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소장판 1~6 세트 (묶음)
아다치 미츠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아다치 미츠루의 대표작이라 하면 '터치(1981)'나 'H2(1992)'를 말해야 옳을 것이다. 다양한 스포츠를 그리긴 했으나 그의 전성기는 역시 야구 만화를 그릴 때였다. 대중이 흥분하기 쉬운 환경에서는 영웅을 그리기도 쉬운 법 아닌가. 아다치 미츠루의 야구 만화들은 일본의 야구 붐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하는 대표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최고의 작품을 묻는다면 역시 '러프(1987)'다. 수영과 다이빙이라는 비인기 종목을 다뤘으며 아다치 미학이 완성되기 이전의 작품이라는 점, 게다가 소장판본으로 여섯 권에 지나지 않는 짧은 분량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점들이 그 제목과(Rough) 닮은 구석이 있고 또 그것과 공명을 이뤄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분출하는 것 같아, 나에겐 'H2'나 '터치' 보다도 더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작품을 몇일 전 마지막권의 주문을 통해 완전히 소장하게 됐다. 오랫동안 5권까지만 보유해 왔으나 문득 생각이 나 마지막 6권을 채워 넣은 것이다. 책장에 꽂기 전 간만에 만화를 펼쳐보니 그 깔끔하고 담백한 선이 눈에 가득했다. 흩으러졌던 마음까지 저절로 추스려지는 기분이었다.






주인공 니노미야 아미와 야마토 케이스케는 할아버지 대에 철천지 원수가 된 두 집안의 손녀 손자다. 원수가 된 사연은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어릴 때부터 줄곧 원수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자란 탓에 아미는 야마토 케이스케를 '살인자'로 여기며 성장한다. 그 분노는 상당히 커 매년 설날 야마토 케이스케에게 '살인자'라고 쓴 연하장을 보낼 정도. 그런 두 사람이 우연찮게 한 고등학교에서 만난다. 그것도 다이빙부와 수영부. 모른척 하고 살래야 도무지 그럴 수 없는 지척의 관계로서 말이다.


원수를 가까이서 보는 게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없지. 야마토 케이스케와 니노미야 아미는 둘 다 잘 생기고 예쁜, 착하고 뛰어난 학생들이었으니까. 얽히고 설킨 학창 생활 속에서 야마토 케이스케를 덮고 있던 분노의 껍질이 하나씩 하나씩 깨져나간다. 그 속에서 멋쟁이 남자의 진면목이 드러난 것은 당연한 말씀. 상황은 케이스케 쪽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를 살인자로 부르며 미운 짓만 골라하는 여자애지만 그 아름다움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굴복하는 건 남자의 특권이자 의무 아니던가?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엔 독특한 집안 사정 보다도 더 큰 장애물이 있었다. 바로 나카니시 히로키라는 남자의 존재.


나카니시 히로키는 일본 최고의 수영 선수이자 어릴 때 부터 아미의 결혼 상대로 지목되어온 남자다. 케이스케의 할아버지 때문에 니노미야 집안이 힘들었을 때 도움을 줬던 게 나카니시 집안이었고 그런 인연으로 두 집안 사이에는 자연스런 혼담이 오갔다.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아미는 나카니시 히로키라는 물결을 타고 주어진 대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겐 이제 야마토 케이스케라는 특별한 일이 생겼다.


나카니시 히로키는 소년이 남자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파도였다. 그 파도는 한 쪽 발로는 꿈을 다른 쪽 발로는 사랑을 밟고 서 있다. 나에게 보이는 것은 너무나 거대해 감히 쳐다볼 수 조차 없는 존재를 라이벌로 맞아야 하는 소년의 무참함 뿐이다. 그러나 소년은 꾸역꾸역 전진해 나간다. 히로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파도에 불과하지만, 소년의 파도는 기어이 대양을 흘러가 철썩 대지를 때리고 마는 묵직한 힘이 있다.


마침내 두 남자는 마지막 경주를 위해 나란히 선다. 가슴을 울리는 출발 소리와 함께 오래된 워크맨에서 니노미야 아미의 고백이 흘러 나온다. 그 음성이 푸른 하늘에 사위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쯤 두 남자는 결승선에 다다랐을 테지만, 만화는 그 뒷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아다치 미츠루는 과감한 침묵과 함축적 암시로 이야기를 그려낸다. 침묵 속에서 말을 찾고 암시 속에서 의미를 밝혀야 하기에 그의 작품은 천천히 음미해야하며 서서히 스며들지만 그로써 자기도 모르는 새에 흠뻑 젖어 들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침묵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곰곰히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지 알 것이다. 함축적 암시를 풀어본 사람이라면 그 암시가 얼마나 적합한 표현이었는지 깨달은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때때로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이 그림으로 그려진 하이쿠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고작 17자에 불과한 한 줄의 시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걸어 오던가. 대사가 생략된 컷들엔 사실 대사보다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고 관련 없이 툭 던진 것 같은 말엔 수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 말해지지 않은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다치 미츠루의 재미라면 느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다치 미츠루 미학의 백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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