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의 섬 - 19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아나톨 프랑스 지음, 김우영 옮김 / 다른우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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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 때 프랑스어권 소설가 중에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역시 아멜리 노통이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시라. 이 여자는 벨기에 사람이다. 그녀는 프랑스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를 프랑스어라고 부르는 걸 싫어한다. 아멜리 노통은 확실히 자극과 개성을 추구하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푹 빠져들만한 매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갈증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멜리 노통 하나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보바리 부인'(플로베르 작)을 만나고 '비계 덩어리'(모파상 작, '여자의 일생'이라는 소설이 더 유명하다. 하지만 이 남자의 최고작은 뭐니뭐니해도 '비계 덩어리')와 조우한다.


하지만 당신이 아직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당신은 프랑스 문학사의 거대한 기둥 하나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름에서 부터 확연한 아이덴티티가 느껴지는 이 남자, '아나톨 프랑스'다.





1844년, 아나톨 프랑스는 태어났다. 본명은 '자크 아나톨 프랑수와 티보'(Jacques Anatole François Thibault). 센 강 기슭에서 조그만 서점을 운영했던 아버지 탓에 어릴 적 부터 책과 친했다. 아나톨 프랑스는 '황금 시집'으로 데뷔한 이래 꾸준히 평론과 소설을 썼고 그 당시 사람치고는 드물게 오래 살며 1896년는 아카데미 회원으로, 1921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수상작은 바로 이 소설 '펭귄의 섬'이다.





노벨상 수상자, 아카데미 회원같은 권위적 색채와는 어울리지 않게 '펭귄의 섬'은 아주 유머러스하다. 마치 개그맨의 만담을 보는 것 같은 친근함이 있지만 사회와 역사를 향한 풍자의 칼날은 섬뜩하리만치 날카롭고 정확하다. 


간단한 줄거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평생을 수도원에서 보낸 '성 마엘'은 어느날 자기 앞에 나타난 돌구유를 보고 그것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평생동안 수도원을 나가 본 적이 없는 성자가 여행을 떠난다. 성 마엘은 이후 37년동안 세계를 돌며 218개의 교회와 74개의 수도원을 세운다. 여전히 성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던 어느날 성 마엘은 자신이 처음으로 세례를 내린 외디크 섬의 주민들이 또 다시 우상을 숭배하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첫 복음 전파에 대한 강한 애착을 느낀 마엘은 또 다시 돌 구유를 타고 여행을 떠나지만, 늘 그렇듯 영웅의 여행에는 시련이 따르기 마련. 악마의 유혹에 빠진 마엘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순수한 돌구유에 돛과 키를 달게 된다. 노인은 남쪽으로 키를 잡고 항해를 시작했지만 이윽고 강한 물살에 의해 남서쪽으로 떠밀려 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강한 바람이 불자 돌구유는 통제 불능, 성스런 여행은 타락한 의지와 함께 속절없이 얼음의 땅을 향하게 되었다.


갖은 고초 끝에 거대한 섬에 도착한 마엘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한다. 그 땅에는 대학살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민들은 우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처음 본 이방인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 들일만큼 온순하고 선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감동한 마엘은 그곳의 주민들에게 세례를 내려 하나님의 축복을 내려주었다. 그러자 천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성 마엘이 사람으로 착각한 이들이 봄철을 맞아 짝짓기를 하러 몰려든 펭귄이었던 것이다. 지독한 근시와 여행의 고초는 이 노인으로 하여금 펭귄을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례를 인정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성인들을 모아 회의를 개최한다. 성인들은 세례의 효험이 형식에서 나오느냐 아니면 내용에서 나오느냐를 두고 두패로 갈려 싸웠다. 한 때 질투와 시기의 대명사로 유대인에게 저주와 멸망을 안겨줬던 신이었지만, 다가오는 세대에 '선한 의지'로 부각되길 원했던 신은 그 자애로운 마음을 발동하여 펭귄을 사람으로 변신 시킬 것을 명한다. 그리하여 펭귄은 사람이 되었고 사람은 역사를 만들었다. 





줄거리만 봐도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명으로 사람이 된 펭귄은 이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간의 역사를 되풀이 하며 사유 재산과 토지의 경계를 만들고 전쟁과 살육을 발명한다. 아나톨 프랑스는 이 펭귄의 역사를 프랑스의 역사에(신화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1:1로 대입하며 날카로운 풍자를 전개하는데, 겉으로는 프랑스의 역사에 국한된 것으로 보이는 이 스케일은 사실상 인류의 역사로 확대한다 하더라도 모자랄 것이 없을 만큼 깊은 사유로 독자를 압도한다. 


보통 노벨상 수상 작가의 책들은 뭔가 멜랑콜리하고 어려운 맛이 있는데, '펭귄의 섬'은 정말 정말 재밌다. 하나도 어렵지 않다. 현대의 작가 중 이와 유사한 소설가를 찾자면 '커트 보네거트'가 있을 것이다. 둘은 모두 휴머니스트로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권위와 폭력에 거부한 성인들이었다.


종교? 그거 그냥 사람이 만든거 아니야? 나의 신을 믿어라 믿지 않겠다로 처참한 살육의 파티가 벌어진다면, 그따위 것 그냥 사라져 버리는게 우리를 위해 더 나은게 아닐까? 그렇다면 예술은? 미에 명확한 기준이 존재한다면 시대마다 천차만별로 변화하는 예술의 역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세대의 생각은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이 진실의 권위는 독특한 실험과 창의를 발현하는 예술가들을 질식시키지. 진실, 정의? 그런건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게 나을지도 몰라. 아무리 선한 의지도 진실이 되는 순간, 정의가 되는 순간 폭력을 잉태하니까.


나는 아나톨 프랑스가 남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지적 회의주의와 신랄한 비꼬기로 가득찬 그의 소설은 태어날 때 부터 반항심으로 가득차 있던 내 영혼과 깊은 교감을 나누며 마음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선사한다. 산 사람하고만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은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아나톨 프랑스는, 매일 매일 역겨운 권위에 피투성이가 되는 내 마음에 편안한 안식처가 된다. 그를 만난건 정말 행운이다.


p.s -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은 번역본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군사 독재와 그 정신을 이어 받은 정치 세력이 이 땅에 단단한 보수적 권위의 성벽을 세운 탓이리라. 이처럼 비상식적인 사회를 이토록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뭘까? 나는 '펭귄의 섬'의 문구를 인용해 이를 설명하려 한다. 


'정부의 한결같은 조처도 축복받은 한국 사회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본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정부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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