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들
제임스 설터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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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만난 인연이 마음을 사로잡을 경우 우리는 자연스럽게 운명을 떠올리게 된다. 애초에 그 만남이 우연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채. 혹은 까맣게 잊고 싶은 마음으로.


제임스 설터를 처음 만난 건 아마 <올 댓 이즈> 였을 것이다. 줄거리나 구성이 기억나기 보단 문장 하나 하나에 깊게 배인 허무의 냄새가 또렷이 떠오른다.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온 마음이 조금씩 부서지다 결국 연기로 승화해 사라질 것만 같다. 밤에 더 어울리는 작가고, 두 번 읽기엔 큰 다짐이 필요한 글이다.


제임스 설터는 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50년 육군항공단 소속 전투기 조종사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 바 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 중에 전투기 조종사였던 사람은 생떽쥐베리와 로맹가리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 이들의 이름 밑에 제임스 설터를 적어놔야겠다. 그는 100회 이상 출격한 베테랑 조종사였다.


<사냥꾼들>은 이 때의 경험을 옮긴 설터의 데뷔작이다. 흔히 순수 문학 계열의 전쟁 소설이라 함은 그 비인간성과 야만을 고발하는 비판적 내용일 거라 생각하기 쉽고, 특히 설터의 특기가 허무를 묘사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얼추 분위기가 그려지기 마련인데, <사냥꾼들>은 다소 예상이 빗나가는 소설이었다. 폐허가 된 한국의 도시와 그 쓸쓸함을 지우기 위해 세워진 일본의 유흥가들. 한 남자의 긍지와 명예, 그리고 열정이 창대한 하늘을 떠나 지상으로 추락하는 모습. 이 이미지들이 후기의 설터를 특징 짓는 허무를 예고하고는 있지만 이 책에 오직 그것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고고히 비행하는 독수리의 모습이랄까. 허무보다는 오히려 고독이, 그 서늘한 바람이 온 몸을 휘젓는 힘있는 책이다.


클리브는 반드시 에이스가 되리라는(적기 5대를 격추한 조종사를 일컫는 말) 꿈을 안고 김포에 배속된 편대장이다. 그의 편대는 그가 배속되기 전까지 단 한대의 적기도 격추한 실적이 없다. 이 사실로 인해 클리브의 어깨는 무겁지만 마음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부풀어 오르는 열의에 의해 그 무게는 쉽게 상쇄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의 출격을 나간 뒤에도 여전히 그의 편대가 적기를 격추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클리브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지만 자기 자신을 믿고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한다. 비행술 면에선 부족함이 없었다. 그저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니까. 이 때 그의 편대에 갓 훈련 학교를 졸업한 편대원 펠이 배속된다.


클리브가 긍지와 명예로 달리는 기관차였다면 펠의 심장은 욕망과 오만을 태우는 용광로였다. 펠은 편대원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무모한 행동을 계속했다. 머리 속엔 오로지 자신이 적기를 격추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클리브는 펠의 행동을 저지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가까스로 한 대의 적기를 격추한 조종사가 됐을 때 그는 이미 한 전투에 두 대를 연달아 잡은 영웅이 되어 있었으니까.


이제 클리브의 편대는 더 이상 클리브의 것이 아니었다. 편대장 보다 뛰어난 부하. 펠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지 알고 있었지만 머나먼 곳의 장성들은 오로지 결과가 필요할 뿐이었다. 그의 실수로 동료가 죽었다. 대신 그는 두 대의 적기를 잡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뭐가 문제란 말인가?


동료들의 빈자리가 늘어날 수록 에이스가 되겠다는 클리브의 마음은 점점 회의감으로 차오른다. 그는 이 전장에서 승리와 패배 이외에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누구도 패배를 선택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점점 패배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승리와 패배. 클리브가 결국 무엇을 선택했는지는 이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기 바란다. 나는 그 장면을 읽는 순간 책장을 쥔 채 한 동안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우연을 운명으로 믿고 싶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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