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덕 교육 강좌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부도덕 교육 강좌'는 '주간 명성'이라는 여성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단행본으로 펴년 에세이 집이다. 67편의 부도덕 교육에 해설, 옮긴이의 말까지 포함해 총 422페이지로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무게는 무겁지 않아. 내용 또한 마찬가지. 출근길 전철에 서서 부담없이 읽기에 아주 좋은 책이라고 볼 수 있지. 문제는 내가 이 책을 소설로 알고 샀다는 거야.


미시마 유키오는 데뷔와 동시에 성공을 거둔 남자다. 거칠게 없었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문단에 입문했고 31살 때 이미 '금각사'를 써 버렸으니까. 어릴 땐 몸이 약해 수줍음 많고 허약한 소년, 근육질의 동성 친구에게 미묘한 감정을 품을 정도로 괴상한 아이였지만, 성공을 거두고 보디 빌딩을 시작하더니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고 패기 충만한 이상한 아저씨가 되버렸지. 그러니까 감히 '부도덕'을 교육하시려는 것 아니겠어?



소설가들은 원래 그래야만 하는건지, 원래 그랬기 때문에 소설가가 되는건지 알수는 없지만, 대개 개성있고 자기 주장이 확실한 사람일 수록 이 세상을 삐뚜루 보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 사람들은 대개 도덕적으로 민감하고 시비에 철저하며 본질 추구에 집요한 면을 보인다. 뭐하나 허투루 넘어가는게 없어. 이 삐딱이들이 '엄밀하게 따지면'이라고 말을 시작할 땐, 어지간히 골치아플 준비를 해야 한다. 

부도덕 교육 강좌가 말 그대로 부도덕을 교육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도덕이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억제하기 위한 사회적 규범이다. 


그런데 문제는 도덕을 잘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철저히 실천하는 것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다는 거다. 예컨대 우리는 모두 남의 불행에 기뻐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은연중에 그 불행이 고소하게 느껴지면서 묘한 자신감에 벅차오르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니가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잘난척 하더니 내가 알아 봤다'. 본성이 펄떡펄떡 살아 날뛸땐 도덕은 속수 무책인 법이지. 하지만 이 더러운 본성을 자기 눈으로 목격할 수 있다면? 문득 거울을 봤더니 그 속엔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짐승의 모습이 있다. 이게 나의 모습이란 말인가? 나는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히고 본래의 도덕적인 나로 돌아온다. 


미시마 유키오는 '남의 불행을 기뻐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독자가 보는 것은 치졸하고 잔인한 나의 '본모습'이다. 인간은 '내 눈의 들보'를 보기 시작했을 때 도덕적으로 변화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작자가 보여주는 건 진실한 너의 모습. 네 눈의 들보. 부도덕 교육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론 도덕 교육이라는 여러 독자들의 평은, 그러므로 타당하도다.


하지만 이런 역설, 너무 흔하잖아. 진부해. 질린다고. 도덕 교육같은거, 진지하게 점잖빼고 얘기하면 꼰대처럼 보일까봐 일부러 이런 제스쳐를 취하는거 아니야? 기본적으로 당신의 글에선 남성 우월주의와 힘에의 의지가 느껴져. 남을 깔보는 듯한 시선이 문장 사이사이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내 마음을 질겅질겅 씹어댄다구. 그래서 난 당신이 싫고, 당신의 말투가 싫고, 이 책이 싫어.





하지만 그의 지적엔 절묘한 섬뜩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잔혹함은 소년기의 특징이다. 아무리 감상적으로 보이는 소년에게도 본능적인 잔혹성이 내재되어 있다. 소녀도 마찬가지다. 다정한 심성은 어른의 교활함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p. 19. 선생을 무시하라, 속으로만)


어른이 된다는 것, 건강한 사회의 예의바른 시민으로 성장한다는 것. 그것은 결국 펄떡펄떡 살아 날뛰는 본성을 감옥에 가둬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무의식의 심연으로 유배보내는 것 아니겠는가. 대가의 시선에는 당해낼 수 없는 점이 있는 법이지. 내가 만약 일찍 성공을 거뒀다면, 아마도 미시마 유키오 같은 사람이 됐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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