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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3월
평점 :
사람은 확실히 변하는가 보다. 12년 만에 <나무>를 다시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초는 2003년 8월이었다. 을지포커스렌즈 훈련을 위해 2군 사령부로 파견을 나간 나는 무더움 여름밤이 몰아닥친 상황실에 앉아 적군의 침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실 속의 전쟁이란 참호를 파고 봉쇄선을 펼치고 탐색격멸을 시도하는 전쟁과는 사뭇 다른 것이어서 컴퓨터와 연결된 커다란 브라운관 TV에는 찰리, 에코(CE)로 시작하는 후방 지역의 평편한 지도만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 무한의 모눈 옆에서 <나무>를 발견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 정신의 일면은 극도로 단순화된 사물 혹은 일에 침잠해 들어가 해탈을 이루려는 정신의 또 다른 일면을 잡념의 작살로 꽂아 삶의 비린내가 풍기는 부둣가로 끌어 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해에서 끌려나온 정신이 언제나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 건 아니다.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책 한 권을 하룻밤 새에 읽는 경험을 했다.
<나무>는 잡념에 습격당한 내 정신의 일면을 순식간에 몰입의 세계로 되돌려놨다. 내가 주변을 다시 인지하게 된 건 <나무>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였다. 나는 2003년의 어느 여름밤, 분명히 한미 연합 훈련이 펼쳐지는 사령부의 중심부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건 후방을 교란하는 적의 특작부대나 포격을 시도하는 워게임의 커맨드 라인이 아니었다. 오로지 <나무> 만이 있었다는 기억이다.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2015년 겨울, 옛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이 책을 구입했다. 페이퍼백 이었던 책은 신판과 함께 양장본으로 변했다. 변한 건 그게 전부였을까?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나는 내 마음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눈치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변해버린 첫사랑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불과 몇 초 전, 한 방울의 추억 만으로도 요동을 치던 심장은 간사하리만큼 빠르게 침착을 찾았고, 뜨거운 기대와 열광과 사랑으로 어쩔 줄 모르던 몸가짐은 예의 바르지만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매너를 두른 채 평정을 지켰다.
12년 전, 딱 하룻밤을 보낸 옛 연인은 우리가 나눈 과거를 하나씩 꺼내 오래된 난로에 넣고 불을 붙였다. 그러나 초라할 정도로 작은 불꽃은 이미 식을대로 식은 냉기에 눌려 깜박깜박 위태롭게 흔들릴 뿐이었다. 우리의 과거는 좀처럼 미래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대화가 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우리가 서로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던 이유는 단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지막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난로에 물을 붓고는 건조한 악수를 건넸다.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완벽한 작별 인사였다.
사랑이 변하는 걸까? 사람이 변하는 걸까? 지나온 세월 동안 내가 성장한 걸까? 아니면 잃어버려선 안되는 뭔가를 잃은 채 살아온 걸까?
답이 무엇이든 중요한건 내겐 더 이상 <나무>가 필요치 않다는 사실이다. 12년 전의 그 날에 대해선, 그저 한 여름 밤의 꿈이었다고 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