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에게 상실의 시대가 있다면 류에게는 Sixty Nine이 있습니다.

'69'는 문학사적으로 몽테뉴, 볼테르, 아나톨 프랑스의 지적 회의주의를, 철학사적으로 니체의 초인사상과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을 계승하여 사회적 권위와 부조리에 투항하는 카뮈적 고교생의 실존적 성장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건 거짓말이고, 사실은 공부를 싫어하고 이제 갓 성에 눈 뜬 멍청한 고교생의 난동기 입니다.  
 
이런 얘기라면 세상에 차고 넘칩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가네시로 카즈키'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레볼루션 넘버3 라던지 Go같은. 하지만 Sixty Nine은 이런 책들과 비교해 업수이 여길 수 있는 소설이 아닙니다. 이 책에는 확실한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1952년생, 59세의 남자가 평생을 걸고 지켜온 삶에 대한 '단호한 결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확실히 '류'는 단 한번도 사회에 적응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18살 때 심각한 왕따였는데 스스로는 결코 왕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반아이 44명을 전부 따돌리고 있었으니까요. '류'에게서도 이런 것이 느껴 집니다. 전 세계를 따돌리고 유아독존 홀로 우뚝 서 있는 사나이의 모습. 모두가 결승점을 향해 달려갈 때 반대 방향으로 전력질주하는 스프린터.  

사실 사회에 적응한다는 것은 더이상 사회로부터 혼나고 싶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류'처럼 살아가기 위해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적당한 각오로는 되지도 않습니다. 제 주변의 사람들만 둘러봐도 확실합니다.  
 
의지가 매우 강했던 친구들이었지만 글쎄요, Dream Theater를 즐겨 들었으며 학적부 장래 희망칸에 '세계적인 Rock 밴드를 따라다니는 음향 기술자'라고 당당하게 썼던 친구는 현재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의 초일류 사원이 되어있습니다. 또 공군이 되어 비행기를 탈취하고 콩고의 정글로 들어가 'Welcome to the Jungle'을 외치겠다던 친구는 지금 한국 유일의 전력회사에 다니며 가을이 되면 뒷 동산의 밤을 따러 다닌다는군요. 그것도 근무 시간에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확실히 '단호한 결의'가 부족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때 우리가 진정으로 즐거운 일을 하면서 히히덕 거리고 있으면 사회의 숙련된 조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어. 꿈같은 얘기만 쫓다간 어떤 사회 생활도 견뎌낼 수 없을 거야. 너희가 어떻게 살아갈지 참 한심스럽고 걱정돼.'

우리는 확실히 이 말에 쫄았습니다.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할 까봐. 그들 말대로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할까봐. 좋은 차와 좋은 아파트를 얻지 못할까봐.  
 
그래서 우리는 꿈을 버리고 - 그것을 젊을 때의 치기라고 생각하고 평범한 삶을 택했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운명을 배고픔과 무시와 추위로부터 구원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류'는 말했습니다.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그들보다 더 '즐겁게 사는 것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 않고 평생 동안 '하하하' 나의 웃음소리를 그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라고.

저는 이 코믹한 소설을 눈물이 날 정도로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Sixty Nine은 문제아 고교생의 난동 Episode를 다룬 책이 아닙니다. 꿈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법'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멸망하여 단 한 권의 책만을 남겨야 한다면 결단코 Sixty Nine을 가슴에 품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비웃고 경멸하며 나를 묶어 용암 속으로 빠뜨린다 하더라도 끝까지 엄지 손가락을 세우고 있겠습니다. 인류사에 길이길이 남을, 이 미치도록 즐거운 책을 향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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