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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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림으로 빽빽히 둘러 쌓여 산 속은 컴컴했다. 컴컴한 그 산을 사람들은 흑산이라 불렀다. 오늘날 홍어로 유명한 이 섬은 1801년 부터 1816년 까지, 정약전이 16년간 유배를 산 섬이었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큰 형이다. 김훈의 <흑산>은 정약전의 이야기다. 



익숙한 나라의 익숙한 백성들


김훈은 늘 역사적 인물을 그리지만 역사적 인물만을 그려본 적은 없다. 어쩌면 그는 민초들의 삶을 그리기 위해 역사적 인물을 빌려오는 걸지도 모른다. 김훈의 소설엔 이처럼 바글거리고 개미처럼 짓밟히는 민초들의 삶이 존재한다. 백성은 그의 소설 속에서 언제나 고통으로 실존을 증명한다.


정약전은 유학의 이념이 지고한 시절 사특한 학문(천주교)에 빠져 사직을 능멸하고 군왕을 욕보인 죄로 흑산에 유배됐다. 사학에 물든 양반은 유배를 당하지만 사학에 물든 백성들은 곤장에 맞아 엉치뼈가 뒤틀리고 척추가 깨져 죽었다(김훈은 원고지에 연필로 한 자, 한 자 눌러 적는다는 데, 그래서인지 민초들의 엉덩이에 내려지는 곤장의 무참함이 읽는 사람의 피부에까지 전달된다). 그러나 나를 괴롭히는 건 매를 맞고 죽어간 백성들이 아니다. 매를 맞고도 살아 목숨을 연명한 백성들이다. 


김훈은 역사를 옮겨 다니며 늘상 같은 고통을 늘어놨다. 따지고보면 신라의 철제 도끼를 머리에 맞고도 살아난 자들의 자식이(<현의 노래>) 충무공의 수군을 따라 피난지를 옮겼던 백성들(<칼의 노래>)일 것이며 울음이 잠시 그친 피난지 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남한산성(<남한산성>)에 갇혀 신음한 백성들이고 그 신음 속에서 잉태된 생명 바로 곤장에 엉치뼈가 뒤틀리고 척추뼈가 깨진 <흑산>의 백성들일 것이다.


김훈의 소설 속에서 고통은 역사와 무관한, 그 어떤 변수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영속적 실재이거나 혹은 역사의 본질이다. 안타까운 건 둘 중 뭐가 맞든 우리는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생을 이어가고자 하는 민초의 생명력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언젠가는 고통이 없는 곳에 이를 수 있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아니면 그 숙명을 깨닫지 못해 바둥거리는 어리석은 몸짓일까? 김훈은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그에게 대답을 바라는 건 똑같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기자와 소설


김훈은 기자였다. 김훈은 소설가다. 그러나 김훈의 소설은 기자가 쓰는 소설이다. 아니 소설가가 쓰는 기사일지도 모르겠다. 김훈은 곤장에 맞는 백성과 그 백성의 피와 똥으로 범벅된 형틀과 그 형틀이 놓은 끔찍한 형장을 무심할 정도로 담담한 문체로 훓는다. 그러나 담담함은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 문체는 김훈의 태생적 한계이거나(뼛 속까지 기자) 사실을 온전히 사실로만 전달하고픈 강박의 산물인 것이다. 김훈은 여지껏 한 번도 소설을 쓴 적이 없거나 아니면 한 번도 소설가였던 적이 없다. "김훈은 언제나 '기사'만 쓴다'는 박경철(시골의사)의 평가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역사적 사실에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은 공평한 것인가 비겁한 것인가? 공평과 비겁과 이쪽과 저쪽, 온갖 말이 말을 물고 말을 쫓는 허황된 말의 세계에선 오로지 지금, 여기에, 산다는 것만이 중요한 일일까? 나는 그가 견뎌온 역사의 무참함을 모르기에 그 침묵의 이유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나는, 너무나 외람된 말을 지껄인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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