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 시절 - Art 020
마쓰오 바쇼 외 지음, 가츠시카 호쿠사이 외 그림, 김향 옮기고 엮음 / 다빈치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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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는 5, 7, 5 총 17자로 이루어진 일본의 정형시다. 그 유래는 렌카와(連歌) 하이카이에서 찾을 수 있는데, 렌카란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어지는 노래를 뜻하고 하이카이는 렌카의 형식을 그대로 지키되 내용면에서 해학을 담아 서민적으로 발전시킨 대중시를 말한다. 렌카와 하이카이는 모두 5, 7, 5로 이뤄진 앞구와 7, 7로 이뤄진 뒷구를 갖추고 있어 보통 두 세명에서 여섯 명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번갈아 가며 시를 읊는 형태였다. 오늘날 가요의 역할을 당시엔 렌카와 하이카이가 맡았던 셈이다.  

카와 하이카이의 첫 구는 홋쿠(發句)라 불리는데, 여기엔 반드시 계절을 상징하는 계어(季語)를 넣어야 했고 노래가 지어진 배경을 읊어야 했으며 그 구 자체만으로 완결성을 갖추고 있어야만 했다. 이것이 나중에 여러 사람이 모여 시를 읊어야 한다는 번거로움을 없이 혼자서 즐길 수 있는 하이쿠로 발전된 것이다. 

하이쿠의 형식엔 계어, 5, 7, 5의 엄격한 자수 제한과 더불어 '기레지'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하이쿠 자체가 짧은 시인만큼 한 번에 읽어 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쉼표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읽는 이들은 이 쉼표에 잠시 머무르며 시의 여운과 경탄을 충분히 감상하게 된다(기레지의 예로 '~이여', '~로다', '~구나' 같은 것들이 있다).   

 

시란 다양한 심상과 주제를 압축된 언어에 담아 냄으로써 짧지만 긴, 적지만 많은 것을 표현하는 문학 장르다. 하이쿠는 이것을 더욱 고도로 압축해 체계화한다. 흔히 압축과 요약을 오해하기 쉬운데 이 둘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행위다. 요약이 생략과 삭제를 통한 가지치기라면 압축은 이 세상 모든 것을 품에 안은 태초의 우주다. 크기는 작지만 매우 밀도 높은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 이게 바로 압축의 정수다.  

따라서 압축된 세계의 겉모습은 일견 고요해 보이나 그 안에선 강렬한 에너지가 끊임없이 도약하고 있다. 하이쿠를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그 짧은 마디마디에서 무한한 감성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하이쿠 한 편을 감상해 보자. 

두 사람의 생애, 그 가운데 피어난 벚꽃이런가 - 바쇼  

 

두 사람이 서 있고 그 사이에 벚꽃이 피었다. 서로 아무련 관련없이 살아온 두 사람의 인연이 활짝 핀 벚꽃에 의해 연결된다. 이 시를 보고 있으면 따뜻한 봄 빛이 온 몸에 스며드는 것 같다. 벚꽃이(계어) 주는 구체적인 심상 때문에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의심할 여지 없이 구체적인 심상이 우리가 생각하는만큼 단단한 토대 위에 서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좀 더 얘기해보자. 

불을 지른 듯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마는게 벚꽃의 속성이다. 이런 벚꽃이 두 사람의 생애를 가로 질러 피어났다. 불현듯 뜨겁게 타올랐다 어느새 차갑게 식어 버리는 젊은 사랑의 한계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렇게 볼 때 벚꽃은 두 사람의 앞날을 희망으로 비춰주는 등대가 아니라 파멸을 예고하는 흉흉한 들불이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건 두 사람의 '표정'이다. 만일 두 남녀가 서로를 쳐다보고 활짝 웃고 있다면, 연인은 반드시 오고야말 이별을 눈치채지 못하는 철부지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순간의 행복만을 바라보겠다는 쾌락주의자이거나.  

나는 담담하지만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두 남녀가 떠오른다. 앞으로 우리 앞에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일이 어떻게 되든 중요한건 지금 이 순간이다. 나는 두 사람의 미소에서 헤어짐이라는 숙명을 받아들이는 담담함을 느낀다. 그래서 두 남녀는 헤프게 웃지 않는다. 지금은 벚꽃이 피었고, 연인은 아직 봄날 한 가운데 서 있다.   

 

마지막으로 '생애'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그 안에 담긴 너무나 많은 일들이 떠올라 쓰기가 벅찰 정도다. 이 세상엔 각기 다른 수십 억의 인생이 존재한다. 그 인생들이 각자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활짝 핀 벚꽃 사이로 두 사람이 걸어간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이 길은 단지 생업으로 향하는 도로일지도 모른다. 잠시 멈춰 벚꽃을 바라볼 만한 여유는 없다. 두 남녀는 수 없이 스쳐 지나 가지만 결코 서로를 알아 보지는 못한다. 숨막힐 듯이 흐드러진 아름다움도 삶의 고단 앞에서는 무기력할 뿐이다. 

봄날 한철 피고 지는 벚꽃의 생명은 무한한 시간, 그 막막한 무게 앞에 놓인 우리의 생애를 닮아 있다. 이 찰나의 순간을 잡아채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두 사람의 생애, 그 사이에 무심히 피어난 벚꽃 눈송이. 나는 어서 빨리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 봤으면 한다. 벚꽃 사이로 지나가는 저 여자가, 그리고 그 옆을 스쳐가는 저 남자가, 서로의 짧디 짧은 생애 그 한 가운데 피어난 봄날의 꽃이라는 사실을, 어서 빨리 깨달았으면 한다.  

 

더 많은 하이쿠를 소개하고 싶지만 도무지 글이 끝날 것 같지 않아 여기서 멈춘다. 그래도 책을 구매하려는 사람을 돕는다는 기본의 취지로 돌아가 한 마디 덧 붙이면, 번역의 한계상 모든 시가 17자로 번역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상에 무리가 따르진 않는다. 이 후에도 많은 하이쿠 선집을 찾아 보겠지만, 이 하이쿠들에서 받은 감동은 오랫동안 잊혀질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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