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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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외딴방'은 신경숙의 자전소설이다. 17세의 소녀로 1979년을 살아야 했던 여공의 이야기. 박정희라는 호환마마가 죽자마자 전두환이라는 악귀가 나타나 무고한 시민들을 아무 이유없이 찢어 죽였던,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 그 시절 불의에 침묵하며 호위호식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격동의 세월이라고 얼버무리며 과거의 헤프닝 쯤으로 붙들어두고자 하는 시간을, 신경숙은 '외딴방'이라는 소설로 써냈다. 


그러나 외딴방은 흔한 노동소설이나 민중문학은 아니다. 신경숙은 그것만이 세상을 구할 유일한 길이라는 듯 모든 걸 내팽개치고 불길 속에 뛰어드는 남자와는 달리, 파괴된 잿더미에서 살아남은 세계를 찾아 가슴에 품는, 그런 모성의 눈으로 그 시절을 훑어본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갖는 힘


작가 자신이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라고 했듯이 외딴방은 보통의 소설같지 않다. 그 시절 신경숙의 일상을 따라 천천히 흐를 뿐 '기'가 '승'을 만나 '전'하다 마침내 '결'해지는 사건의 전개가 없다. 


외딴방을 읽고 있으면 작은 배 한대가 바다에 떠 있는 풍경이 그려진다. 그렇다면 수평선 위를 새카맣게 물들이는 태풍을 바라보며 손을 꽉 쥐게 되거나 산더미 같은 파도를 눈 앞에 두고 마음을 졸이는 상황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데, 이 작은 배는 그저 하늘하늘 물결을 따라 천천히 흔들릴 뿐이다. 그러나 그 미동에 방심하여 넋을 놓다 보면 어느새 외로운 배 하나 어두운 바다 가운데 망망히 떠 있다. 너무 크거나 화려해서가 아니라 오직 홀로 대양을 지탱하기에 그 배는 눈에 새겨진다. 표류하는 듯 보였던 배는 이윽고 뱃머리를 고정시켜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방향을 정한 배가 천천히 노를 저어 가야할 뱃길을 더듬을 때 이 소설같지 않은 소설은 손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소설이 되고만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옛날 옛적 이발사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고 완전히 탈진,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았을 때 그는 웃는 얼굴이었다고 한다. 일생동안 필사의 힘으로 틀어막은 마음의 문을 열어 모든 걸 와르르 쏟아 냈으니, 그 순간 비로소 삶이 해소된 거겠지. 


신경숙이 유명한 소설가가 된 후에도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쓰지 않은 이유는 친구들이 다그치며 묻듯 '그 시간이 창피했기' 때문은 아니다. 작가에게 외딴방은 봉인된 기억이었다. 신경숙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뚝 떼어 상자에 담아 마음 속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 놓는다. 그러나 기억은 생각처럼 깨끗하게 잘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저기 떨어진 부스러기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다시금 살려낸다. 작가에게 그 부스러기는 가난했던 과거에 대한 수치도 아니고 산업체 특별한 야간 학교를 다녀야 했던 창피도 아니다. 그것은 희재 언니, 어둡고 좁은 방에 웅크리고 살면서도 소박한 꿈을 잃지 않았던, 그러나 사랑했던 사람들의 외면 속에서 그 모든 꿈을 잃고 사라져야 했던 가련한 영혼에 대한 기억이다. 


199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때의 이야기를 하리라 마음 먹은 이유는 그녀의 문학이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삶에 부딪혀 자꾸만 자꾸만 그 시절로 되돌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문학은 삶을 앞지르기는 커녕 나란히 서서 걸을 수 조차 없다'. 희재 언니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혀 작가의 삶을 붙잡고 있다. 삶이 나아갈 수 없기에 그 족적을 따라야 하는 문학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쓰기다. 써야한다.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 쓰기는 이발사의 고백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봉인된 기억을 다시 내 삶에 끼워 넣는 일이며 잘려진 길을 메워 다시 삶을 나아가게 하기 위한 일이다. 오래만에 제자리를 찾은 기억은 삐걱대며 아픔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 고통은 그녀를 죽이지 못한다. 이발사가 탈진해 죽었다면 신경숙은 오히려 힘을 얻는다. 고백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비로소 온전한 나를 회복한다.



2013년의 구로공단


신경숙 작가의 아픈 기억이 웅크리던 구로공단은 더 이상 예전의 그 공단이 아니다. 공단은 디지털단지로 바뀌고 가리봉은 가산으로 환골탈태했다. 여공이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생산 계장으로부터 강간을 당하는 일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는다.


70, 80년대에 새카맣게 몰려가던 공원들의 물결은 2000년대에 이르러 IT기업에 다니는 사람들로 대체됐다. 나는 그 사람들 중 하나로 3년간 구로디지털단지로 출퇴근을 한 적이 있다. 지하철 2호선의 높다란 창을 통해 바라보면 신경숙 작가가 겪었던 일들이 정말로 헤프닝이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그곳은 너무나 많이 변했다. 외관만이 아닐 것이다. 이제 그곳의 회사원들 중 시골에 있는 동생을 서울로 데리고 올라와 고등학교에 보내는 게 꿈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70, 80년대의 공원들에게 그것은 꿈이고 희망이었다. 그들은 2만원이 채 안되는 월급으로 방세를 내고 찬거리를 사고 고향집에 돈을 부쳤다. 대한민국은 그런 사람들의 희생으로 여기까지 왔다.


한가지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그곳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산업 역군'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70, 80년대의 주력 산업을 지탱했듯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주력 산업을 지탱한다. 어쩌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닐까? 


그 시절 외딴방에 모여 살았던 산업 역군들은 같은 건물에 살고 있음에도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는 구로디지털단지도 마찬가지였다. 겨울이 오면 그들은 시커먼 잠바를 뒤집어 쓰고 입을 꾹 다문채 제 갈길만을 갔다.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 않기에 그 시커먼 잠바 속에 어떤 고민이 있는지, 나는 결코 알지 못했다. 소설을 읽고 나니 그 무리 속에 모습만 조금 달리한 희재 언니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내가, 아니 어쩌면 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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