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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나이트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평점 :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것이야 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의 본질이라고 나는 쓴 바 있다.
2차 세계 대전의 한복판. 동남 아시아의 한 열도에서는 태평양 너머의 백인들을 위해 기발한 쇼를 기획 중이었다.
제군들! 전 아시아의 산업과 전 아시아의 미개한 인종들이 바로 우리의 지배 아래 비로소 개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머나먼 동쪽에서 적국의 함선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함대는 거대하고 무참합니다. 제군들! 신이 바다를 들어 적함을 깨부쉈던 역사를 기억하십니까! 이번엔 여러분들이 제로센 비행기를 타고 혈혈단신, 적군의 항공모함에 온 몸을 부딪힐 예정입니다. 제군들! 신의 바람을 불러 봅시다. 신민들이 대답한다.
*'텐노-헤-카반자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제군들! 전 유럽의 산업과 전 유럽의 우수한 인종을 더러운 유대인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우리 아리아인들은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 아리아인들은 그들을 수용소에 쳐넣고 짓밟고 으깨 부수고 그래도 남아 있는 이들을 컨베이어 벨트 위에 줄지어 세워 놓고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가스실로 보낼 것입니다. 나는 우리 아리아인의 미래가, 아리아인의 운명이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아리아인들이 대답한다.
'하일 히틀러'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일개 군인이었을 뿐이다.'
전범 재판소의 올가미에 목이 꿰인 수 많은 전범들이 약속한 듯이 이 하나의 비명만을 외친채 밧줄에 매달린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모두가 미쳐 있는 세상에선 미쳐있는 것을 변명할 필요가 없다. 광기가 시들고, 승리의 몽상이 패배의 현실에 겁탈 당할 때 쯤에야 사람들은 허겁지겁 변명을 준비한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겨우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어쩔 수 없었다'라는 것이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것을 본질로 갖는 그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그건 변명일 뿐이다.
'마더 나이트'의 주인공 '하워드 W. 캠벨 2세'는 좀 달랐다. 그는 미국인으로 태어나 독일인 아내와 결혼했다. 독일에서 살았고 문학적 재능을 발휘해 나치의 연예 선전부에서 대활약을 했다. 수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고 포로들이 수용소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하워드 W. 캠벨 2세의 방송을 들으며 가스실로 끌려갔다. 그런데 이 남자에겐 비밀이 있었다. 공원에서 만난 프랭크 위르타넨 대령, 즉 미국 정보부 소속의 스파이에게 포섭 됐던 것이다.
하워드 W. 캠벨 2세는 스파이가 됐다. 방송에서 일부러 말실수를 하는 것으로 암호를 보냈다. 극작가이자 아마추어 배우이기도 했던 하워드에게 스파이 역할은 안성맞춤 이었다. 그로인해 전쟁이 끝난 뒤, 전범들이 차례로 죗값을 치르고 있을 때 하워드는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무죄가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미국은 하워드의 무죄를 입증해선 안됐다. 세계의 영웅 미국이 비열한 협잡꾼이 되선 곤란했기 때문에, 하워드는 아주 작은 보상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뉴욕의 허름한 다락방에 보금자리를 얻었다.
<하켄 크로이츠(Hakenkreuz):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당기>
아우슈비츠를 만들었고 유대인 600만명을 가스실로 보낸 홀로코스트 주식회사의 CEO 아이히만을 만났을 때 하워드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유대인 육백만 명을 학살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이히만이 대답했다.
"천만에."
이 말을 듣고 하워드가 내리는 아이히만에 대한 평가, 나는 그 소설의 전문을 옮김으로 커트 보네거트의 진가를 드러내고 싶다. 그러나 내 글을 지루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욕망은 여기에 그 일부만을 적고 있다.
"나는 아이히만과 나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아이히만은 병원으로 가야 할 사람이고 나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만든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략)
아이히만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이히만의 머릿속에서는 진실과 거짓, 희망과 절망, 미와 추, 친절과 잔인, 희극과 비극이 모두 뒤범벅되어 아무 구분 없이 처리된다.
내 경우는 다르다. 나는 거짓말을 할 때면 항상 그것이 거짓말임을 인식하고, 누군가가 내 거짓말을 믿을 때 그로부터 나올 잔인한 결과를 예상할 수 있으며, 잔인함이 나쁘다는 것을 안다. (중략)
만일 내세에 또다른 생이 있다면, 그때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를 용서하라.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 p219
제로센의 퍼스트 클래스에 앉아 텐노-헤-카반자이를 외친 사람들도 아우슈비츠의 시체 제단 위에서 하일 히틀러를 외친 사람들도 진짜 문제는 그들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그들 자신도 몰랐다는 것이다.
구원을 미끼로 회개를 요구하는 신을 엿먹이는 방법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정신병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 고로 교수형은 정신병자를 구원할 수 없다. 죽음은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했던 하워드, 바로 그의 차지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하워드는 뉴욕의 허름한 다락방, 그 아래 살고 있는 유대인 의사를 찾아가 자신이 바로 하워드 W. 캠벨 2세임을, 나치의 연예 선전부에서 대활약했으며 현재 이스라엘 정보부에서 혈안이 되어 수색중인 바로 그 하워드 W. 캠벨 2세임을 자수했던 것이다. 하워드는 자신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쳐 있는 이스라엘에 송환되어 재판을 받기로 했다. 그는 죽음을 향해 제발로 찾아갔다.
그 뒤에 우리의 하워드가 어떻게 됐는지는 묻지 마시라. 나는 인생의 아이러니, 그 무참한 삶의 비애를 기술할 용기가 없기에 차마 뒷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없다. 그러나 운이 좋든 나쁘든 모든 사람은 언젠가 그 허망한 삶의 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산다는 건 마찬가지로 처연한 일이니까.
커트 보네거트는 평생을 전쟁과 싸우다 죽었다. 그는 전쟁을 혐오했고 조지 부시에게 머더 뻐킹을 먹였다. 누가 그랬더라 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은 웃음이라고.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보네거트는 자신의 소설을 풍자와 블랙코미디로 가득채웠던 것이리라.
정신 나간 세상에서 살다 보면 아무리 진실을 얘기해도 도무지 믿어 주지 않는 경험을 종종하게 된다. 가슴을 쥐어짜며 분통을 터뜨려 봐도 나아지는건 없다. 그럴땐 그냥 광대가 되자. 언제나 웃으며 그러나 두 주먹은 꼭 쥔채.
이 무참한 현실 속에선 오직 유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텐노-헤-카반자이: 천황 폐하 만세
*본문에서 Bold 처리한 부분은 전부 원문을 인용한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