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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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같이 찬바람이 부는 계절에는 웬지 모르게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이 읽고 싶어진다.  

 

 

5번의 자살 시도 끝에 결국 40년, 짧은 생을 마감한 고독한 남자. 평생 수 많은 인간과 부대껴 살아갔지만 끝내 인간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는 약한 남자였다. 아주 답답할 정도로 약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사랑조차 편안히 받아 챙길 줄 몰랐다. 상대방의 사랑이 커질수록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심각한 자책에 빠져 결국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파멸로 이끌었다. 그에게 인간은 대단한 공포이자 부담이었다.

다자이는 죽기 몇 개월 전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소설 하나를 완성한다. 바로 '인간 실격'. 이것이 자신을 향한 최후의 비평이었던걸까? 그 후로 한 달, 어깨위로 쏟아지는 인간의 굴레를 가지런히 벗어놓고 다자이는 축복같은 강물 위로 몸을 던졌다. 

 




 인간 실격은 액자 소설이다. 작중 화자인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바의 마담으로부터 '요조'라는 인물의 일기를 받아 들게 되는데 '나'는 이 '요조'의 일기를 출판하기로 마음 먹는다.

요조로 말할 것 같으면 불한당이다. 대단한 폐인이다. 그러나 인간의 위선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예민했다. 보통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거지'하고 넘어갈 문제에도 쉽사리 마음을 놓지 못했다. 요조는 도깨비였다. 도저히 인간 세상에서는 살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익살을 부렸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헤헤, 호호' 인간의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줬다. 속도 없는 사람들은 요조를 '참 재미있고 귀여운 아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또 요조를 괴롭혔다. 자신을 대단한 사기꾼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좌경 사상에 심취했다. 그러나 요조는 대지주의 도련님이었다. 그는 자신을 순백의 천 위에  떨어진 더러운 터럭 이라고 생각했다. 가난의 세계에서 부는 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요조를 끌어들인 친구는 사상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한낱 유행. 멋있어 보이길래 한번 해봤지. 뻔뻔함은 인간의 의무이고 괴로워하는 건 요조의 몫. 좌경이고 진보고 평등이고 부조리고 다 집어 치워. 나는 그저 너희 집에서 보내 주는 돈을 바랄 뿐이야. 그걸로 술이나 한 잔하고 다 잊어 버리자 친구. 요조의 순수했던 꿈은 이렇게 박살나 버린다. 
 


 
더럽혀지고 싶지 않은 열망을 지키면서 인간 세상에 적응하고자 하는 요조의 노력은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힘차게 헤엄을 쳐 보지만 뒤돌아 보면 어김없이 제자리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떠한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심한 무력감. 돌파구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요조는 우연히 만난 술집의 여급과 함께 정사(情死)를 기도한다. 여자는 죽고 남자는 살아 남았다.

자살은 요조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용기였고 유일한 속죄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 더군다나 여자를 죽여버렸다는 죄책감은 요조를 평생 동안 십자가위에 매달았다. 살아남은 삶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가문으로부터는 의절을 당했다. 그 후로는 여기저기 여자들의 정부 노릇을 하며 생활을 이어갔다. 알콜에 중독됐다. 간신히 술을 끊고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 마음을 다 잡고 살아 가는데 이런, 아내 요시키가 더럽혀 지고 만다.

범인은 요조에게 '만화를 그리게 하고는 몇 푼 안되는 돈을 거드름을 피우며 놓고 가는, 삼십 세 전후의 무지하고 몸집이 작은 상인'이었다. 요시키는 신뢰의 화신이었다. 파멸하는 요조마저 믿어 주었다. 그러나 그 신뢰가 오히려 그 자신을 궁지로 몰아 넣고 만 아이러니에 요조의 삶은 알쏭 달쏭 도무지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이제 그 어떤 것도 믿을 수가 없다. 요조는 다시 술을 들었다. 술을 끊기 위해 약물에 손을 댔다.

이 심약한 남자는 그 후로 알콜과 약물에 중독되어 수면제로 자살 기도, 그러나 어김 없이 살아 남아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곤 고향으로 보내진다. 그 곳에서, 하녀인지 부인인지 모르겠는 늙어 빠진 여자에게 강간 아닌 강간을 당하며 여생을 보낸다.

'나'는 이 요조의 일기를 받아들어 아무런 가감도 하지 않고 소설로 펴낸다. 

 



 

다자이의 소설을 흔히 '청춘의 한 시기에 통과 의례처럼 거쳐야 하는 문학'이라고 말한다. 열심히 전진할 수록 거침없이 후퇴하고 마는 인생의 비애는 비단 다자이만이 경험했던 일은 아닐 것이다. 젊은 시절, 마음처럼 되지 않는 세상과 싸우며 느껴야 했던 심각한 좌절감은 우리 모두를 다자이와 같은 파멸로 몰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우리는 운이 좋았기에 혹은 세상과 타협을 했기에 지금 이 곳에 서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별거 아니었다고, 단 한 순간도 고민할 가치가 없었다고, 고급 트렌치 코트의 깃을 세우며 비릿한 웃음을 날릴 수 있다면 당신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때로는 무지가 행복을 보장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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