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궁녀에 관한 책이다. 물론 영화 '후궁'의 섹슈얼리티를 끼얹고 서가에 다리를 꼬고 앉아 은밀한 속살을 드러내며 독자를 유혹하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시기가 공교롭다. 진실은 본디 사실에 기반한 것이라기 보담 믿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잡풀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 책에 바로 그러한 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것은 그다지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들어보라, 이 책은 역사서다. 부제는 '궁궐에 핀 비밀의 꽃'. 이런! 이 비밀이라는 단어에서 나약한 우리는 또 다시 은밀한 상상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지만, 믿어보라 이 책은 역사서다.




우리가 아는 궁녀의 모습은 두가지다왕을 둘러싼 병풍, 음모를 꾸미는 악녀. 게다가 그들의 유일한 짝궁은 내시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중성인. 피다만 꽃. 결코 하늘을 날 수 없는 새. 순종하고 순종하고 또 순종해 족쇄가 풀려있는줄도 모르고 영원히 감옥에 갇혀 있는 불쌍한 운명들. 이 모든 이미지는 어디서 부터 나왔는가. 드라마다. 이런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어낸 드라마를 탓하고 싶지만 그나마 이것조차 없으면 우리 사회에  궁녀가 등장할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만다. 

나는 웬지 다른 사람의 억울한 심정을 내 일처럼 분노하는 괴벽이 있다. 세상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오해에 휩싸여 평생 고독하게 살다 외롭게 죽어간 사람들. 내가 영혼의 친구라고 부르는 자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 책의 지은이도 나처럼 이해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가슴 짠한 애잔함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우리는 흔히 궁녀가 왕궁의 잡일을 도맡아 하는 하녀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본질적으로 궁녀의 역할은 왕궁의 가사 노동을 전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궁의 가사 노동이란 왕이 입는 옷을 짓고 왕궁 자수를 놓는 일이었으며 왕이 먹는 음식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는 다르게 말해 궁녀가 왕궁을, 아니 조선 시대를, 아니 한 역사를 대표하는 의복과 음식과 공예 문화를 만들어내는 전문 기능인이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바로 궁녀에 대한 재인식이요 이 책의 핵심이다. 


그들이 기능인이었다면 자신의 직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남겼을 법하고 또 그들의 소속이 엄연히 왕궁인지라 실록에도 자주 등장할 법 한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의자왕과 삼천궁녀를 봤을 때 궁녀는 적어도 삼국시대 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삼국시대는 커녕 왕조 실록이라는 위대한 기록을 남긴 조선 왕조에서 조차 그들의 모습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그것은 궁녀가 국가 최고 권력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파악하고 있던 정보원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궁녀의 조직도를 살펴보자. 조선시대에 궁녀는 그 업무에 따라 몇 개의 처소로 분류되었던 모양인데 그 명칭과 업무는 대충 다음과 같다.



각 방 명칭

 이름

 지밀

각종 궁중 의례에서 왕이나 왕비 등 인도, 시위

궁녀 조직의 헤드 쿼터 개념으로 총무, 회계 업무를 담당

서적 관장, 글 낭독, 글 필사!, 의례에서 왕을 수행하는 등의 업무 담당

 침방

책에는 제반 의대 거행에 종사, 라고 나와는 있으나 도무지 말의 의미를 알 길이 없고 추측컨대 침실 또는 건강을 관리하지 않았나 싶다

 수방

각종 자수에 종사(왕이 입는 곤룡포, 그 가운데 화려하게 놓인 용 모양이 바로 이 궁녀들에 의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내소주방수라상! 및 음식물 거행에 종사 
 외소주방각종 궁중 잔치에서의 잔치상 담당 
 생것방수라에 올리는 각종 과일, 간식을 담당 
 세수간

세숫물을 대령하고 욕실 물품을 세탁 

 세답방

각종 세탁, 불 때기 및 등촉(어두워지면 궁궐 곳곳에 있는 등잔에 불을 붙이러 다니는 일), 침실 청소를 담당 

 퇴선간수라상을 물리고 처리하는 곳 



이렇게 보면 왕 없이 궁녀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궁녀가 없으면 왕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궁녀가 왕의 생활에 밀착해 있는 것 아닌가. 내가 만약 왕을 살해할 목적을 갖고 있다면 나는 우선 궁녀의 조직도와 각 처소에 소속된 인물의 명단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그런 다음 퇴선간 궁녀를 포섭해 왕이 평소에 무엇을 즐겨 먹고 무엇을 남기는지, 그 습관을 물어볼 것이다. 그 다음 내소주방의 궁녀를 포섭해 왕이 좋아하는 음식이 나갈 때면 그 안에 아주 조금씩 독약을 탈 것을 명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나에게 포섭되지 않는다면? 난 그들의 신상명세를 털 것이다. 병들어 있는 노부모, 범죄를 저질러 잡혀간 오래비 등등, 내가 수집한 정보는 곧 그들의 약점이 되고 그만큼 그들은 나에게 포섭되기 쉬워진다. 


독살이 불가능할 땐 자객을 보내는 것도 유효하다. 이번에 나는 우선 지밀에 소속된 궁녀 중 야간 경계를 총괄하는 사람을 포섭할 것이다. 그 다음 거사일에 맞춰 궁녀의 경계 인원을 반으로 줄일 것을 요청한다. 세답방의 궁녀를 포섭하는 이유는 자객의 침투 경로에 일부러 등촉을 하지 않을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다음 차례는 침방의 궁녀다. 자객은 기별을 주고 받은 침방의 궁녀를 따라 왕의 침소까지 이동한다. 그 다음에...


역모에 궁녀가 빠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궁녀를 알지 못하면 거사는 불가능하다. 궁녀는 왕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으며 그의 사적인 습관과 건강 상태와 잠드는 장소까지! 그러니 이들에 대한 정보를 드러내놓고 공개한다면 그것은 왕의 처소를 저자 거리에 내놓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궁녀의 정보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유래한 것이란 말인가? 그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추안급국안'이라는 범죄 심문 기록에서다. 조선 시대에 중죄인의 심문 내용을 기록했던 이 책에는 역시 심문 답게 죄인의 출신과 이력을 상세하게 기록해 두고 있으며 이는 왕조 실록에도, 궁중 의례에서도, 국가의 행정 문서에서도 드러나지 않는 궁녀의 정체를 밝혀주고 있다. 어린 나이에 입궁해 평생을 수절하며 살다 모시던 상전이 죽고 나면 출가해 비구니로 생명을 마감해야 했던 그들은, 자신의 근본을 범죄 심문 기록에서나 고백할 수 있는 불행한 여인들이었던 것이다. 


책은 이 밖에도 궁녀의 성과 사랑, 월급, 재산, 출신, 자격, 특기할 만한 궁녀 이야기 등을 파편적으로 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궁녀에 대한 기록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반증이리라.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닥치는 대로 궁녀에 대한 기록을 모아 희미해져가는 존재를 부여잡는 일일 뿐이다. 이건 이거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누군가 초석을 다지지 않으면 기둥도 마루도 지붕도 집도 없을 테니까. 


역사를 이야기하지만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 하나하나가 생소한 것이었기에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제조 상궁'이란 말을 회식 자리에서 폭탄주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던 사람들에겐 신선한 지적 오딧세이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는 일이다.


p.s. - 이 책은 2004년에 초판이 나왔다가 8년 만인 2012년 5월 재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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