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열린책들 세계문학 11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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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라 불리운 사람들


흔히 장르 문학의 대가라 불리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 칭호를 획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첫째, 해당 장르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된 세계관, 혹은 테마의 원형을 창조했다.

둘째, 바깥의 의견은 관심 밖. 오로지 자체의 형식과 체계를 단단히 해 범접할 수 없는 장르의 성벽을 쌓아올렸다.

셋째, 심오한 주제 혹은 독특한 문체를 더해 장르 문학을 순수 문학의 경지로 올려놓았다.


첫 번째에 속한 작품을 현대에 와서 읽는 건 상당한 실망을 유발할 수 있다. 당신은 책을 읽는 내내 '도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라는 의문을 수 없이 되뇌이다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을 만든 사람입니다'라는 틀에 박힌 평가를 내놓을 뿐이다


두 번째에 속한 작품은 읽는 건 상당한 고역이 될 수 있다. 성벽은 까마득히 높고 또 낯설어 감히 올라갈 엄두 조차 나지 않는다. 가까스로 올라가 성 안을 보는 경우도 있지만 그곳이 긱과 괴짜들의 소굴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그래서 가장 무난한 게 세 번째에 속한 작품들이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바로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소설이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한 마디로 말하면 -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지만 - 로저 젤라즈니는 심오한 베르베르 이자 문학을 전공한 테드 창(<내 인생의 이야기>의 저자, 공학을 전공함)이다. 


젤라즈니의 소설은 SF를 표방하고 있으나 그가 방점을 찍는 곳은 과학 기술이 아니다. 그는 종교와 신성, 인간의 정복욕과 자기 파괴욕, 불사의 아이러니와 인간의 이중성, 판타지와 신비주의 등 철학적, 신화적 관념을 적극 흡수함으로써 쇠 맛이 전혀 나지 않는 SF를 만들어낸다. 이는 'S'에 천착하려는 골수 팬들에겐 모욕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풍부한 상징과 상상력을 공급한다는 측면에선 가히 장르의 축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특히 소설이 드러내는 강한 판타지적 요소에서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전술했듯 젤라즈니가 관심을 갖는 영역은 종교와 신화, 신비주의 등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러한 소재를 다루기엔 아무래도 전통적 'S'F 보단 판타지가 결합된 새로운 서사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이유야 어떻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젤라즈니의 작품이 단순한 장르 문학에 그치지 않고 위대한 신문학에 이를 수 있었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 



SF에 바치는 장미


흔히 오타쿠들의 소설, 머저리 괴짜들의 이야기로 알려진 SF는 많은 사람들의 경멸을 받아온 장르였다. 과연 그 사람들 중 몇 명이나 SF를 제대로 이해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독이라면 대한민국에서 내노라 할 지식인 박경철은 자기 인생을 통털어 가장 재미있었던 소설 중 하나로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를 꼽은 적이 있다. 특정인의 권위에 힘 입어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건 바람직하지도 않고 내 스타일도 아니지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유명인이 있다는 게 일말의 안도감을 주는 건 사실이니 거기에 힘 얻어 한 마디 하겠다. 로저 젤라즈니의 SF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장르다.


혹자는 신에 대한 고찰은 니체로 충분하고 신화의 세계는 이미 조 프레이저가(<황금가지>의 저자) 끝낸 바 있으며 과학 기술의 발전 속도는 더 이상 우리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며 SF 무용론을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이야기의 전달력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예컨대 신성이란 '신성'이라는 단어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을 지닌 캐릭터가 특정한 세계 속을 헤집고 다닐 때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드러난 실체는 온갖 학문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표현한 개념을 초월한다. 개념을 초월해 실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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