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문장들 - 뜯어 쓰는 아트북
허윤선 지음 / 루비박스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나는 기획 의도가 너무 선명하게 드러나는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과연 한 권의 책을 읽은 것인가 같은 의문을 들게 하는 책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림이 난무하거나 지면이 헐렁거릴 정도로 여백이 창궐하는 책들 말이다. 그런 면에서 <그림과 문장들>은 나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평소라면 결코 사지 않았을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은 건 나에게 아무 생각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떤 그림을 볼 때면 책이 떠올랐다고 말한다. 그래서 100점의 그림에 100가지 문장들을 모았다. 어떤 것들은 그림이 좋았고 어떤 것들은 문장이 좋았다. 그림이 좋았던 것들과 문장이 좋았던 것들을 여기에 옮긴다.



그림이 좋았던 것들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 <작은 도둑>, 1900, 캔버스에 유채, 124x70cm





구스타브 카유보트, <창가에 서 있는 청년>, 1875, 캔버스에 유채, 117x82cm





빌헬름 함메르쇠이, <젊은 여자의 뒷 모습이 있는 실내>, 1904, 캔버스에 유채, 60.5x50.5cm



문장이 좋았던 것들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중요한 깨달음 중 하나는 꿈꾼 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 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



"미토르니히 조르겐." 유태어를 모를까봐 말해주겠는데, 

그건 세상을 원망할 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 세상을 원망할 건 없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또 사랑하고 있으니까.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행복한 사람은 의미를 따지지 않으며, 그냥 살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삶에 대해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 인생을 즐긴다. 

- 한스 크루파, <영원과 하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으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 오르텅스 블루, <사막>



나는 기적 같은 역전을 꿈꾸었다. 복권에 당첨되어 수백만 달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따위의 

일확천금을 꿈꾸며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처음에는 한 입, 다음에는 두 입, 다음에는 세 입을 먹여 살리려고 애쓰면서 몇 년을 지낸 뒤 

결국 내기에 지고 말았다.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시간을 얻기에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돈을 벌기에는 일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 

- 폴 오스터, <빵 굽는 타자기>



<그림과 문장들>을 읽고 나면 두 가지에 놀란다. 첫 째는 저자의 독서량이다. 100점의 그림에 100가지 문장을 붙이려면 적어도 1,000점의 그림에 1,000가지 문장을 봤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그림을 보면 '문장'을 떠올릴만큼 단단히 책을 읽는 사람이다. 그림을 보고 단순히 '책'을 떠올리는 게 아니란 말이다. 둘째는 나의 멍청함이다. 어디서 이런 문장이 나왔을까 싶어 제목을 더듬다 그게 이미 내가 읽었던 책이라는 걸 발견하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민망함이 얼굴을 찌른다. 삶은 망각과의 싸움이다.


문장들 중엔 책을 사들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신중에 신중을 기할 것을 충고한다. 여기 모인 문장들이 진주라면 한 권의 책은 진흙탕이다. 그 한 알의 진주를 찾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진흙탕을 뒤져야 하는지, 보석을 보는 순간엔 결코 깨닫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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