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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과 문학 2016.가을
주변인과문학 (월간지) 편집부 지음 / 주변인과문학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읽기만 하는 게 싫어 쓰기 시작했고, 그 일도 어느새 7년이 되 버렸다. 2년 전부터는 소설을 쓰고 있다. 매일 아침 한 시간. 아침 일찍 나와 글을 쓰고 있으면 오며가며 사람들이 묻는다. 책은 언제 나오냐고, 이쯤이면 뭐가 됐어도 되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하지만 나의 경우 딱히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놓고 쓰는 건 아니다. 막연히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다, 언젠가는 글을 쓰는 직업을 가져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 같은 희망을 갖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1년 안에 소설을 한 권 쓰겠다 신춘문예에 등단하겠다 라는 구체적 비전을 가진 건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냥 쓴다 라고 해야 할까?
하루키는 이와 비슷한 얘기를 좀 더 세련되게 말한 적 있다. 그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필연성’ 때문이라고 했다. 쓸 수 밖에 없는 상황. 딱히 정의할 수 없는, 어떤 미지의 힘에 의해 자연스럽게 책상에 앉아 종이를 펼치고 펜을 들게 만드는 것. 많은 사람들이 “이런 건 나도 쓰겠다.” 라고 말하지만 평생 동안 단 한 자도 쓰지 못한 채 흙으로 돌아가는 이유도 이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써야 할 필연이 없다. 내림굿을 받지 않으면 온몸이 아파 견딜 수 없는 무병 환자처럼, 어느 순간 이야기가 목에 걸려 토해내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시간이, 쓰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찾아온다.
인간의 삶이란 그 자체가 고유한 이야기고, 그래서 산다는 것 만으로도 작가가 될 자격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지만, 결국에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여기서 나고 만다.
나는 7년 전 어느 날 그 필연을 느꼈다.
이 책의 신인문학상 수상자 명단에 나의 이름이 있다. 대상은 아니기에 아직 등단한 것도 아니다. 상금은 적다. 응모된 소설은 150여편에 지나지 않는다. 대상을 포함한 수록작 4편에는 “그런대로 품격을 겸비한 4편의 소설” 이라는 부끄러운 총평이 붙었고, 내 소설은 “이야기 전개가 함께 가지 않고 제각기 노는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라는 말을 들었다. 변명을 하자면, 아마도 글을 쓰는 습관 때문일 것이다. 세 시간, 네 시간 충분히 시간을 갖고 목표한 만큼 쓰는 게 아니라 딱 한 시간, 그 시간을 넘기고 나면 두 말 없이 손을 뗀다. 그래서 이야기는 흐름을 잃고 제각기 놀았던 거겠지. 한다고 했던 퇴고도 아직은 많이 부족한 모양이다.
상을 받고 난 뒤 오히려 자신감이 떨어졌다. 주변 사람들이 많이 읽을 수록 더 그렇다.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침묵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누가 내 글을 조롱하고 업신여긴다 할지라도 나는 계속해서 쓸 수 밖에 없다. 쓰는 마음과 쓴 것에 대해 상처 받은 마음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두 개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각각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내 글에 박힌 가장 우울한 말을 들은 날에 썼다. 그것은 어렵거나 어렵지 않다고 따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냥 썼다. 내 마음이 상처를 받은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쓰는 것 또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경험하며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꼈는데, 그것이 왜 나왔는지 도대체 무엇에 대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책상에 앉아 그 감정을 표현할 말을 오랫동안 찾아 보았다. 하지만 이 밤이 다 가도록 나는 아직 그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쓰는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