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인문학이 멸종한 시대.

인문학이란 '어느 철학자가 몇년 부터 몇년까지 살았고 무슨 무슨 주장을 했다'라는 따위의 지식을 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인문학은 사람을 이해하는 힌트를 제시하고 그것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볼 수 있는 힘과 인내를 길러주는 학문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 하다. 인문학은 지루하고 고된 일, 눈길만 스쳐도 피하고 싶은 유리관 속의 먼지 쌓인 박제가 되버렸다.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소설책을 추천하는 CEO를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철학과 사회를 주제로 토론하는 엔지니어를 본 일이 있는가? 시간이 금이 되고 속도가 미덕이 되는 오늘의 야비함은 이 무던히도 깊은 생각의 역사, 그러나 오랜기간 정제가 필요한 사유의 강줄기를 완전히 말려 버렸다. 똑똑하다고 불리는 사람들은 재빠르게 고객의 Needs라는 것을 Catch, 마침내 압축된 지식의 양산에 성공해 바겐세일을 외쳤다. 이로써 단기 속성 학원이 흥행하고 서점가의 베스트셀러는 언제나 자기 계발서의 차지가 되었다.

인문학은 세계를 구현하는 플랫폼이다. 경영학, 마케팅, 컴퓨터공학, 트위터, iTunes, WOW 따위도 인문학이라는 App Store가 진열해 놓은 Application에 지나지 않는다. 좋은 어플리케이션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그것을 연구해 디자인패턴과 API 사용법을 깨우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서비스와 제품을 만들겠다는 사람들이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한국에 애플이 없는 세 번째 이유다.

IT 강국이란 H/W, S/W, 서비스 플랫폼을 정연하게 갖춰놓고 각종 컨텐츠를 활발히 유통시켜 건전하고 참신한 발상이 온전히 뜻을 펼 수 있는 나라를 말한다. 전 국민이 스타와 와우를 즐기고 야동을 다운 받는데 10초가 채 걸리지 않는다며 올레를 외치는 것으로는 결코 IT 강국의 꿈을 이룰 수 없다.

상황이 이러한데 언론은 한국을 IT 강국이라 치켜세웠다가 언제부터 그 IT가 붕괴된다고 야단법석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번도 IT 강국 이었던 적이 없다. 아니,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이상의 글을 쓰면서 분노, 회한, 다짐, 우울, 슬픔, 광기, 연민, 조소, 허탈 기타 등등의 감정에 이리 흔들 저리 흔들. 문득 바다 한 복판에 망망히 표류하고 있는 것을 느낄때쯤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IT 산업 역군으로서 또 다시 소용없는 출근을 서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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