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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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은 카스테라 이전의 소설, 그러니까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소설가가 몸 안에 피어오르는 독과 비관을 버무려 지었을 법한 우울한 소설이야. 페이소스를 섞되 결코 상큼한 유머를 잃지 않던 박민규가 어쩐지 제대로 비뚤어진 느낌이랄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설이 출간된 2006년으로 돌아가보자.


2006년에는 김정일 조선노동당 총비서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비공식 방문했고 필리핀 마닐라의 한 경기장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해 88명이 숨지고 280명이 다쳤으며 일본 시마네 현에서 다케시마의 날을 강행했고 아베 신조가 집권에 성공했고 롯데월드 아틀란티스 탑승객 1명이 숨졌으며 신촌에서 선거 운동을 하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피습됐고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교수형에 처해졌지.


와, 특별할 거 하나 없는 해였잖아!


몰이해와 전쟁, 정치공작, 안전불감증에 의한 사고,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을 못 믿고, 미워하고, 죽이는 일 따위는 인류가 항상 해왔던 거잖아. 이제와서 특별히 우울해 할 일이 있느냔 말이지. 우울할 이유가 있다면 한가지 뿐이야.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핑퐁! 


그래, 그래서 <핑퐁>이 나온 거라고, 나는 생각해.


<핑퐁>은, 말하자면, 카뮈적 부조리라는 빵틀에 사르트르식 실존주의로 기름칠을 하고 천 번, 만 번, 백만 번 지겹도록 치댄 맑시즘 반죽을 천 겹, 만 겹, 백만 겹으로 쌓아 270도로 예열한 포스트모던에 넣고 구운 겁나 맛있는 페스트리야, 라고 하는 건 8족 외계인이 7번째 발의 3번째 발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는 것 같은 소리고, 그냥 재밌음. 한 번 읽어보삼.


박민규의 소설을 읽는 건 마치 격렬한 브레인스토밍 과정을 편집 없이 보는 듯한 느낌이야. 이리저리 복잡하게 뻗은 마인드맵 같지. 이를테면,


제목이 <핑퐁>이라 탁구 얘기가 나올 줄 알았지? 천만에, 탁구 얘기야.


미안.


물론 좀 다르지. 탁구 시합의 승패로 인류 문명의 종말 여부를 가리자는 얘기니까. 이쪽 편은 하루종일 뚜두려 맞는 게 일인 왕따 중학생 못과 모아이, 상대는?


당연히 쥐와 새지.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 법이니까.


법대로 하자면 불가능한 얘기야. 물론. 하지만 세끄라탱이야. 두 명의 주인공에게 탁구를 가르친 게. 세계 대회 참가를 위해 한국에 들렀다 그대로 눌러 앉은 외국인. 알고보니 탁구계의 간섭자더라고. 이 우주의 신이었던 거지.


우리도 컴퓨터가 느려졌다 싶으면 멋대로 하드를 밀고 다시 윈도우를 깔잖아. 좀 있다 싶은 사람들은 윈도우7 Ultimate K, 나같은 고인류(古人類)는 10년도 더 된 XP 씨디를 꺼내들겠지. 어쨌든 그럴 때마다 물어본 적 있냐는 거야. 이를테면 파워포인트나 워드 혹은 크롬 브라우저나 인터넷익스플로어, HWP 따위에게, 


포맷을 해도 좋겠냐고.


따지고 보면 냉혈한처럼 보이는 세끄라탱에게도 나름의 연민이 있었던 거지. 원칙도 확실하고. 그러니 너무 원망하지는 말자. 이기면 되잖아. 그 탁구 경기에서.


문제는 못과 모아이 연합팀이 경기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그들이 인류의 존속을 원할꺼냐는 거지. 매일매일 뚜두려 맞는, 60억 인류로부터 '배제'된 그 외로운 아이들이. 아이들은 뭘 원망할까? 자기들을 배제한 인류를? 왕따 같은 거 눈 하나 깜짝 않고 만들어 내는 인류의 사악한 본성을? 아니면 태어난 것 자체에 대해.


내 생각은 이래.


인간은 존재하는 한 사악해 질 수 밖에 없어. 그러니 태어나질 말아야지. Happy Birthday to you? 무슨 근거로 인간의 탄생을 축하하는지 모르겠어. 우리 중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사람 있어? 탄생은 우발적 사고야. 삶은 그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 불과하고.


이를테면, 


아, 네, 난자씨, 저는 정자라고 합니다. 제가 지금 거기 들어가면 사람 하나가 나오는데요, 어떻게, 괜찮겠어요? 라고 매너를 차리는 사이 후다닥 비집고 들어간 올챙이 한 마리가 난자를 강간해 나와 당신이 만들어진 거야. 창조의 순간은 이런 비매너와 폭행으로 얼룩져 있지. 그래서 생일을 축하한다는 건 폭력에 순응하고 협잡을 옹호하겠다는 의미일 수 밖에 없어.


한 가지 다행인 건 아주 가아끔, 매너를 차린 정자가 난자와 만나 아름다운 사랑을 나눌 때가 있다는 거야. 그럴 때 우린 박민규 같은 소설가를 얻지. 인간의 행위를 쑥쓰러워하고, 참회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을.


참회하는 인간에게 세계를 포맷할 권한이 주어졌을 때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다면 <핑퐁>을 읽어봐. 그러고 나면 당신도 당신의 탁구대에서 어떤 승부를 벌여야 할지 감이 올테니까. 준비가 됐으면 다함께 외쳐보자. 모쪼록 경쾌하고 상쾌한 게임이 되기를 바라며,


핑!

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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