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의 역사 - 역사 속 억압된 책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
베르너 풀트 지음, 송소민 옮김 / 시공사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이해해요 당신들 마음


문명의 진보는 문자에서 나왔다. 사상이, 지식이 한 개인의 생리적 한계를 넘어 영원불멸의 책으로 태어났을 때 문명은 비로소 그 위대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은 세계를 파괴하기도 한다. 성경은 로마를 무너뜨렸고 프랑스 인권선언문은 계급 사회를 끝장내 버렸다. 그 위험을 알았기 때문에 권력자들은 기를 쓰고 책을 뺏으려 했다. 권력이 집중화 될 수록, 잃을 게 많을 수록 그들은 금지를 강화했다. 심지어 교회는 수 천년간 일반인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막았다. 그들이 성경으로 로마를 무너뜨린 것처럼 역시 성경으로 교회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은 옳았다. 1517년 루터는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그 뚱뚱한 목사가 처음으로 한 일은 독일어판 성경을 인쇄해 서민들에게 나눠주는 일이었다. 뿡야!



진지한 얼굴로 당연한 얘기하기


이 책은 요한 아담 베르크의 의미심장한 말로 시작한다. 


책을 금지하는 일은 금지다. 그 일도 정당하다면 세상에 결실을 거둘 만한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요한 아담 베르크, <책 읽기의 기술>, 1799)


여기까지만 했다면, 대범하다, 훌륭해, 뭔가를 선언하려면 이정도 확신은 있어야지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뒷 얘기를 붙여버리는 바람에 하나마나한 말이 돼버렸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 중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전달하고 그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발언권에 대한 침해는 그것이 무엇이든 금지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모든 분쟁은 그 표현이 상대방의 권리를 침해했는지 아닌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식으로 얼버무릴 수 있을만큼 간단하지 않다. 그러니 입장을 확실히 하라고. 모든 걸 금지하자는 건지 아니면 모든 걸 허용하자는 건지.


물론 나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다. 심정적으로야 모든 억압은 악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지만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에 일관된 입장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자유는 정말 절대적인가?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 진보적인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 상식적인 사람들의 대다수는 어떠한 경우라도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장하준 교수의 '착한 사마리아인'을 금지한 국방부를 무식한 머저리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아마 말씀으로 꾀어 여신도를 성추행한 정명석 교주의 책을 금지하는 데는 찬성할 것이다. 장하준 교수의 자유가 권리로 인정되는 데 반해 왜 정명석 교주의 자유는 그렇지 않을까? 


자유라는 면제부를 얻기 위해선 최소한의 '질'이 뒷받침되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좋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검열 기관을 둬 수준에 미달하는 책과 언론, 잡지를 금지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 되야한다.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만 유효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종교적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신도의 자유를 침해했다면 금지되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독교 자체를 금지하지 않는 것일까? 기독교적 믿음이란 자유를 권리로 가진 사람들이 그 자유를 신께 반납해 오직 신의 말씀대로만 살겠다는 다짐 아니던가? 자유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경우를 인정한다면 우리에겐 정명석 교주의 합의된 강간(?)을 비난할 근거가 없다.


절대적인 것 같지만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적용되기 십상인 자유는, 어쩌면 지나친 대접을 받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근대 사회의 근본 가치라는 믿음하에 맹목적으로 추구되어온 신성불가침의 영역. 자유를 최고의 덕목으로 꼽는 사상이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건드릴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자유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던 중세로 날아가 사람들에게 자유를 원하냐고 물어보자. 그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자유가 뭔지 모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그저 배불리 먹고 따뜻히 자는 것 뿐입니다. 자유가 그것을 보장한다면 우리는 자유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자유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30년째 '잘살아 보자'는 '독재자'의 망령에 홀려있는 한국인처럼 말이다.



베르너 풀트의 금서의 역사


는 '책을 금지하는 것은 금지다'라는 요한 아담 베르크의 한 문장만을 가슴에 안고 우직하게 달리는 책이다. 그의 조소 속에서, 또 비아냥 속에서 우리는 금서에 목숨을 거는 무지한 권력의 코미디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 뒷문장에 대해서 심도있게 다뤘다면,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해치는 자유는 무엇이고 해치지 않는 자유는 무엇인지 얘기해줬다라면, 좀 더 괜찮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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