져 그닥 충격적이지 않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소설은 베테랑 작가의 클리셰 모음집으로 보이기도 한다. 특히 괴물을 두고 벌이는 갈등, 종장에 이르러 그것이 처리되는 방식은 어디서 한 번쯤은 본듯한 친숙한 전개임이 분명하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더 많이 읽어봐야 알겠지만, 작품 수로는 일 이 위를 다툴 정도로 많은 수를 발표하는 작가임을 고려할 때, 어쩌면 클리셰들을 완성도 있게 조합해 내는 능력이 그 왕성한 창작욕의 비밀이 아닌가 싶다. 전반적으로 <괴수전>은 보던 사람들에게 익숙한 재미를, 뭔가 색다를 충격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2% 부족할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마지막 장, 사건의 뒷 이야기를 담은 두 페이지가 충격을 던져준다. 나는 그 두 페이지를 읽는 순간 얼어 붙고 말았다. 수 십 번이고 필사해 품에 넣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 기막힌 이야기. 674페이지에서 675페이지, 딱 두 페이지에 걸쳐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도시 전설' 류의 클리셰를 똑 닮아 있지만 그 정수라 불러도 아깝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미야베 미유키로부터 이 두 페이지를 훔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전 세계의 <괴수전>에서 이 두페이지를 잘라 아무도 못 보게 하고 싶다.

  

그래서 후세에 이 글을 쓴 사람이 나인줄 알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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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처럼 생각하라 - 상식에만 머무는 세상을 바꾸는 천재 경제학자의 사고 혁명
스티븐 레빗 & 스티븐 더브너 지음, 안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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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를 찌르는 사례가 폭발한다. 세상에 이런 일이! 혹은 바보들의 흑역사를 몰아보는 기분이다. 스티븐 레빗과 스티븐 더브너는 <괴짜 경제학>이라는 책으로 일약 스타가 되어 <슈퍼 괴짜경제학>을 내고 <괴짜처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들은 이 책들을 통해 사회적 통념과 고정관념, 편견이 우리의 의사 결정 과정에 얼마나 깊게 뿌리 내리고 있는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들에 따르면 그런 아둔한 결정은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만 하는게 아니다. 최첨한 의학을 연구하는 의사에서부터 대기업의 마케팅 임원들까지 이른바 슈퍼 전문가들 또한 검증되지 않은 믿음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그로 인해 어마어마한 판단 착오를 일으킨다. <괴짜처럼 생각하라>를 읽고 있으면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된다. 흐름을 거스르는 건 언제나 힘든 일이지만, 그리고 대부분 실패로 끝날 확률이 높지만 이 모든 걸 차치하고라도 충분히 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다. 역사의 물줄기가 그렇게 쉽게 바뀌면 세상에 위대해지지 못할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괴짜처럼 생각하라>는 쉽다. 명쾌하다. 번역이 완벽하다. 그리고 짧다! 모든 장이 실제 사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경제학 도서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건 그냥 이야기다! 저자들은 인간의 머리에 데이터가 아니라 이야기가 남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다. 예컨대 우리는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가 언제적 사람인지 심지어 그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조차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도 있는가?


스티븐 레빗과 스티븐 더브너의 문장엔 자신감이 넘친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다양한 사례를 직접 경험하고, 수집하고, 분석했기 때문에 문장 하나 하나가 명쾌하다. 에둘러 말하는 법도 없고 점잖은 척 한 발 물러서 답은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따위의 허망한 결론을 내지도 않는다. 눈이 즐겁고 손이 가볍다. 물론 나는 번역본만을 봤기 때문에 원서의 뉘앙스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다르다면 옮긴이 안진환은 번역의 신이다.


나는 원래 이런 류의 책들을 읽지 않는다. 이런 류의 책을 읽는다고 이런 류의 책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뭔 말이냐면, 이런 류의 책은 고급 재료를 환상적으로 요리한 음식을 먹고 자란 사람들이 만든 인스턴트 식품이라는 것이다. 인스턴트만 줄창 먹으면 언젠가 인스턴트 음식의 대가가 될 거라 믿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직 괴짜처럼 생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집밥 백선생 얘기를 다시 해보자. 그가 조미료 투성이의 값싼 음식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건 조리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재료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지 결코 인스턴트를 맛있게 잘 먹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이제야 왜 CEO들이 이런 책들을 줄기차게 추천하는 지 알 것 같다. 그들은 차분히 앉아 책을 읽을 시간도 없을 뿐더러 애초에 책과 친한 사람들도 아니다. 읽는 데 힘도 들고 읽고 나서 숙고할 시간도 없으니 귀에 쏙쏙 들어오는 이야기를 찾는 것이다. 시간이 없으면 인스턴트 도시락을 사 먹듯이! <괴짜 경제학>을 읽고 나면 어디 가서 얘기할 꺼리가 생긴다. 아는 티와 읽은 티를 낼 수 있다. 즉각 써먹을 수 있다는 얘기다. 예컨대 신입 사원의 높은 퇴사율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인사 팀장이 있다고 치자. 인사팀의 대리가 미팅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미국 최대의 온라인 신발 유통 회사 자포스는 신입 사원을 교육하고 나면 퇴사를 권유합니다. 퇴사를 결심하는 사람에겐 교육 기간에 대한 봉급과 보너스로 2천 달러까지 지급하죠!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이유가 정말 궁금하지 않는가? 지금 당장 당신 회사의 인사, 마케팅, 상품 기획 부서를 가보자. 그들의 책상 위엔 틀림 없이 이런 류의 책들이 세 권 이상은 있을 것이다(나는 웬지 제목까지 알 것 같다. 하지만 프라이버시를 위해 언급하진 않겠다. 말콤 글래드... 세스...). 당신이 의사 결정권자를 설득해야 할 일이 많다면, 그리고 거기에 어려움을 느낀다면 이런 책들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바로 구워 먹을 수 있는 물고기를 주니까! 하지만 이런 사례를 직접 만들어 낸 사람 혹은 현상에서 이런 사례를 스스로 발굴한 사람, 쉽게 말해 물고기를 직접 잡는 낚시꾼이 되고 싶다면 당신은 더 깊은 곳, 그러니까 더 어렵고, 짜증나고, 힘든 분야로 내려가야 한다. 평생 남의 물고기나 사 먹으며 낚시꾼들을 부자로 만들어 줄 생각이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살면서 한 번쯤은, 우리도 저자가 되봐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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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의 사회 이반 일리치 전집
이반 일리치 외 지음, 신수열 옮김 / 사월의책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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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전문가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상상하는 건 쉽지 않다. 근대 사회의 출현 이후 그들은 많은 분야에 전문가라는 깃발을 걸고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도와왔다. 그들은 일상에 바쁜 우리가 좀처럼 관심을 두기 어려운, 그러나 아주 중요한 문제를 끈질기게 파고 들어가 해결책을 제시하는 존재였고 이 과정에서 방대한 지식을 축적해 우리 사회가 진보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너무 비대해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너무 거대한 성을 지었고 견고한 담합을 이뤄냈다. 그들은 서로의 실수를 눈감아줬고 막대한 지식 격차를 이용해 우리를 눈 먼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이 여전히 이타심을 가지고 보통 사람들을 대하는지 의심해 봐야 할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전문가 사회는 필연적으로 고착화 된다. 전문가는 자신에 대한 일반인의 의존이 항구적이며 맹목적이길 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평생 무지한 존재로 남길 원한다. 이를 위한 첫 번째 방법은 그들의 세계를 아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험 전문가는 맞춤이라는 명목으로 도저히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 없을 만큼 갈기 갈기 상품을 쪼개며 의사와 법관들은 모국어로 쓰여도 해석할 수 없는 전문 용어로 자신의 보고서를 채운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 우리가 백기 투항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밥 그릇을 넘보지 말라고 협박하는 건 하수의 방식이다. 절대 넘볼 수 없게 만드는 것. 침범의 의지를 '스스로' 꺽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전문가들의 수성 전략이다.


전문가 사회의 거래는 오직 상품과 화폐로만 구성된다. 이 말은 우리가 그들의 서비스를 이용했을 때 반드시 돈을 내야 한다는 말이다. 뭐 이리 당연한 말을 하냐고? 의사가 없던 시절로 돌아가 보자. 애를 낳을 땐 산파로 소문난 동네 아줌마의 도움을 받았고 감기에 걸리면 들과 산에서 구한 약초로 병을 다스렸다. 그런데 요즘은? 의사가 진찰을 하고 주사를 놓고 처방전을 써준다. 과거엔 상호 부조나(애 잘 받는 아줌마) 자연의 혜택(약초)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가 진료비와 주사비와 약 값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돈 없이는 생존권도 없다. 현대 서비스 사회에서 빈부의 차는 사치품을 더 살 수 있느냐 없느냐로 나타나는 게 아니다. 좋은 의료를 받을 수 있느냐,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느냐, 좋은 주거 환경을 가질 수 있느냐, 그러니까 삶의 기본권과 생존권을 누릴 수 있느냐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흐름을 되돌릴 만한 힘은 없다. 한 때는 우리도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을 맹목적으로 전문가에게 위임한 결과 이제는 완전히 불구가 됐고 이로 인해 더더욱 전문가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악순환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자기 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난 전문가들은 이제 필요 자체를 정의함으로써 권력을 영속화 한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언제부터 반려견 행동 전문가와 청소, 정리, 이사 전문가와 헬스 케어 전문가, 입시 상담 전문가, 스트레스 관리 전문가, 라떼 아트 전문가, 네일 아트 전문가, 레저와 여행 추천 전문가를 필요로 했는가? 우리도 모르는 새에 우리는 너무 바보가 되어 정리도 청소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 심지어 내가 뭘 먹어야 하는지, 아니 뭘 먹고 싶은지 어디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지 조차 모르는 인간이 된 것이다. 전문가 사회는 우리 대신 우리의 필요를 정의하며 나아가 그 필요를 교묘하게 욕구로 바꿔 놓음으로써 우리가 마치 처음부터 그것을 간절히 바랐던 것처럼 순전한 욕망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오늘날 잘 나가는 상품들이 소비자의 필요(needs)에 호소하지만 더 위대한 사치품들은 우리의 욕망(wants)를 자극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나 전문가 사회의 가장 끔찍한 점은 그것이 가진 정치적 함의다. "전문 서비스의 일방적 공급에 경제를 의존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반민주적인 지도자를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준비시키는 일이 훨씬 용이하게 마련이다."(p.113).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문가들의 첫 번째 임무는 복잡한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정의해 그것으로부터 일반인들의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사안을 직접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은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 줄 전문가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도 함으로써 자발적인 노예가 된다. 그리고 노예가 된 자신을 이끌어줄 강력한 독재자를 원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정보를 공유해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많은 걸 알게 된 21세기 선진 시민에게 이 같은 상황은 얼핏 초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전 세계에서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정치 현실이다. 이 글을 읽는 대한민국의 국민들도 2007년 12월 19일 '경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경제 전문가를 대통령으로 뽑은 적이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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