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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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를 아주 코딱지만큼 읽어봤을 때 아무래도 주제 사라마구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철학적 은유를 대량으로 우겨 넣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지루함을 제공하는 게 그 책의 목표인 줄 알았다. 제목이 너무 거대했어, 내가 뭘 몰랐던 거지.


우연히 <카인>을 보고 첫 페이지를 읽는 데 그런 게 아니었다. 주제 사라마구, 대단하다! 신성모독 만큼은 니체, 러셀, 커트 보네것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여기 진짜가 있었다. 게다가 책도 210페이지 밖에 안된다. 온갖 미덕을 갖춘 완벽한 책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2010년 여든 일곱의 나이로 죽었고 <카인>은 2009년에 썼다. 여든여섯에 쓴 책이다. 86살 말이다. 창작욕엔 정말 한계가 없는 걸까? 인간은 대개 죽을 때에 이르면 마음이 약해지고 손과 혀 끝에서 뿜어져 나오던 독도 중화되기 마련인데 이 노인네는 끝까지 꼬장꼬장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삶의 커튼을 몰래 젖혀 그 너머를 봤을 것이다. 그리고선 확신을 한 거지. 거기엔 죄 지은 자를 벌하는 지옥도,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이도 없다는 것을.


<카인>의 주인공은 카인이다. 아벨을 죽이고 광야로 내쫓긴 인류 최초의 살인자 말이다. 하나님은 카인을 내쫓으면서 이마에 낙인을 찍었고 그 낙인이 있는 한 세상 무엇도 카인을 죽일 수 없을 거라고 선언한다.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신조차 몰랐으리라. 죽지 않는 카인은 이곳 저곳 세상을 돌아다니며 말썽을 피운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을 물릴 수 없었으므로 카인의 만행을 보고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니! 좀 이상하지 않은가. 전능한 신이 못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했던 말을 물리는 것 따위 호떡 뒤집기 보다 쉬웠겠지. 그러니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이다. 신은 왜 말썽꾸러기 카인을 죽이지 못했을까?


내 생각은 그렇다. 이건 자존심 싸움이었다. 죽지 않는 카인은 시간을 초월해 아브라함을, 소돔과 고모라를, 노아를 만나 신께서 예비해 놓으신 미래에 똥 오줌을 범벅해 놓는다. 그 때마다 신은 멍청한 얼굴로 뒤늦게 나타나 "이게 다 무슨 일이냐?", "너는 나의 아브라함을 나의 노아를 어떻게 했느냐?" 고 묻는다. 전지한 신에게 질문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도 신은 묻고 또 묻는다. 이유가 뭘까? 카인은 신의 딜레마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신이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거라면, 카인이 어떤 행동을 할지, 그로인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예상하지 못했다면 신은 스스로 자신의 전지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이 때 카인은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스스로 역사를 만들고 시간을 창조할 수 있는 위대한 주체가 된다. 신은 전지하지 않다. 그조차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인간들이여 기억하라, 시간은 우리의 것이고 그가 예비해 놨다는 미래는 그의 욕망에 불과할 뿐이다.


반대로 신이 다 알면서도 묻는 거라면? 그는 음흉한 능구렁이가 된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음에도 손 하나 까딱 않고 있다 일이 터지고 난 뒤에야 나타나 멍청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세상을 창조한 이유는 인간의 실수를 방조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 받는 걸 즐기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신의 딜레마다. 자기도 몰랐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음흉한 능구렁이임을 시인해야 하는가? 카인은 이 딜레마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신은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신의 위대한 의도는 인간이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 도망친다. 신은 아마 카인을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훑어보면 하나님 만큼 권위에 집착하고 무자비한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모두를 잔인하게 죽였다. 그런데도 카인에게 부여한 영생을 거두지 못한 건 순전히 자존심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카인을 죽이면 하나님이 지는거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카인을 방치하면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역사를 망칠 것이다. 자, 이제 신에겐 그 유명한 대사를 읊을 때가 왔다.


살리느냐 죽이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카인>은 신의 딜레마로 가득한 소설이다. 신은 딜레마에 빠져 인간처럼 허우적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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