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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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은 항상 신문을 읽으라고 말했다. 기사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듣고 사설로 자기 생각을 키우라고 하면서.


<보바리 부인>의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신문이 대량 발행되던 시대에 살았다. 그는 신문이 쓰레기라고 말했다.


"소작농들이 중산층의 4분의 3보다 덜 멍청하다. 중산층은 항상 자기들이 신문에서 읽은 것에 대해 법석을 떨고 한두 군데 신문에서 얘기한 것에 따라 풍향계처럼 빙글빙글 돈다." 플로베르는 오로지 완전한 문맹자와 무지렁이 프랑스인들만이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p.80)


나에게 신문을 읽으라고 종용했던 어른들에게 바보 상자는 언제나 TV였다. 오늘날 나에게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스마트폰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바보 상자는 신문에서 TV로 TV에서 스마트폰으로 변해왔지만 따지고 보면 그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매체가 쏟아내는 정보들, 즉 뉴스가 문제다.


인간은 뉴스로 세상을 지각한다. 플로베르는 바로 이 문제를 간파했던 것이다.


뉴스는 어머니를 죽이고 불을 지른 아들의 살인을, 이집트 콥트 교도를 산채로 불태운 IS의 만행을, 심각한 부정부패를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웃는 정치인을, 누드톤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의 몸매를, 무너진 건설 현장에 깔려 죽은 노동자의 사망 사고를 24시간 365일 쉬지 않고 보도한다.


뉴스를 읽다보면 이 세상은 불의의 사고로 충만하고, 윤리와 도덕은 완전히 무너졌으며 악인과 미치광이로 가득해 도무지 살만한 곳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지구에선 수 억 명의 사람들이 따뜻한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황금빛 해안을 거닐고 사고 없이 자동차와 전철과 비행기를 타는 등 못해도 55억명의 인간은, 별일 없이 잘 산다.


뉴스는 일반적으로 평범한 일을 보도하지 않는다. 이 말은 뉴스가 세계를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앞에 펼쳐진 뉴스의 스크린은 너무 거대하고 자극적이라 우리는 그 너머에 진짜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이 대목에서 알랭드 보통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결코 파괴적이지 않다. 보통은 뉴스가 이미 우리 세계를 단단히 둘러싼 피부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벗겨내거나 다른 것으로 교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피부의 감각을 더 예민하게, 그 밖의 세계를 투과할 수 있을만큼 투명하게 바꿀 수 밖에 없다. 뉴스는 사람들의 눈을 자극하는 살인, 교통 사고, 전쟁, 경제 위기를 오로지 사실에만 기반해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우리가 그 관계를 통해 무엇을 '더' 깨달아야 하는지 적극적으로 알려줘야 한다. 


보통은 '객관적 사실 보도'를 신성한 소처럼 숭배하는 뉴스의 심장에 칼을 꽂는다. 보통은 뉴스가 문학이 되기를 촉구한다. 기사에 생생한 감정과 사적 의견을 담아 더 호소력 있는 뉴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미친 소리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수 천 년간 사실을 각색하고, 허구의 인물을 만들고, 가상의 사건과 공간을 기술해왔음에도 문학이 뉴스보다 더 오래가고 감동적인 '진리'를 전달했음을 생각해보면 과연 알랭드 보통의 주장을 허튼 소리로만 치부할 수 있을지 의심이 간다.


<뉴스의 시대>가 편안한 점은 우리가 자극적 뉴스에만 눈길을 주고 그 내용에서 우리의 삶을 개선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점을 단순히 대중의 천박함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랭드 보통은 오만한 계몽의 연단에 서서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에게 호통을 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이 뉴스에게 권하듯 철학을 더 호소력 있게 만드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인다.


알랭드 보통의 철학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그의 책은 충분히 쉽다. 바로 이러한 점이 알랭드 보통의 철학을 인기 있는 대중서로 만드는 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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