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보학이란 연구자의 끈질긴 탐구 정신과 방대한 자료 조사를 양분으로 자라나는 괴물이다. 따라서 자료 조사의 방편으로 구글 검색 엔진만 사용하는 내가 계보학이란 이름으로 글을 쓸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니 오늘의 계보학은 전적으로 나의 기억에서 재구성된 것이다. 이는 어떠한 증거도 증명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국 무협 만화라고 하면 일단 두 부류가 떠오른다. 그 중 하나는 하승남(꼴통 시리즈), 황성(작품이 너무 많다), 사마달(이 사람도 많다)로 대변되는 성인 무협 만화가들이다. 요즘에도 만화방이 성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만화방은 시험 후 즐길 수 있는 주요 컨텐츠 중 하나였다. 그 때 만화방에 가면 한 쪽에 이런 성인 무협물이 가득했는데 권수로 보면 그 외 모든 만화들을 합쳐야만 비교가 될 정도였고 경제력을 갖춘 아저씨들이 많이 본 탓에 수익면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젊은 세대라면(나를 포함하여) 이 사람들을 전혀 모를 수도 있으나 이 작가들의 인기는 30-40대 사이에서 압도적이다. 메가패스존 무료 만화방이나 30-40대 커뮤니티를 가보라 이 작가들에 대한 그들의 광신이 어느 정도 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이런 만화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내가 즐겨보고 열광한 만화는 역시 아이큐 점프, 챔프, 영챔프 등으로 대변되는 청소년 만화 잡지의 대표작들이었다.

가깝게는 소주완, 지상월의 '협객 붉은매'가 생각난다. 물론 이 만화의 호불호는 극명하게 갈린다. 불과 몇 초에 불과한 고수들의 동작을 0.1초 혹은 0.01초 단위로 끊어 컷을 구성하는 것이 이 만화의 특징이었는데 쓸데 없이 지면을 낭비한다는 의견과 극적 효과가 두드러진다는 의견이 맹렬히 충돌하곤 했다.  

사실 1부만 따지고 보면 이야기와 작화의 완성도는 당시 어떤 무협 만화도 따를 수 없는 존재감이 있었다. 그러나, 동백꽃단의 간부 12명을 해치워야 형을 구할 수 있는 주인공 정천이 서열 11위에 불과한 대대붕과의 싸움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 부은게 문제였다.  

이 한명의 적을 죽이기 위해 붉은매 1부는 거의 30권 정도를 할애했고 그 후 스토리 진행에 한계를 느낀 작가가 오랜 휴재에 들어감으로써 만화는 일단락 되었다. 몇년 뒤 붉은매 2부로 돌아왔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다음은 비주류로 분류할 수 있는 권가야의 '해와 달'이다. 점프인지 챔프인지 어쨌든 '해와 달'이 처음 등장했을 때 소년인 나는 정말 충격이었다. 이렇게 난해하고 지저분한 만화가 소년 잡지에 나올 수 있는 걸까? 줄거리 또한 범상치 않았다. 최강의 내공을 보유했다는 어머니와 최강의 검술을 창시했다는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정신병자같은 아들이 딱 칼 한 자루를 허리에 차고 거대 문파들에 대항하는 이야기.

주인공 백일홍은 강력한 무공을 지녔으나 마음 속에 혼돈과 불안 그리고 알 수 없는 슬픔을 간직한 채 방황하는 고독한 남자였다. 무협 세계의 인물이란 정파 혹은 사파의 편에 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마련인데 백일홍은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철저히 고립된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일홍의 답은 죽음(부재)이었다. 거대 문파를 향해 겨누고 있던 일홍의 칼 끝은 실상 그 자신을 향해 있었던 셈이다.  

존재와 관계에 대해 이렇듯 모던한 주제의식을 드러낸 만화는 그 후 십 수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해와 달'은 만화가 아니라 철학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권가야는 주인공 백일홍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자 했던게 아닐까? 만화 안의 주인공도 그리고 그 만화를 그리는 작가 자신도 철저히 주류 밖의 세계로 내몰았던 권가야. 어쨌든 당시로선 흔히 볼 수 없는 그림체와 이야기,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과묵한 주인공이 인상적인 이 만화는 고작 5권으로 마무리 되고 만다. 듣자하니 인기가 최하위를 달려 근근이 연재를 했다는 소문. 그래도 차기작 '남자 이야기'로 그럭저럭 이름을 얻게 됐으니 권가야로선 참 다행이었다.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김원규 2011-08-22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국무협만화의 계보란 제목을 붙이려면 해방후 부터 거론해야 마땅한거지..처음을 툭자르고나서 최근 것만 나열한다면
이게 무어란말인가? 차라리 제목을 90~2000년대 만화 계보로 하던지.. 무협만화는 김찬씨를 빼고는 논하지 말라..

한깨짱 2011-08-22 19:43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연륜이 모자라다 보니 최근 것을 위주로 할 수 밖에 없었네요. 한국무협만화의 계보란 제목으로 한 수 가르쳐 주시면 보고 잘 배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