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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대한다 ㅣ 이후 오퍼스 7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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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플라톤이 예술을 현실의 모방으로 정의한 이래 예술은 끊임없이 자기의 존재 의의를 증명해야만 하는 비참한 쳇바퀴를 굴려왔다. 스승의 말이라면 사사건건 토를 달았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역사상 최초로 예술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고 아주 체계적인 글까지 남겼지만 사실 그건 플라톤에 대한 반박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견해에 동의했다. 단지 그것이 유용하다고 말했을 뿐이다.
예술이 객관적 미의 구현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주관적 표현이라는 관점을 널리 받아들인 오늘날에도 그 정당성에 대한 물음은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 것이냐?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 오래된 편견 안에서 사람들은 예술이 다른 무언가를 가리킨다고 믿는다. 예술은 무언가의 상징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예술은 그저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와 본질은 예술 작품이 가리키는 어떤 곳 즉 예술 작품의 너머에 존재한다.
만약에 내가 망치를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망치라고 말할 것이다. 거기엔 일말의 주저도 의심도 없다. 그런데 내가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를 가리키면?
현대인들은 비평을 통해 예술을 받아들인다. 비평은 예술을 해석해 그것이 왜 예술인지를 밝혀낸다. 여기서 그들이 집중하는 건 내용이다. 그래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독재자 프랑코와 나치의 잔혹성을 폭로하는 정치적 메시지가 된다. 하지만 이게 과연 유일한 길일까? 우리는 <게르니카>를 그저 고통, 비애, 슬픔, 좌절 같은 감정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걸까?
예술은 감각의 총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을 감각하지 않고 이해하려 드는가? 예술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엔 확실히 문제가 있다. 수잔 손탁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주장하는 요지도 바로 이거다. 예술을 다른 무엇이 아닌 그 자체로 받아들이라는 것.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내용을 쳐내서 조금이라도 실체를 보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에 대해 뭔가를 말하려 한다면 우리는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훨씬 더 실감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p34~35)
현대 예술이 그토록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해석으로부터 탈주하고픈 욕망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의 해석은 거부한다. 그리하여 예술은 침묵을 하나의 주요한 양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맙소사, 현대 예술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해석을 쏟아내지 않는가! 뿐만아니라 현대 예술은 비평과 모종의 뒷거래를 벌이기도 한다. 까놓고 말해 캔버스 전체를 어지럽게 채운 페인트가 비평없이 예술이 될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문화는 무절제와 과잉 생산에 기초한 문화다. 그 결과, 우리는 감각적 경험의 예리함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p.34).
1933년애 태어난 손탁의 시대에도 이미 감수성의 종말이 문제시 되고 있었다. 이후로 우리가 그것을 회복할 시간을 가진 적 있을까? 우리는 21세기에 산다. 감성은 이미 멸종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