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정말 무서운 책이다. 태어나서 이렇게 충격을 받아본 책이 몇 권이나 있었나 싶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역사학과 생물학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역사서다. 시원부터 현대에 이르는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600쪽으로 정리한 조감도. 혹은 인문학 총서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냥 정리를 잘한 거냐 하면 그렇지 않다. 모든 사안에 대해 독특한 해석을 선보인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인류는 약 7만 년 전 인지혁명을 일으켜 이후 3만 년 전 까지 언어, 바늘, 배, 활과 화살 등 다양한 도구를 발명했고 이는 현대 호모 사피엔스 사회를 이룩하는 초석이 된다. 그리고 이 인지 혁명은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속에 속한 유일한 인간 종으로 만들어 준다.


인류의 진화에 대해 우리가 갖는 많은 오류 중 하나는 먼 옛날 살았던 수 많은 원시인들이 하나의 종 안에서 순차적으로 진화해온 존재라고 믿는 것이다. 예컨대 네안데르탈인이 진화해 호모 에렉투스가 되고 호모 에렉투스가 진화해 호모 사피엔스가 됐다는 식으로 말이다. 진실을 말해주자면 그렇지 않다. 호모 사피엔스나 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 등은 모두 같은 시간 서로 다른 장소에서 살아간 독자적 '인간 종' 이었다. 고시히카리, 오대쌀, 추청, 남평, 동진 등으로 나뉘는 쌀의 품종과 똑같은 의미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의 결과로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 종이 됐다.


이 세상에 우리와 조금 다른 '인간'이 살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세계 인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다. 우리는 결코 유일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지구에 사는 수 많은 동물 종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만일 네안테르탈인과 호모 에렉투스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우리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호모 사피엔스 대통령은 자국민이 네안데르탈인과 결혼하는 걸 금지하거나 힘세고 강인하지만 우둔한 그들을 잡아 노예로 부렸을까? 아니면 스포츠 팀이나 군대에서 활약하는 네안데르탈인과 회계와 법률 회사에서 일하는 호모 사피엔스가 어우러져 서로의 차이를 좀 더 잘 이해하는 화목한 사회를 이뤘을까? 이런 가정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필연에 균열을 낼 수 있다. 그것은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상상은 곧 피비린내나는 범죄를 암시하는 흔적을 따라 나아간다. 호모 사피엔스의 대규모 인종 청소라는 혐의를 향해.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적 과오를 비판하는 책이 아니다. 그저 있었을 법한 가정들을 제시할 뿐이다. 어쨌든 호모 사피엔스는 인간 속의 유일한 승리자였고 자연을 독점한 그들은 바다로 산으로 삶의 터전을 넓혀나가며 수 많은 동물 종을 멸종시키는 데 기여한다. 그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호모 사피엔스는 확실히 네안데르탈인 보다 힘이 약했다. 메머드의 발길 한 번이면 대 여섯 명의 호모 사피엔스가 케첩 범벅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조직적이었다. 선발대를 보내 동물 떼를 추적하고 역할을 분담해 사냥에 나섰으며 교묘히 함정으로 유인했다. 이것은 분명 의사 소통의 힘이었다. 바로 언어가 승리의 칼자루였던 것이다.


언어는 효율적 사냥의 필수 요소였지만 오직 그것만을 위한 건 아니었다. 그 정도 의사소통이라면 침팬지, 고릴라, 돌고래 등 다른 포유류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언어의 가장 큰 목적은 '뒷담화' 였다. 호모 사피엔스는 뒷담화를 통해 관계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았고 관계에 대한 정보는 집단을 조직, 운영, 확장하는 데 필수 요소였다. 누가 누구와 관계를 맺고 무엇을 원하고 누가 믿을만한 사람인가에 대한 정보. 이것으로 호모 사피엔스는 150명 가량의 집단을 이룰 수 있었다.


여기서 150명 이라는 숫자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뒷담화를 통해 유지할 수 있는 집단의 규모가 딱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는 이 임계치를 넘어 수 만, 수십 만이 거주하는 제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놀랍게도 그것은 허구를 창조해내는 능력이었다. 인간은 신화, 종교, 민족, 국가라는 상상의 존재를 만들어 수 많은 인간을 하나로 묶어낸다. 


생각해보자. 이슬람 교도들은 왜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지구 반대편의 이슬람 교도들을 형제라 부르는 걸까? 우리는 왜 올림픽 시상대에 걸리는 태극기를 보며 가슴 뭉클해 하는가? 그들이 알라, 성경, 단군, 국기의 존재를 함께 믿기 때문이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라도 하나의 공통된 신화를 믿게 되면 대규모 협력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하나 있다. 소규모 집단이야 단순한 수렵과 채취로도 충분히 먹일 수 있었겠지만 수 만, 수십 만의 사람들을 굶기지 않으려면 혁명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법이다. 인류는 오래지 않아 그 해답을 찾아냈다. 바로 농업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자, 이제 인류는 유례없는 성장을 거듭해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대규모의 집단을 이뤄냈다. 하지만 성장이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농업 혁명은 조, 피, 귀리, 콩, 벼, 밀 등 다양한 곡식을 골고루 섭취하던 수렵인의 식탁을 벼 또는 밀로 고정시켜 버렸다. 집단 전체의 영양을 한 두 종의 곡물에 맡겨버린 상태. 그들에게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충고를 해줬어야 하는데! 예컨대 어느 해 이상 저온 현상이 발생해 벼들이 모두 얼어 죽었다고 가정해 보자. 귀리와 피, 조가 자라던 들과 사과, 배, 밤이 떨어지던 숲은 이미 불태워 논으로 바꾼지 오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먹을 걸 구해야 할까? 도시의 출현과 농업의 시작으로 인해 인류를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기아라는 재난에 맞닥뜨리게 된다.


어쩌면 유전자 환원주의자들의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역사란 그저 유전자의 의지로 쓰인 시나리오일 뿐 고귀한 정신의 산물이 아니다. 인류는 더 강해지기 위해 신화와 국가라는 허구를 만들어냈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해 강해진단 말인가. 이득을 본 건 오직 유전자 뿐이다. 개개의 행복 따윈 아무런 관심이 없어, 유전자의 목적은 그저 개체수를 최대한 늘리는 거니까.


<사피엔스>는 규모를 지향하는 현대 사회에 아주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수렵 채취인들은 이른바 문명인들보다 굶주리지도 않았고 덜 행복하지도 않았다. 평균 수명은 다소 낮을 수 있었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 더 행복한 삶을 누렸다. 그들은 전쟁에 참여하라는 국가의 부름도 받지 않았고 집단 간의 갈등도 비교적 원만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 끔찍한 살육과 전쟁은 언제나 정착민의 소유였다. 한 마을에 집과 소와 논과 곡식 창고를 가진 사람만이 그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법이다. 애초에 먹을 만큼만 축적하던 수렵인들은 몸이 가벼웠다. 그 정도 규모의 사람들을 먹일 곳은 얼마든지 다시 찾을 수 있었으니까, 그들은 미련 없이 살던 곳을 떠나 쓸데 없는 다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역사는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모든 해답은 역사 안에 있다. <사피엔스>를 읽고 나면 그런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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