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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을 베다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평점 :
모옌은 1955년 생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 문화 대혁명을 경험했어요. 중국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끔찍했던 십년. 고귀한 공산 중국에 스믈스믈 파고드는 더러운 부르주아 정신을 깨끗히 정화해버리겠다는 의도. 지주 출신의 자손들은 학교를 떠나야 했고 막무가내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했어요. 심지어 자식이 부모를 동생이 형제를. 1966년에서 1976년까지 중국에서 사람을 죽이는 법은 매우 쉬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골라 온갖 말도 안되는 이유를 붙여 부르주아로 둔갑시킵니다. 부르주아로 낙인 찍힌 사람들은 전부 죽거나 더 이상 회생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파괴됐죠.
사실 문화 대혁명은 국가 경제 부흥에 실패한 마오쩌둥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벌인 친위 쿠데타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고귀한 의도라도 오로지 그것만이 정의라고 선언할 때 의도는 비참한 폭력으로 변하고 맙니다. 하물며 불순한 의도야 오죽하겠습니까.
아이러니한건 이 비참한 10년이 그 어느때보다 훌륭한 소설가와 화가, 철학자와 정치인을 낳았다는 거에요. 지금 중국을 이끄는건 이 10년을 말로, 그림으로, 정치로 비판하며 반성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그 주인공중 하나, 모옌의 '달빛을 베다'입니다.
달빛을 베다에 수록된 12편의 단편에는 가슴 저미는 애통과 목구멍 가득 차오르는 억울함, 체제를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매가 짙게 베어 나옵니다. 문화 대혁명을 경험한 작가라면 애통과 억울함, 비판 의식이 없을 수 없겠죠. 동시대의 작가로는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를 읽어 본게 전부지만 그 시대의 작가들이 모두 이런점을 갖고 있을거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중국의 소설가들은 모두 똑같은 목소리와 주제로 문화 대혁명이라는 역사의 찌꺼기를 뜯어 먹고 살아가는가? 그렇진 않을 겁니다. 당대에 우뚝선 소설가라면 누구나 쉽게 모방할 수 없는 목소리를 갖기 마련이죠. 제가 모옌에게 발견한 건 두 가지입니다. 바로 향토적 색채와 세상에 대한 깊은 공포에요.
모옌의 소설에선 한 쪽 한 쪽 짙은 흙냄새가 풍겨옵니다. 때로 그 흙냄새는 누렇게 물든 밀밭을 사르르 흔들고 지나는 바람 냄새로, 끈적 끈적 노송을 타고 내리는 송진 냄새로, 코 끝을 훅 스치고 지나가는 비릿한 강물의 냄새로 바뀌곤 합니다. 사방 가득한 자연의 냄새. 아마도 현대의 중국인들은 모옌의 소설을 읽으며 잊혀진 대지의 숨결을 추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물과 밀밭, 소나무 숲을 대신하는 건 삐뚤빼뚤 요란하게 늘어선 빌딩과 검은 연기를 토해내는 공장들일테니까요.
그런데 이 향수는 곧 추억하고 싶은 않은 시간과 연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연은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여 놓여 있는데, 사람들은 왜 변해 서로를 찌르고 공격 할까요? 아름다운 대지 위에서 날뛰는 살쾡이 같은 인간들. 이 부조화는 모옌의 소설을 더 강한 슬픔으로 옭아맵니다. 가슴이 시릴 정도로 아픈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짙은 흙냄새가 소설의 겉 모습을 구축한다면 그 내면을 휘감고 있는 것은 등골이 쭈삣한 공포입니다. 모옌은 실제로 공포 소설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단편 두 작품을 이 책에 싣고 있습니다. 하나는 악마같이 검은 개가 주인을 물어 죽이려하는 '목수와 개', 또 하나는 이유없이 소나무에 묶여 죽음을 맞는 소년의 이야기 '엄지 수갑'입니다.
모옌의 공포는 단어와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을 때에야 드러나는 은유적인 것이 아닙니다. 새파란 새벽녘에 뜩하고 나타나 온 정신을 마비시키는, 귀신같은 섬뜩함이 번뜩번뜩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편의 공포를 읽으면서 절절히 깨닫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귀신보다 무서운게 사람이다'는 말입니다. 모옌은 나이가 들어서까지 귀신의 존재를 두려워할만큼 겁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화 대혁명은 이 순진한 소년에게 진정 무서운게 무엇인지를 가르쳐줬습니다. '엄지 수갑'의 소년이 느끼는 공포는 그 거대한 검은개가 뿜어대는 불길함을 압도하고도 남습니다.
천하가 태평했다면 모옌은 드라마나 영화의 각본을 쓰며 편안한 이야기꾼으로 살았을 것 같습니다. 모옌의 소설에는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를 그리워하는, 말하고 싶어 안달하는 소년의 모습이 오롯이 베어있거든요. 그런데 이 소년이 문화 대혁명을 맞아 또렷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고, 어른이 되고, 노벨상을 받는 소설가가 됩니다. 개인에겐 참 잔인한 일이지만,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은 역시 사실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