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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미래 - 2013년 제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3년 1월
평점 :
원래 단편은 돈이 안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팔리는 작가들은 소설가 지망생들에게 이렇게 충고하기도 하죠. 장편을 쓰세요. 단편은 팔리지 않아요.
단편은 후킹이 있어야 합니다. 독자의 시선을 확 끌어 당기는 어떤 것. 그러다보니 소설가가 좀 장사꾼처럼 보이기도 하고, 마케터처럼 보이기도 하고. 뭐 이런 생각때문에 순수 문학을 추구하는 사람일 수록 단편을 평가절하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 예전부터 단편이 좋았어요. 러시아 문학하면 대개 도스토옙스키를 꼽지만 전 체홉이 더 좋더라고요. 모파상도 장편 '여자의 일생'보단 단편 '비계덩어리'가 진짜 죽였어요. 보르헤스는 거론할 필요도 없죠!
단편집을 손에 들고 있으면 두근두근 기대와 설렘이 부풀어 오릅니다. 짧은 호흡, 기막힌 아이디어, 알싸한 여운. 과연 다음 장에선 어떤 작가가 또 어떤 문장으로 나를 미치게 해줄까. 뷔페는 막상 먹을게 없고 잡탕은 그냥 잡탕으로 그치고 말지만, 문학은 예외입니다. 섞어놓을수록, 더 찐해져요.
왜 이상 문학상을 집어 들었나? 그건 현재 소설가라고 불리는, 그러니까 나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글쟁이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어떤 글을 쓰나 궁금했기 때문이에요. 황석영이나 김훈 같은 선생님들은, 깊고 깊은 심해에 살거나 저 높은 산꼭대기에 머무는 분들 아니겠습니까.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그런 분들이시죠.
손을 쭉 뻗으면 닿을 수도 있는 거리. 바로 그 앞에 이 이상 문학상 작품집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건방이라는걸 곧 깨달았지만, 어쨌든 이 책을 선택할 당시에는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구매에 일초의 망설임도 없었답니다.
37회 이상 문학상 작품집에는 대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와 자선 대표작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를 포함해 총 10편의 소설이 담겨 있어요. 여기서 이 모든 소설을 일일이 거론할수는 없으니 대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와 전반적인 감상을 말하려 합니다.
'침묵의 미래'는 '언어'의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언어'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후두암에 걸린 어느 노인의 언어입니다. 이 노인은 소수민족 출신이에요. 중앙 정부는 사라져가는 '말'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소수언어박물관'을 짓고 그 안에 소수민족들을 잡아다 전시물로 박제해 버립니다. 그들은 뜨문뜨문 찾는 방문객들에게 어색한 미소를 팔며 평생 외롭게 살다 죽습니다. 사멸 직전의 언어를 가진 민족이기에 자기 말을 하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던 거에요.
어느날 주인공은 박물관을 탈출해 고향을 찾습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당도한 곳에 고향은 없었어요. 황폐화된 땅덩어리만 덩그러니 남아있었죠. 주인공은 도망칠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박물관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거기서 산더미처럼 쌓인 외로움을 헤아리다 죽음을 맞습니다.
주최측은 '침묵의 미래'를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생성과 그 사멸의 과정을 인간 자신의 운명처럼 그려내고 있는 <침묵의 미래>는 서사를 극단적으로 절제하면서 내면적인 사유의 공간을 이야기의 무대 위로 끌어올려놓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작가는 언어 자체가 스스로 그 존재와 가치를 되묻고 그 운명에 대해 질문하게 함으로써 언어의 사멸이라는 현상이 현대 문명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본질적인 문제가 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p.337)
전 이 소설을 보면서, 이것이 현대 문명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본질적 문제를 드러내는 우화라기 보다는, 이 시대에 죽어가는 '문학'의 운명을 쓸쓸히 그려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문학상은 '침묵의 미래'에 나오는 소수언어박물관과 다름아닙니다. 문학상이라도 없다면 과연 '문학'이 우리 사회의 관심을 받는 날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문학상은 팔리지 않는 단편을 싣고 고독한 소설가들을 응원하면서, 그렇게 사멸해가는 문학의 끝을 간신히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밖에 재미있게 본 소설은 '그리네스'라는 자살 유발 바이러스를 소재로 한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별볼일 없는 남자와 그 별볼일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할 수 밖에 없는 더 별볼일 없는 여자의 삶을 포르보 배우가 된 노인의 삶과 뒤섞어 놓은 '배우가 된 노인'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네스의 경우 사회의 부도덕을 드러내는 방식이 지나치게 뻔한 면도 있지만, 그 적나라한 표현이 오히려 보는 이의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배우가 된 노인'은 자극적인 소재와 다르게 굉장히 아름다운 문체가 돋보였던 소설입니다. 게다가 끊임없이 궁금증을 자아내는 독특한 이야기 전개 탓에 보는 내내 즐거움이 가득했던 작품입니다.
이 밖에 등에서 소나무가 자라는 염승숙의 '습', 돈에 울고 돈에 웃는 우리의 처참한 자화상을 그려낸 김이설의 '흉몽', 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독자를 몽롱한 안개 속으로 끌어들이는 편혜영의 '밤의 마침'도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처음 책을 사들었을 땐, '아 나도 이 정도는 쓸 수 있겠다'하는 패기로 가득했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모두 읽고, 키보드 앞에 앉아, 아무것도 씌여 있지 않은 망망한 컴퓨터 화면을 봤을 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고 말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