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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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를 읽고 창피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키보드 위에 올려진 열개의 손가락을 바위처럼 단단하고 칼날 보다 예리한 하루키의 시선이 무겁게 누르고 있다. 그의 글 안에서 내 손가락은 자유롭지 못하다. 1Q84, 뒤틀린 시간과 공간의 통로를 통해 하루키는 내 글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글에 대한 글은 어쩌면 그 글의 '공기번데기'일지도 모르겠다. 마더는 도터의 탄생을 알고 있어. 1Q84에서 도터는 마더와 동일한 위상을 유지하지만 이 현실에선 아무리 야심차게 준비한 도터라도 결국엔 마더의 찌꺼기에 불과해. 1Q84를 읽고 창피한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아. 




1Q84를 사야 되나 말아야 하나, 그 맥없는 고민에 답을 얻기 위해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다. 읽을 사람은 읽는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위하여 이 글을 써야 하는가. 나 자신이다. 나는 창문을 열고 컴퓨터를 킨다. 기분 좋은 가을 바람의 냉기가 창문을 통과해 살갗에 와 닿는다. 적당한 온도다. 나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자리를 잡고 눈을 감는다. 지금부터 나는 1Q84의 공기번데기를 만들 것이다. 의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엄숙한 분위기다. 아직 달이 뜰 시간은 아니다.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떠 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번째 의문, 아오마메의 이야기는 덴고의 소설인가?


아오마메의 세계에 두 개의 달이 뜨기 시작했을 때 부터, 나는 그것이 덴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덴고는 '공기번데기'의 리라이팅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다. 그리고 두 개의 달이 뜨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거기에 아오마메가 등장한다고 볼만한 여지는 전혀 없지만, 어느 순간 아오마메의 이야기에 일그러진 녹색 달이 등장하고 평행선을 달리던 두 레일이 덜컹하는 전환기의 당겨짐과 함께 서서히 한점으로 모여든다. 소설가가 하나의 세계를 써내려 가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스스로 써내려 간다. '책을 쓰는 것'은 '인생을 산다'의 은유로써 손색이 없다. 덴고는 장편 소설을 쓰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기 삶을 축조해 나가는 것과 같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 만나고 싶은 아오마메를 자신의 소설에 등장시킨다. 거듭 강조하지만 여기서 '쓴다'는 '산다'와 같다. 덴고는 소설을 쓰면서 그 소설을 산다. 덴고의 소설은 덴고의 바람이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현실'은 강렬한 바람에서 탄생한다. 


(스포일러 있음)


소설과 현실이 지나치게 가까워지자 덴고는 자기 이야기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덴고는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다. 현실은 소설과 지나치게 뒤엉켜 버리고 덴고 자신 조차 이것이 소설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진다. 여기서 분명한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계속되야 한다는 것이다. 급박한 상황에서 하루키는 자신이 직접 화자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하루키는 3권에서 딱 한번 해설을 한 뒤 바람같이 사라진다). 하지만 좀 더 안정적이고 필연적인 화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시카와가 등장한다. 그 우시카와는 덴고와 아오마메의 삶에 끼어든 '이물'이지만(생김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교롭게도 그 끼어듦이 세계에 균열을 만들고 이것을 통로로 두 사람은 재회한다. 여기서부터 다시 하루키의 소설이 시작된다.


1Q84는 책의 저자와 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써내려가는 소설(삶)이 복잡하게 얽혀들면서 다층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그 애매모호함과 뭔가 있을 듯한 기대감이 시종일관 강력한 몰입도를 만들어 낸다. 하루키 소설의 강점은 뭐니뭐니해도 이 몰입도다.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개의 이야기가 번쩍하고 스쳐 지나가며 섬광을 내뿜을 때, '헉'하는 신음 소리만이 독자의 텅 빈 머리를 울린다.



리틀 피플은 무엇인가?


나도 모른다. 알 수 없다. 리틀 피플을 하나의 의미로 결정짓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힌트는 너무나 적다.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는 세상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강력한 힘이었다. 오늘날 빅 브라더는 예전만큼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우리 속에 끼어들어 있지만 우리는 결코 그들을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대로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지만, 오늘날 권력이 인간을 지배하는 양상은 훨씬 교묘하고 은밀해졌다. 하루키는 빅 브라더에게 현대적 의미의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리틀 피플?



공기번데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도 모른다. 알 수 없다. 공기번데기를 하나의 의미로 결정짓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힌트는 너무나 적고 또한 일관적이지 못하다. 


나는 도터와 마더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안다. 덴고가 아오마메의 공기번데기를 보고 그의 손을 잡았을 때, 헤클러&코흐 사의 권총을 목구멍에 쑤셔 넣고 방아쇠를 당기고 있던 아오마메의 손가락이 멈춘다. 


나는 도터와 마더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덴고가 목격한 아오마메의 도터는 10살의 아오마메였다. 


나는 도터가 매개자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 후카에리의 도터는 리틀 피플과 이 세상을 연결한다. 아오마메의 도터는 덴고와 아오마메를 연결한다. 아오마메의 도터가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던 이유는, 덴고의 기억이 20년 전에 멈춰 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도터는 마더의 간절한 '바람'이 현실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따지면 덴고가 아버지의 병실에서 봤던 공기번데기는 아오마메의 도터가 아니라, 바로 덴고의 도터일지도 모르겠다. 



하루키는 자신의 문학 세계를 어떻게 평하고 있을까?


스토리는 대단히 재미있게 짜였고 마지막까지 독자를 견인하는 힘이 있지만, 공기 번데기란 무엇인가, 리틀 피플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는 우리는 마지막까지 미슨터리어스한 물음표의 풀 속에 내던져지고 만다. 어쩌면 그것이 작가가 의도한 점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러한 자세를 '작가의 태만'이라고 받아들이는 독자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중략)


이런 식으로 의미심장한 듯한 뉘앙스만 풍기는 자세에 관해 머지않아 진지한 고민을 요구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Book2, p.145~146. '공기번데기'에 대한 비평 중)


"스토리는 대단히 재미있게 짜였고 마지막까지 독자를 견인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그 작가를 태만하다고 나무랄 수는 없지 않은가. (Book2, p.146. 덴고의 대사)



에필로그


설명을 듣지 않으면 모른다는 건 설명을 들어도 모른다는 것이다(책 본문 중). 그리하여 이 소설엔 해설이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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