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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다 ㅣ 하다 앤솔러지 4
김엄지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1월
평점 :
김엄지의 <사송>은 미지근해진 연애를 얘기한다. 내게 소설가들은 죄다 INFP에 장기 연애를 할 거 같은 선입견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연인이 비슷한 인상이다. 장기 연애를 해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이미 죽어버리 관계를 한쪽에 치워두고 애써 외면하는 시기가 온다는 걸. 이러니 저러니 핑계를 대 보지만 사실은 끝난 것이다. 이걸 다잡아 결혼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다. <사송>의 남자도 비슷하다. 그는 이야기의 끝에서 알듯 모를듯한 결의를 다지는데 그건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확실한 끝과 관계의 재발견. 할 수만 있다면 소설 속에 들어가 정신이 번쩍 들도록 전자를 소리치고 싶다. 떠나야 해. 새로운 기회를 찾아. 꺼져버린 사랑은 다시 붙일 수 없어.
이 책을 읽게 된 건 사실 백온유의 <나의 살던 고향은> 때문이었다. 덫에 걸려 발가락이 잘린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고향에 내려온 여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놓칠 수 있을까? 예상했던 대로 이 소설은 서늘하고 어느 지점에서는 기괴하기까지 하다. 영지는 똑똑하다고 소문난 여자였지만 고등학생 때 불의의 사고를 저질러 쫓기듯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다. 도망쳐온 서울에서도 당연히 안식을 찾을 수는 없었다. 왜? 회사라는 곳을 다녔기 때문이다. 영지는 자기 어머니를 덫으로 해친 산주와 맞서 싸우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자신이 그 싸움에서 얼마나 싱겁게 패배할지를 바로 알아차린다. 그 순간 영지는 산주의 소름 끼치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마음을 놓을 곳이 없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모든 걸 파괴하는 것. 잿더미 위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자기 자리를 다시 찾아야 하니까.
서이재의 <폭음이 들려오면>은 그나마 가장 희망적인 소설이다. 며칠간 가출한 조카를 돌보며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기 마음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을 그린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요즘에는 이런 고민도 굉장히 드물지 않은가 싶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돈벼락이나 맞을 생각뿐인데, 어디서 내면의 소리가 끼어들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 소설이 가장 희망적인 것이다. 희망은 현실과 가장 먼 것이니까.
김혜진의 <하루치의 말>은 다음의 문장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는 소설이다.
그러면서 다시금 말을 간직하는 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매일 밤, 차갑고 딱딱한 마음을 파서 하루치의 말을 묻는 일. 조금씩 더 깊이 파고, 오래 파는 행위에 단련되는 일. 말들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하게 잠그는 일. 그러니까 안전하고 평화로운 하루를 영위하는 현명한 사람들이 매일 되풀이하는 일들. (p.64)
<듣다>에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하루를 영위하기 위해 매일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현실을 보여준다. 아마 '되풀이하는 사람'이라는 문장을 '되풀이하려는 사람'이라고 고쳐 써야 할 것이다. 하려고 하지만 잘 되지는 않는. 그래서 늘 외롭고 고독한, 질릴 정도로 짜증 나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는, 바로 우리들.