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황해는, 이를 본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영화가 아니다. 나홍진 감독의 전작 추격자를 본 500만의 관객들이 무슨 기대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의 미학적 기술적 측면에선 황해가 추격자보다 훨씬 낫다. 물론 기술적 진보는 이 영화의 제작비가 100억이 넘었다는 점에서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폭발적으로 데뷔했던 많은 신인감독들이 뒤이어 맡은 대작 영화에서 거의 예외없이 비틀거렸다는 점을 감안할 때, 나홍진 감독의 연출력은 충분히 박수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연기

하정우와 김윤석의 연기는 최고였다. 하정우는 영화 초반 구남의 감정을 다소 산만하게 표현하는 면이 있었으나 차츰 안정되가더니 후반부에 이르러선 구남과 완전히 일체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구남이 복수에 눈을 떴을때, 그 절제된 감정에서 뿜어나오는 차가운 복수에 난 온 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의 섬뜩함을 느꼈다. - 한국 영화에는 차가운 복수가 딱 두 번 있었는데, 첫째가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고 둘째가 바로 '황해'의 구남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수현이(이병헌 분) 동일한 슬로건을 내걸고 질주했지만 이 둘에 비하면 명함도 내밀기 힘들다. 

김윤석의 경우 지금까지의 평가가 다소 과장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나는 황해의 면정학을 보면서 완전히 생각을 고쳐먹었다. 무심한 표정에서 터져나오는 광기어린 폭력과 뻔뻔함의 표현은 면정학을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그로테스크한 악당으로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연기가 배우만의 몫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좋은 연기는 감독과 배우의 시너지에서 나온다. 비유하자면, 감독이 깔아 놓은 레일 위로 배우가 맹렬히 달려나가는 것이랄까? 영화에 따라 레일 위를 달리는 건 호화로운 여객차가 될 수도 있고 냄새나는 화차가 될 수도 있다.

영화 황해를 달리는 건 두 대의 폭주 기관차다. 서로 비껴 지나간듯 보이는 두 대의 기관차가 사실은 서로를 향해 달려오고 있음을 알아챌 때, 우리는 긴장감에 흠뻑 젖어 두 주먹을 꾹 쥐게 된다.   




연출


황해에서 가장 잘된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면정학의 무리가 한국의 아지트에서 내복만 입은채로 고기를 뜯는 장면이다. 어떤 사람은 이 고기가 사람 고기라고 하는데, 설정 상 개고기가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개고기는 연변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일 뿐만 아니라 상처 회복에 탁월하기 때문에 이전 상황과 아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하지만 생김새는 족발을 더 닮았다). 물론 중요한건 고기의 종류가 아니라 장면이 만들어 내는 탁월한 분위기와 효과다.

순서 상 이 장면은 구남과 면정학의 추격신 직후에 등장하는데, 기본적으로 앞 시퀀스에서 완전히 연소해버린 긴장의 잔해를 추스려 남은 이야기를 대비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래서 장면의 첫 샷은 풀샷이다. 추격씬이 빽빽한 클로즈업 위주의 편집이었기 때문에 이어지는 풀샷은 시각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한편 영화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면정학의 아지트를 객관적으로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풀샷을 가득채운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후줄근한 내복 차림이다. 피가 배어나온 하얀 붕대를 여기저기 감은채로 열심히 고기를 먹는다. '맞고 들어왔으니까, 오늘 하루 수고했으니까 고기나 먹고 힘내보자'는
단순무식한 생각이 잔뜩 쫄아있던 관객들의 옆구리를 간지럽힌다. 웃음이 나올듯 말듯 미묘한 긴장이 유지되는 이유는 낡은 목조 건물이 뿜어내는 공포와 '뜯어 먹는다'는 행위의 폭력성 때문일 것이다.

분위기가 점차 이완의 국면으로 접어 들때 쯤
김태원의 부하들이 아지트를 습격한다. 또다시 분출하는 핏빛 아드레날린. 면정학이 먹다 남은 뼈다귀를 휘둘러 적들의 두개골을 깨는 순간, 장면은 터져나온 핏줄기로 그로테스크의 낙인을 찍고 폭력 미학의 정점에 올라선다.


얼핏 싱겁게만 보이는 이 장면은 사실 복잡한 계산이 들어 있는 고난도 씬이다. 만일 나홍진이 이 장면을 구남의 살해 시뮬레이션으로만 채웠다면 어떻게 됐을까? 서스펜스는 잔잔한 물결만을 일으킬 뿐, 해일이 되어 덮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홍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시뮬레이션 중간에 갑작기 김승현을 끼워 넣는다. 예기치 못한 만남. 틀어지는 계획. 지금까지 잔잔하게 꿈틀대던 장면속의 공기가 갑자기 팽팽하게 당겨진다. 우리는 구남이 무엇을 위해 여기 있는지 너무나 잘 안다. 우리는 구남과 함께 이 상황을 모면할 완벽한 변명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쭈뼛쭈뼛대며 어쩔줄 모르는 구남의 모습은 보는 사람을 더더욱 미심쩍게 만든다. 그런데 이 불쌍한 살인자를 구원해주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 김승현이다. 

'연변 사람이야?'

살았다. 그래 구남은 연변사람이다. 이제부터는 거짓말할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하면 된다. 구남의 공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떨림도 멈춘다. 뒤이어 김승현은,

'춥다고 이런데 들어와 있지마'

라고 말한다. 그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 구남과 우리의 계획은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 거
기다가 김승현은 떠나가는 구남을 불러 지갑에서 이 만원을 꺼내 주기까지한다. 돈 앞에서 머뭇거리는 구남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받어'라고 반말을 한다. 이 남자, 정말로 대범하다.




우리가 김승현에 대해 알게 되는 건 살인 사건 후 보도되는 뉴스를 통해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왜 그렇게 대범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자기를 죽이러 온 두 명의 킬러를 맨 손으로 제압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바로 여기서 해소 된다. 물론 왜 김승현을 죽여야만 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미궁 속에 남아 있다.

이 장면은 좋은 시나리오라는 빵 위에 탄탄한 연출력이라는 패티를 얹은 최고급 수제 햄버거다. 시나리오는 불필요한 정보를 늘어 놓아 이야기의 발목을 잡지 않는다. 정보는 자신을 감춰야 할 곳에선 숨죽여 기다리다 때가 왔을 때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드러낸다. 연출은 서스펜스와 미스테리의 블록을 두 손에 움켜 쥐고 이야기를 교묘하게 조립해 나간다. 이 완벽한 미로 속에서 관객은 길을 잃은 방랑자가 된다.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나아갈 길을 찾다 보면 어느덧 뒷목까지 다가온 반전의 칼날이 단칼에 머리를 베어 버린다.







'면정학 아지트 습격 시퀀스'가 미장센, 연출, 조명 등 객관적인 측면에서 가장 훌륭한 장면인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김승현 교수와 구남이 처음으로 만나는 '논현동 빌딩 씬'이다.  









갑작스런 김승현의 등장은 관객에게 강렬한 첫인상과 함께 여러 의문을 남긴다. 김승현의 정체는 뭘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죽여야 하는 걸까? 아니 딱 봐도 만만치않을 이 사람을 내가 과연 죽일 수나 있을까?

김승현이 구남을 구원하는 순간 팽팽했던 긴장감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관객이 여전히 자리를 붙이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뒤이어 쏟아져 나오는 의문들이 서스펜스의 빈자리를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나홍진이 추격자로 500만 관객을 찍었을 때, 나는 한국 영화계에 또 하나의 뽀록이 터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가 논현동 빌딩으로 들어서는 순간 생각을 고쳐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될성 부른 나무를 떡잎 부터 알아보는 거라면 명감독의 자질은 한 컷만 봐도 알 수 있다. 황해의 떡잎은 논현동 빌딩이다. 그러니까 김승현의 한 마디가, 나홍진의 미래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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