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은 언제나 관객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사람이다. 그가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한 이래 이 설레임은 숙명처럼 김지운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김지운은 30세가 넘기까지 백수로 지냈다고 한다. 그냥 백수는 아니었는데, 하루 종일 무위도식하는 친구들과 함께 문화와 예술을 논했다. 그러다가 본인이 심각한 낭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용한 가족'을 집필했고 덜컥 영화 감독이 되버렸다. 이름난 영화 감독이 된 뒤 김지운은 그때 그 시절을 일컬어 에너지를 축적했던 시기라고, 뭐 이렇게 과학적인 표현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대충 비슷한 뉘앙스로 그때를 형용했던 것 같다.

뭐 표현이야 어쨌든 김지운은, 오랫동안 참아 왔던 감성을 폭발시키면서 항문에 임박한 응가를 변기 속에 한 가득 쏟아낼 때의 카타르시스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지운이 왜 악마를 보게 됐을까? 그의 필모그래피는 언제나 전작과 다름을 추구했으므로 그의 과거를 쫓아 현재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모든 장르를 스타일리쉬하게 풀어낸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그건 모든 예술가들이 갖춘 공통점이기 때문에 그걸로 김지운을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럼 도대체 왜 김지운은 악마를 보게 된걸까? 심심한 대답이겠지만, 주연 배우 최민식이 김지운을 추천했기 때문이다. 영화계에서 오랫 동안 잊혀져 있던 오대수는 혜성을 타고 지구에 충돌하길 원했을 것이다. 김지운이 여기에 걸렸다.

피와 섹스를 숭배하는 살인마를 잡아 아킬레스 건을 잘라버리는 복수극을 연출할 사람은 우리나라에 박찬욱 밖에 없다. 그러나 박찬욱에겐 '복수는 나의 것'이 있었다. 그럼 이렇게 센 영화를 누가 할 수 있을까?

얼렁 뚱땅 만들었다간 손가락질만 받는 영화다. 그래서 이 영화엔 형식(스타일)이 필요하다. 포르노를 예술로 만드는 건 섹스(내용)가 아니라 스타일(형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통 스타일로는 되지도 않는다. 그럼 당연하지 않나? 김지운 밖에는 없다. 그리고 덤으로 '이병헌'을 얻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직 안 본 사람들을 위해 말해두면 이 영화 엄청 잔인하다. 장경철은 학원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며 홀로 길을 가는 여자를 납치한다. 둔기로 머리를 때려 기절 시키고 나체로 끌고와 살아 있는 몸을 토막낸다. 작업을 끝낸 창고의 하수구는 시뻘건 피를 토해낸다. 이 영화에서 인간은 도살장의 짐승들과 다름 없다. 장경철은 왜 살인을 하는가? 하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살아가는 게 당연한 만큼 살인도 당연하다.  토막 살인이 사회의 끔찍한 기현상이었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끝나지 않았나. 2003년 부터 2004년까지 26명을 살해한 유영철은 강남구 신사동에서 첫 범행을 저질렀다. 토막 살인범은 우리 이웃에 살고 있다.

이렇게 당연한 사건으로는 다큐를 찍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영화의 방점은 장경철이 아니라 이수현(이병헌)에게 찍혀야 한다. 연쇄 살인과 강간은 당연한 일이지만 복수도 마찬가지일까? 내가 당한만큼 돌려 주는게 법과 질서의 왕국에서 과연 가능한 일일까?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 없이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경철이 정상이라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이상 인내하는 자신의 삶은 정상이라는 유리관 안에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다.

그러나 인내는 언제나 마음 속에 꿉꿉한 앙금을 남기지 않나? 개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 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무서워서 피하는게 아닐까? 생각해 보니 쪽팔린다. 나도 개가 되자. 그러면 안되나? 개가되서 물어 죽이는 거다. 더 끔찍한 악마가 되어 다른 악마의 항문에 꼬챙이를 꽂아 버리자! 윤리 따위 지나가는 개나 줘버리라고.

바로 이 카타르시스가 '악마를 보았다'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카타르시스는 길지 않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 '악마를 보았다'의 흥행 실패가 고스란히 증명해 준다. 관객은 영화관을 나오면서 강간과 후두부를 강타하는 파이프와 시뻘건 피와 자기가 싼 똥을 뒤지는 최민식만 기억한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장경철의 머리와 몸이 분리되는 장면에서조차 관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못한다. 

 


  

 

복수를 마음 먹은 이상 이수현은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무언가에 대한 분노가 폭력의 원인이 될 수 있다면, 이수현의 복수가 정당한 거라면, 사회에 대한 분노로 사람을 죽인다는 모든 살인범들도 정당하다. 그렇다고 당신이 이수현이라면 장경철을 가만히 놔둘 수 있나? 토막난 약혼녀의 주검 앞에서 당신은 차가운 이성을 지킬 수 있느냔 말이다.

이게 바로 딜레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올드보이'가 칸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건 바로 이 딜레마 덕이었다. 그러나 '악마를 보았다'는 이수현의 딜레마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복수 할 것인가에 더듬이를 곧추 세운다. 그래서 이수현의 고뇌는 피와 똥과 시체에 묻힌다. 슬픔과 분노를 무표정한 표정 속에 응축해내는 이병헌의 유례없이 좋은 연기도 한 바가지 싸놓은 설사 위에서 조용히 묻혀 버린다.

장경철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수현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니가 진거야'라고. 이 영화가 기분을 더럽게 하는 이유는 장경철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수현이 아무리 자극적으로 장경철의 죽음을 연출해도, 설령 죽음 뒤에 부활 시켜 7번씩 70번을 다시 죽인다 하더라도,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고통은 오직 살아 남은 자의 것이다. 장경철의 머리가 레테의 강을 건너 저 세상으로 가는 순간 이수현은 차가운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눈물을 쏟아 낸다. 그건 결코 카타르시스의 눈물이 아니다.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수현이 졌다. 이병헌이 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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