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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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5일에 1쇄를 찍은 피로사회는 1년 6개월 동안 27쇄를 거듭했다. 자기계발서, 문제집, 참고서만이 팔려나가는 시대에 철학책이, 그것도 '승진에 도움이 되는' 혹은 '논술을 위한' 인문학이라는 문구를 달지 않은 책이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일 것이다.


<피로사회>의 이례적 성공은 그 내용의 이례적 대담함으로부터 출발한다. <피로사회>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과 의료, 상대적으로 민주화된 정치에 힘입어 삶의 질이 전반적으로 높아졌음에도 오늘날 우리의 모습에서 좀처럼 '행복'을 발견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런데 그 설명은 지난 수 십년간 해답이라 불렸던 위대한 철학자들의 답안을 계승하지 않는다. <피로사회>는 현대의 지평을 열었다는 푸코와 프로이트와 아감벤 등을 더 이상 현대를 설명하지 못하는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어버린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겪는 무력감과 우울의 원인을 그야말로 현대의 최첨단으로 해부해낸다.



성과사회


저자 한병철은 현대의 심리적 질병들의 원인으로 성과사회를 지목한다. 과거 푸코, 프로이트 등의 철학자들이 세상을 정의하는 단어는 규율사회였다. 규율사회는 '~해서는 안된다'는 금지의 부정성과 '~해야 한다'는 강제적 부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개인은 이 안에서 사회의 억압을 받고 그에 복종하는 주체로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생산의 문제가 도래한다. 


자본주의는 항상 더 많은 생산을 꿈꾸지만 규율사회의 '금지'는 곧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9시 출근에 6시 퇴근'이라거나 '모든 학생이 12시까지 야자를 해야 한다'는 규칙은 고루하고 비효율적인 악습이다. 강제적인 명령은 더이상 획기적 생산의 증가를 보장해주지 않기에 '자기 주도', '자기 계발', '자율'등의 긍정성이 이 악습을 대체한다. 사람들은 자기 발전을 위해 새벽반 영어 학원을 등록하고 인문학 고전을 읽으며 자기계발서를 탐독한다. 이 모든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다. 모두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명령에 복종하던 과거의 인간은 이제 스스로 행동하는 성과주체가 된다. 


얼핏보면 성과사회의 개인은 규율사회의 억압과 금지를 벗어던진 진정한 자유의 주체로 여겨진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현대 사회의 비극이 있다. 규율사회에서 채찍을 내리는 건 타자였다. 그러나 성과사회에서 채찍을 내리는 건 누구인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성과사회에서 '나'는 나 자신의 경영자이자 피고용인이며 주인이자 노예이고 착취자이자 피착취자다. 나 자신을 착취하는 게 바로 자율적인 나이기 때문에 나 자신은 그것이 착취임을 깨닫지 못한다.


이때 자본주의는 성과주체에게 진실을 보여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자기 착취'를 '자기 계발', '의식 있는 사람' 등으로 포장하며 대량으로 유포한다.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p.103).


한편 '자기계발'의 조류에 뛰어들지 못하거나 그 조류 속에서 조난당한 개인은 낙오자가 된다. 예전에는 실패의 이유를 사회의 탓으로 돌릴 수 있었으나 성과사회에는 더이상 핑계가 될만한 금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성과사회에는 당신이 실패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당신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이 무능한 탓이다. 이같은 성과사회의 오만은 개인을 심각한 자괴감 속으로 빠뜨린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p.28). 


성과사회는 그저 사회에 순응하며 적당히 살아갈 마음을 가졌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더 큰 비극으로 다가온다. 규율사회에서 포기는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했다. 데모하지 않고 불만 품지 않고 회사나 열심히 다니며 복종하는 삶을 사는한 자기 자리는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과사회는 금지와 함께 최소한의 생존권마저 없애버린다. 성과사회에서 개인은 호빗의 삶을 살고 싶지만 산더미처럼 몰려오는 경쟁자들은 기어이, 당신을 샤이어 마을에서 몰아내고 만다.



성과사회와 정치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지적했듯 사람들은 과도하게 부여된 자유를 기꺼이 반납하고 스스로를 노예로 전락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현실 정치에서 이는 독재자에게 투표하는 성향으로 나타난다. 


나는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가 보수적 가치를 더 중시했다고 생각치 않는다. 한국 사람들은 지난 10년간 명백히 독재에 표를 던졌다. 성과사회의 무한 경쟁에 지친 개인이 드디어 탈진한 것이다. 탈진한 개인은 더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들은 그저 시키는대로 하고자 한다. 이 악물고 열심히 살아볼테니 '잘살아 보세'를 만들어 달라는 얘기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결탁한 독재자들은 규율사회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독재자들은 오히려 규제를 풀고 경쟁을 장려한다. 자수성가 스토리는 성공 신화가 되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사람들은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채찍질한다. 독재자의 유일한 미션은 성과사회를 강화하는 것이다. 경쟁이 풍작일수록 자유가 풍년일수록 독재자의 위치가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독재자가 과거의 독재자보다 무서운 점은 그것이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의 독재는 1인 독재로서, 명백하게 가시적이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독재는 시스템으로서 존재하기에 더이상 독재처럼 보이지 않는다. 독재처럼 보이지 않기에 비난과 전복의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은 몇 년을 주기로 얼굴만 바꿔가며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번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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