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의 국가와 역사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화정 옮김 / 혼미디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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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라는 이름만 듣고 덜썩 구매한 게 잘못이었다. 수 천년의 역사를 양 손에 쥐고 주물러온 여자다. '국가와 역사'에 대한 심사숙고, 특유의 쿨한 문체로 써내려가는 혜안을 기대했는데, 그냥 여기저기 널려 있던 글을 짜집기한 책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글 사이사이 등장하는 편역자의 참견은 사족도 그런 사족이 없어. 만드느라 애쓴 사람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시오노 나나미에게 최고의 남자는 마키아 벨리였고 마키아 벨리에게 최고의 남자는 체사레 보르자였다. 이 세 사람을 하나로 꿰뚫는 문장은 이거다.


"뭔가를 지키고 싶으면, 때로 그것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는 일도 감히 하는 용기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예컨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자들이 이를 위해 민주적 방식만 고집하다간 결국 비민주적인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몰락한다는 것이다. 정의와 이상은 현실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하다. 그걸로 원하는 바를 거머쥘 수 없고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 정신이 아무리 숭고한들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다. 극단적 실용주의와 철저한 현실 인식. 자신의 주장을 내뱉음에 있어 한치의 주저도 없는 자신감. 시오노 나나미에게 마음을 뺏긴 사람은 대개 여기에 꽂힌거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여자를 적으로 만나고 보니 그 쿨함이 섬뜩함으로 다가온다. 작가가 아닌 일본인, 특히 그 일본인이 자국의 외교에 대한 견해를 피력할 때 한국인인 나의 가슴은 증오와 경멸로 날카롭게 벼려진다. 이럴 때 이 할머니는 영락없는 극우파 싸이코패스의 모습을 한다.


"유럽은 무려 천 년 동안 서로 전쟁을 했습니다. 바로 그런 것에 대한 반성으로 '최소한 전쟁은 하지 말자'며 EU를 만든 겁니다. 그런데 아시아는 섬 이름이니 바다 이름, 신사 참배 같은 체면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유럽이 EU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런 것에 대한 반성"이 전범국의 철저한 반성과 화해의 노력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총리의 신사 참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지 개인의 의사 표현에 불과한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자가 전범의 위패 앞에서 고개를 속인다. 그 순간 총리가 떠올리는 생각은 무엇인가? 전범국으로서의 반성인가? 아니면 전쟁 패배에 대한 반성인가?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면 독도는 다케시마지 더 이상 독도가 아니다. 독도가 아니라면 그 섬이 한국의 것일 수 없다. 이름은 단순한 겉치레가 아니다. 이름은 권력을 반영한다. 소유권이 있는 자만이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꿔 부르면 소유를 뿌리서부터 흔들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기본적으로 일본을 전범국으로 간주하는 것 같지도 않고 타인의 고통에 매우 둔감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전쟁의 잘못은 자신들이 저지른 비인륜적 행위가 아니라 그 전쟁에서 패배한 거라고 여기고 있다. 이러한 태도로는 일본의 외교가 얻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실제 일본은 아베 총리 취임 이후 전세계적 왕따가 되어 외교의 장에서 자취를 감췄지 않은가?


남의 나라 남의 역사를 얘기할 땐 쿨하고 대범한 실용주의를 펼치지만 내 나라 얘기가 나오자 평범한 노인네의 뻔한 '곤조'가 드러난다. 나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곤조를 지키고 싶으면, 때로 그것의 근본 태도에 어긋나는 일도 감히 하는 용기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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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머리칼 2015-07-12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감상평이십니다..저는 시오노 나나미를 군국주의자로 생각합니다..

한깨짱 2015-07-16 13:07   좋아요 0 | URL
시오노 나나미는 힘에 대한 의지가 어마어마한 사람 같습니다. 패권주의자에 군국주의자 같은 느낌이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