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해부 - 나치 전범들의 심리분석
조엘 딤스데일 지음, 박경선 옮김 / 에이도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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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평범하다"는 유명한 구절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기웃거린지 벌써 10년이다. 내가 선뜻 이 책을 선택할 수 없었던 이유는 딱 하나다. 번역. 몇 번이나 시도해봤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어려운 철학책을 번역서로 읽는다는 건 1급 발암물질을 식수로 사용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걸 의무로 읽어야하는 전공자들에게 깊은 애도와 존경을 보낸다.


<악의 해부>를 손에 들고 첫 문장을 읽었을 때 느낌이 왔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같은 내용을 다루되 번역이 완벽한 책이라는 느낌. 예상은 적중했다. 번역의 훌륭함뿐만 아니라 저자의 글쓰기 능력도 대단했다. 특히 좋았던 부분은 실제 전범들과의 대화록이 풍부하게 실렸다는 점이었다. 이런 종류의 책일수록 대화록은 아주 중요하다. 책은 그 대화록을 분석한 저자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디에 초점을 두고 상대의 말을 해석하는가, 혹시 그가 왜곡을 하는 건 아닌가, 이런 의문을 끊임없이 검증하고 비판하게 만드는 게 바로 대화록의 역할이다. 이런 과정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책을 읽어도 결국 주입식 교육에 불과하다. 책을 읽는다는 건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라는 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내가 나치 전범들의 심리분석에 관심을 가져온 이유는 "악은 평범하다"는 사실을 매일 매일 체감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사태 때 보여준 일부 담당자들의 안이한 태도와 박근혜 정부 시절의 맹목적 추종을 보며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며 분노를 쏟아내지만 나는 우리 중 대다수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그들과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악은 생각만큼 특별하지 않다. 그들은 특별히 게으르고, 무책임하고, 타인의 감정에 둔감하고, 누구보다 악해서가 아니라 특정 사건이 벌어졌을 때 공교롭게도 그와 관련된 어떤 행동을 해야만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악을 저지른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이들이 악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악은 매우 자연스럽게, 그게 악이라는 걸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스르륵 흘러나온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우리의 세상 살이가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모두 악인이고 우리가 뿜어내는 무의식적 악행에 24시간 상호 노출된다. 악을 경험한 사람은 바로 내가 경험했다는 그 주관적 특수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악의 원천을 타인에게서 찾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거듭될 수록 내 몸에서 흘러 나오는 악에 대해선 점점 둔감해지고 자기는 선한 피해자로 남아 끊임없이 타인을 악으로 물들이게 된다.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선 자신을 객관화 하는 게 중요하다. 나에게서 한 발 떨어져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 내가 나치 전범들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이유는 거기서 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나의 거울이고, 아마 거의 완벽하게 내 모습을 비춰줄 것이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악의 해부>가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가에 대해선 일말의 의심이 남는다. 이 책은 악을 해부하겠다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는 있지만 그들이 어떤 행동을 어떻게 했는지에만 초점을 맞추지 왜, 어떤 이유로 악이 탄생했는지에 대한 탐색에선 헛손질을 거듭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악이라는 거대한 우주로 야심차게 탐사를 나서 반짝이는 별들과 쏟아지는 은하수를 목격한 뒤 지구로 돌아와 그 경이로움을 찬탄하는 '일기'가 되버린다. 네 시작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미약하리라.


아이히만은 전쟁 후 아르헨티나에 숨어 평온한 생활을 영위하다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에 납치되어 예루살렘으로 잡혀간다. 정상적인 범죄인 인도가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하라. 모사드의 첩보원들은 아이히만에게 약을 먹인 뒤 만취한 승객으로 가장해 예루살렘 행 비행기에 태워 마침내 야훼의 심판장 위에 세운다. 실로 영화 같은 얘기가 아닌가. 나도 이렇게 납치되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게 가고 싶다. 잠깐의 기대는 실망으로 끝났지만, 일말의 잠재력을 보여준 이 팀이(출판사와 번역가) 언젠가 나의 바람을 실현시켜주길 바란다.


*이 책이 다루는 사건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다. 전쟁 후 즉각 체포된 사람들, 거물로는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과 부총통 루돌프 헤스가 있다. 아이히만은 없다는 얘기다. 이미 언급했지만 아이히만은 납치되어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는다. 따라서 나치 전범들의 심리를 다양하게 확인하기 위해선 뉘른베르크와 이스라엘을 모두 왕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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